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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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비밀 장소에 누가 멋대로 침입한 꼴을 본 어린아이의 심정이 이런 것이려나?

여긴 소중한 비밀 장소도 아니었고 오빠 놈이 멋대로 침입한 것도 아니지만 현재 내 기분을 굳이 비유하자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심정을 알 턱이 없는 체시아레 놈은 마치 정말로 정원의 생김새가 궁금하기라도 했던 척 흥미 어린 낯짝으로 주변을 둘러볼 따름이었다.

“저건 뭐야? 루비 네가 들어가 노는 건 아닐 테고.”

저거란 바로 인형의 집을 뜻하는 거였다.

아,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군.

“당연히 아니지. 아리엔 왕녀님이 친구랑 종종 놀러 오셔서 들여놓은 거야.”

“왕녀? 아, 그거. 너랑 제법 친한 모양이네.”

“나랑 친하다기보다는……. 여길 좋아하시더라고. 사촌 집이기도 하잖아.”

“고귀하신 오메르타가 반쪽짜리 잡종을 친척으로 인정해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

어쩐지 신랄한 어투였다.

어린애를 두고 무슨 소리냐 할 법했으나 애초에 그런 상식이 통할 만한 인간이 아닌 고로 그냥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체시아레뿐만이 아니니까.

일전에 프레이야가 내게 한 말도 비슷한 맥락이었으니.

나와 친해지기 전까지 아리엔은 오메르타가와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작에선 아예 존재감이 없었으니 말 다 했다. 휴, 가엾은 아리엔.

“뭐, 우리도 아버지께서 지금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비슷한 처지였을 테지만 말이야. 이교도 피가 섞인 것보다야 나은 취급이었겠지만 그래도.”

이 새끼가 웬일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척하는 거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체시아레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세찬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분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게 물려주려 하시는 거고.”

“…….”

“당연해. 그게 당연하다는 거 아는데 말이지…….”

목소리가 침침하게 가라앉는 동안 맹렬한 푸른 눈 또한 어둑하게 가라앉으며 어수선하게 요동쳤다.

아아, 왜 또 갑자기 안 어울리는 분위기를 잡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이지 내 주변 놈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툭하면 심보가 이랬다저랬다 미쳐 날뛰어대는 망아지 같지?

좀 정신적으로 건강하며 심지 굳고 줏대 있는 어른스러운 인물은 단 하나도 없는 건가?

전생이나 현생이나 참……. 아니면 혹 내가 문제인 건가?

나랑 있으면 얼마나 멀쩡한 놈이었건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생겨 버리는 뭐 그런 저주라도 있어서?

젠장, 왠지 그럴싸한데.

“우리 아버지가 교황이 아니었어도…… 오빠는 틀림없이 뭐가 되긴 됐을 거야. 내가 알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익숙하나 이런 기이하게 씁쓸한 척하는 분위기는 영 적응되지 않았기에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내 감정과는 별개로, 실제로 이런 야망 넘치고 능력 좋은 새끼라면 부친의 권력이 없었더라도 뭐가 되긴 했을 것이다.

물줄기로부터 시선을 뗀 체시아레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마주한 놈의 얼굴은 복잡한 듯 쓰라리고 고독해 보였다.

넌 정말 내 전생의 큰오빠 놈이랑 참 닮았어. 비단 외모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이런 괴상망측한 면모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럼, 당연하지. 솔직히 엔죠 오빠는 지금이랑 별다를 거 없을 것 같지만…… 오빠도 마찬가지인걸.”

“가끔은 아버지가 교황이 못 되었더라면 우리 모두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

“특히 너와 내가. 간혹…… 그냥 전부 때려치우고 너와 어디 멀리 작은 섬으로 도망쳐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 아무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간섭도 하지 않을 곳에서.”

정적이 흘렀다.

난 문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뭔가 적당한 반응을 해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가당찮은 소리를 하는 걸까?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니, 꿍꿍이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말문이 막혀 버린 이유는 순전히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어이도 없고 양심은 어디 뒀나 실로 궁금한 미친 소리긴 하지만…… 이놈이 미쳤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내가 그렇게 일순 얼어붙어 버린 동안 체시아레는 분수대로부터 몸을 돌리고는 반짝이는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유리 돔 벽을 한 바퀴 주욱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서서히 기이한 이질감이라고 할까, 자신의 처지와 맞지 않는 자리에 와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일었다.

