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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가 오메르타 성에서 열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습기 짝이 없네.
정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만찬회에서 빠져나와 내 처소에 틀어박혔다.
로냐와 루실이 눈치를 보며 기웃대는 것도 전부 내보냈다.
상상 너머의 최악의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탓일까, 아무 느낌도 일지 않았다.
수치심도 두려움도 내가 느껴야 할 마땅한 그 모든 감정도 그저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에 그칠 뿐이었다.
마치 내가 어떤 벽 밖으로 나와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세상 속 인물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
그대로 침대에 몸을 파묻고 누워 잠들었다 깼다 한 것 같다. 꿈속에서 나는 전생의 기억과 현생을 오갔다.
어딜 가나 소름 끼치는 푸른 눈이 나를 쫓아다니는 기분 나쁜 악몽투성이.
그 눈에 담겼던 표정이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흐흐흑…….’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온통 어둑했고, 나는 맨발로 잔디를 밟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검은 하늘 위로 둥그렇게 뜬 하얀 달이 보였다.
꿈인가? 현실인가?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흐른 거지?
‘흐흐흐흑…….’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부드럽게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을 따라 저 멀리서부터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환청인가? 아니면 혹시 밴시의 울음소리?
하지만 밴시가 우는 거는 집안의 누가 죽는 거랬는데. 예전에도 들었는데 아무 일 없었잖아.
죽을 사람이 나인가? 어서 죽으라고 고사 지내나? 아니면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인 걸 알아채고서 저러는 걸까?
그러게. 난 이미 죽었잖아. 죽은 혼이 남의 몸을 빌린 거야.
어떻게 보면 골렘이랑 비슷한 격이네. 그래서 마물들이 날 좋아하는구나.
“이번엔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이상한 말투다.
나는 멀뚱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밤의 어둠 속에서 하얀 달빛에 물든 여인의 자태가 시야에 들어왔다.
엘레니아였다.
당연히 그녀였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얼굴에 담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또 어디로 사라지시려고.”
기이하리만치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내가 아까의 기억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부드럽다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 또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맞아, 현실의 엘레니아였다면 지금쯤 내 뺨을 치고 있었겠지.
“바람피우러 갈까 봐 그래요?”
홍옥처럼 짙은 붉은 눈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역시 꿈이 분명하다. 웃음이 킥킥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나한테 안 물어봐요.”
“……뭐를 말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무도 나한테는 안 물어본다고요.”
“…….”
“뭐 원래 항상 그랬으니까 딱히 상관은 없는데, 가끔 진실이 뭔지 나도 헷갈릴 지경이야.”
세찬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발바닥 아래 느껴지는 풀의 감촉이 부드럽다. 바람을 따라 걸어보자,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걸어 다니시면 안 됩니다.”
“어라, 엘렌이 내 팔 잡았네. 신기하다.”
“…….”
“우와, 서리 버섯이다!”
엘레니아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반짝이는 버섯 앞에 주저앉았다.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꿈에서라도 내 마음대로 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건 서리 버섯이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엘레니아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잘 안 들린다.
가만, 아픈 마물들이 서리 버섯으로 회복한다던데 그럼 혹시 나한테도 효과가 있으려나?
난 골렘이잖아. 아프진 않더라도 오염됐는데, 뭔가 정화 효과 같은 것이…….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음, 엘레니아의 목소리가 왠지 격하게 떨리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여간 비현실적인 꿈이야.
“대체 뭐 하는 거냐고요?”
“말 걸지 좀 말아봐요, 지금 씻어내는 중이니까.”
형광빛 버섯모로 입술을 문질문질하는데 감촉이 꽤 좋다.
향기도 괜찮고. 이걸로 립밤 만들어도 되겠어. 서리 버섯 립밤이라니 오직 나만 쓸 수 있잖아?
“루비!”
아, 깜짝이야.
종일 악몽에 시달리다 마침내 좀 괜찮은 꿈을 꾸나 싶었는데, 갑자기 가만히 서 있던 엘레니아가 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내 버섯을 빼앗아 저만치 던져 버렸다. 아니, 내 꿈에서 이 무슨 짓거리야?!
“아 진짜, 엘렌, 당신이 예뻐서 다행인 줄 알아요.”
“루비.”
“아, 좀 놔요. 나 저걸로 정화해야 한단 말이에요. 안 그러면 이스켄지 이새낀지 하는 놈한테 갈 수 없단 말이야.”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정확히는 엘레니아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자기를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좀 놓으라고 짜증을 내려는데 그녀의 표정이 너무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멈칫해 버렸다.
“다 됐습니다.”
“예?”
“다 됐으니까 제발…….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것 참. 이상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만 골라 한다.
손을 들어 엘레니아의 눈가에 대보았다. 예쁜 눈동자가 계속 흔들려.
“거짓말. 표정만 봐도 알겠는데.”
“…….”
“내 눈은 못 속여요. 눈에 담긴 표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파란 눈에 담겼던 표정은 갈망.
언젠가 빨간 눈에서 보았던 그것과 똑같아. 그래,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거야.
차라리 염탐꾼들을 위한 연기에 불과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어떻게 그래. 우스워. 너무 우스워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해. 내 전의 삶도 지금의 삶도 너무너무 웃겨 죽겠어.
“거짓말 아닙니다.”
“흐음, 진짜요?”
“진짜요.”
“진짜 진짜?”
“……진짜 진짜.”
“그럼 나 이제 그놈 만나러 갈래요.”
폴짝 몸을 일으키는 찰나 이번엔 어깨가 홱 붙들렸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힘이 너무 센데?
“엘렌 여기서 너무 괴력이야. 이거 놔요, 나 그놈한테 가야 한다니까?”
“안 됩니다. 내일까지…… 참으셔야 해요.”
“하지만 내일은 나 여기 없을 건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은 또 어떤 꿈을 꿀지 내가 어떻게 아나?
나는 버둥거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여기 달 진짜 예쁘군. 이왕 꿈꾸는 거 날아올라서 닿아볼까?
근데 그게 되려나? 어떤 꿈은 완전히 자유자재인데 어떤 꿈은 안 그래.
“저기로 갈 건데.”
“…….”
“저기로 가서…… 언니를 만날 거예요. 와, 진짜 그러면 좋겠다.”
“…….”
“근데 성공할지 모르겠네. 엘렌이 나 좀 도와줄래요?”
“…….”
에이, 재미없군. 사사건건 방해만 하고 노려보기만 하고 뭐람 이게.
너무 지루해서 이미 잠들었는데 또 잠들 것 같아졌다.
“졸려요, 엘렌. 나 잘래.”
“……안으로…….”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꿈의 잔상이 아련하게 귓가에 웅웅거린다.
나는 팔을 벌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엘레니아의 환영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이대로 영영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