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36)

* * *

“아, 옛날에 여기서 구르다 머리 깨졌던 거 기억나네요. 아홉 살 때였나?”

“그러셨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그때 공녀께서 저기서 숨바꼭질하고 계셨는데.”

“글쎄요, 워낙 어릴 때라.”

무심하게 얼버무렸으나 사실 기억이 났다.

어렴풋한 옛 추억의 잔상. 오메르타 공작저의 뜰이 여기저기서 뛰어노는 어린 영윤들로 가득했던 시절.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의 한 장을 멀리 밀어내며 엘레니아는 반짝이는 유리 건물 쪽을 응시했다.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남매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등 돌린 공자비의 긴 금빛 머리 다발이 흔들거렸다.

“다투는 걸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이반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쫓아온 것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에서…….”

“엘렌!”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불쑥 들려온 해사한 음성에 엘레니아는 일순 흠칫했다. 동시에 자신이 왜 상대의 등장에 꺼림칙한 기분이 든 건지 의아해졌다.

“프리? 여기까지 왜 나왔어……?”

“그야 너 찾으러 왔지, 산책도 할 겸. 나도 하도 앉아만 있었더니 머리가 아파져서.”

투덜대며 관자놀이를 누르는 프레이야의 옆에는 물빛 머리카락의 남자, 카뮤 경이 언제나처럼 까칠한 얼굴을 하고서 프레이야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와 아이반이 서로 묘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을 엘레니아는 못 본 체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 했어.”

“그래? ……어머, 저기 발렌티노 추기경이시네? 온실 구경하러 오신 건가?”

“가자.”

엘레니아는 얼른 프레이야의 손을 붙들고 재촉했다.

이유야 여전히 모를 일이었지만, 프레이야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정확히는 저들을 지켜보는 것이.

“……잠깐만.”

한데 무슨 연유에선지, 막 따라 같이 몸을 돌리려던 프레이야가 멈칫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짜증이 치솟는 느낌에 얼굴을 약간 굳히던 엘레니아는 이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한 곳을 응시하는 이가 프레이야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뮤와 아이반 또한 완연히 넋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 또한 다시 온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 * *

여태까지 느낀 충격은 충격도 아니었다.

놈의 손이 불쑥 내 한쪽 얼굴을 아프게 움켜쥘 때까지도 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 우습게도, 난 단지 그가 나를 때릴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였으니까. 그때까지는.

다른 목적으로 내 얼굴에 손을 얹는 이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내가 무지했던 걸까? 짐작조차 못 한 내가 바보일까?

모르겠다. 살아남기 위해선 타인의 심중을 얼마만큼이나 헤아려야 하는 걸까?

본인조차 억누르려 애쓰는 엉망진창으로 꼬인 감정을 내가 다 파악해야 했던 걸까?

머릿속이 하얬다. 온통 새하얬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체시아레가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손을 떨어뜨리며 물러나는 그 짧은 순간이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언제까지나 너와 나야.”

그가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검은 수단 자락이 펄럭였다. 그가 몸을 돌리고 멀어져 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통 뭐에 홀린 것처럼 멍했다. 그저 멍하기만 했다.

마치 무언가가 내 어깨를 홱 잡아끈 것처럼, 퍼뜩 뒤를 돌아보기까지 그랬다.

그 순간 무엇이 나로 하여금 등 뒤의 벽을 보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리 벽 너머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나만큼이나 넋이 빠진 네 사람의 파랗게 질린 낯과 마주한 순간 사방이 갈라지고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나에게만 들리는 환청일 뿐이었다.

몰랐을 리가 없었다.

체시아레가 저들의 존재를 인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이제부터 깨닫게 될 거라는 말이 바로 이걸 뜻하는 거였다.

이루 형언할 수가 없는 경악으로 벌어진 엘레니아의 붉은 눈을 보며 나는 문득 이스케도 곧 똑같은 눈이 되려나 궁금해졌다.

나아가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수치심? 억울함? 좌절? 공포? 아니면 모두 다……?

“다들 아무 말 마십시오.”

“…….”

“내일 오빠가 경기를 끝낼 때까지……. 한마디라도 새어 나갔다간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엘레니아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차분했다.

조금 전 올케의 충격적인 모습을 본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멍하게 먼 산을 응시하는 듯하던 프레이야가 해쓱하게 질린 낯을 천천히 돌렸다.

“엘렌, 나는…… 나는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

“정말…….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설마설마했는데, 그 소문이 진짜로…….”

프레이야의 반응은 무리도 아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럼에도 엘레니아는 스스로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당장에라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분노가 보르히아 남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너 내가 아무 말 말라고 하는 거 못 들었니? 오메르타의 이름이 우스워?”

살 떨릴 정도로 으스스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보라색 눈을 휘둥그레 치뜬 채 친구를 응시하던 프레이야가 이내 벌어진 입을 다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쩐지 사과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엘레니아는 프레이야가 그대로 머뭇머뭇 멀어져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대신에 묵묵히 잎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두 성기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하지만 공녀께서 방금 아무 말 말라고…….”

“이럴 줄 알았느니 어쩌니 운운만 아니면 됩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오메르타가의 사람이니까요.”

엄연히 오메르타 가문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렇게나 떠들어댈 만한 문제가 아니라 이거다.

그러나 동시에 롱기누스 기사단의 일이기도 했다. 교황청에 충성을 맹세한 팔라딘들이자 북부의 수호자들.

“전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아니, 대체 뭘 본 건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공자비를 짝사랑하는 어느 마수 새끼가 기어 들어와서 환각을 펼친 거라고 누가 좀 말해주십시오.”

아이반이 넋이 나가다 못해 얼빠진 낯으로 중얼거린 소리였다.

그다운 욕설조차 한마디 안 하는 걸 보아하니 어지간히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특유의 까칠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거의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연기를 내뿜던 카뮤가 아이반의 옆구리를 툭 쳤다.

누가 팔라딘 아니라고 할까 봐. 엘레니아는 그만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 또한 아이반의 기분에 매우 동의하는 바였으나 지금이 마수 운운할 때인가.

“내일 이스케가 경기를 마칠 때까지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데에는 이쪽도 동의합니다만…….”

느릿하게 운을 떼는 카뮤의 어조는 창백하게 질린 낯과 대조적으로 건조하고 까칠했다.

“……그다음에는 어쩌실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축제는 내일 끝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시다시피. 그때까지 저희 입을 봉하실 작정입니까?”

교황청과의 충돌을 감안하느냐 마느냐.

엘레니아는 한발 느린 두통이 뒤늦게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스케가 방금 그들이 목도한 것을 전해 듣는다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발렌티노 추기경이 에렌딜을 떠나지 않은 상태라면 필히 난장판을 피할 수 없을 터다.

비단 교황청 인사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귀객들이 몰려와 있는 시국이었다.

자칫했다간 오메르타의 명예 실추는 물론이요, 대륙의 국제 정세가 아수라장으로 뒤집어질지도 몰랐다.

“공녀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압니다. 그 부담을 혼자 떠안으실 이유도 없지요. 하지만 전 멍청한 동료 놈이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 뻔뻔한 보르히아 놈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 꼴만은 절대 못 본단 말입니다.”

엘레니아는 눈을 깜빡이며 아이반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반은 잎담배를 뻑뻑 피워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아이반 또한 카뮤의 말에 동의한다는 거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이스케를 무지 상태로 놔두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잔인하고 잔인한 짓이었다. 뒷감당도 문제였지만.

어쩌면 좋은가.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지끈거리는 두통에 붉은 두 눈이 지긋이 감겼다.

아까 본 루드베키아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서 맴도는 듯했다.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믿고 싶었으나 치미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었다.

아이반의 말마따나 차라리 환각을 본 거였다면 싶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경들께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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