“어설프니 뭐니 하는 걸 떠나서 확실히 훌륭한 작품이네. 내가 고작 이런 것에 동요할 줄은 몰랐는데……. 만만찮은 놈이군.”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뭐가 됐든 내일까지 무사히 견디기만 하면 된다.

그리 마음을 다지며 놈의 손을 다시 잡고 입구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걸. 로마냐 집 정원이 훨씬 화려하잖아.”

“화려하다고 다가 아니지. 넌 여기서 아주 행복하겠구나.”

“글쎄…….”

“안 그래?”

“응?”

“여기서 행복하냐고, 루비.”

네놈 사전에 적힌 행복의 참뜻을 알려다오.

행복이고 자시고는 모를 일이다만 네 녀석들과 로마냐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긴 하단다. 죽을 걱정도 덜었고 말이야.

네놈에게 내 속내를 들키는 건 곧 죽어도 아니 될 일이지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서 부루퉁하게 놈을 흘겨보았다.

“오빠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런가……?”

“그런가라니! 옛날부터 난 주님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다면 이렇게 툭하면 팔려와서 오빠랑 떨어질 일도 없었겠지.”

그가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아니면…….

“넌 수도원의 벽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또 어릴 때 얘긴가.

맥이 약간 빠졌다. 네가 소년 시절 수도원에서 학대당하는 누이동생을 영웅처럼 구해온 얘기 또 꺼내고 싶은 거니?

“모르긴, 나도 어릴 때 수도원에 있었는걸.”

“그것과는 또 다르다고. 게다가 넌 어렸잖아. 진짜 수녀가 되고 나면 어떻게 사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거참, 의외의 대꾸로구나.

순간 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막은 거라고 착각할 정도야. 아유, 참 다정도 하셔라.

“어차피 이젠 수녀 되긴 글렀잖아, 안 그래? 오빠가 이상한 질문을 해서 말해본 것뿐이야.”

“그게 이상해……?”

“이상하지, 그럼.”

“그럼 아까 내가 한 말도 이상한가?”

“무슨 말?”

“전부 때려치우고 너와 어디 섬으로 달아나고 싶다고 한 거.”

이 새끼 이거 진짜 왜 이래?

내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적절한 말을 고르는 찰나 놈이 다시 말했다. 이번만큼은 퍽 그답게.

“아버지는 이렇게 된 김에 아예 북부를 먹는 게 어떠냐 하시더군. 네가 예상 밖의 한 수를 둬주었다나.”

내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마주 잡은 손이 움찔거리면서 숨 또한 뻣뻣해졌다.

방금 뭐라고……?

내 반응을 예상한 건지 어쩐 건지, 체시아레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지극히 건조한 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브리타냐의 공비를 넘어 왕비가 된다면 콧대 높은 북부도 더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

“아버지다운 발상이지. 오메르타 쪽에선 왕녀의 존재 때문에 대놓고 티를 못 내고 있지만, 우리가 밀어주면 가능해.”

하, 그래. 과연 너네 보르히아다운 발상이다.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어느 나라의 왕도 멋대로 왕좌에 앉을 순 없다.

그건 아주 오랜 역사를 걸쳐 내려온 강력한 성권이었다.

물론 아무리 교권이 절대 권력이라 한들 교황청에서 마땅한 명분도 없이 멋대로 타국 왕실의 후계권에 간섭하거나 했다간 사달이 나기 십상이었으므로 그게 큰 영향을 미친 경우는 의외로 적었다.

현재로선 왕위 계승자가 교황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교황청 측에선 승인의 의미로 대관식을 참관할 인사를 보내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현 브리타냐의 정세라면…….

교황이 이교도인의 피가 섞인 왕은 있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면 명분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차고 넘쳤다. 브리타냐 내부에서도 반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거기에 오메르타까지 동조한다면 결과는 이미 정해진 셈이다.

그럼 설마 조금 전 아버님과의 기괴한 조합이 그런 이유에서였나?

페아놀 왕은 일이 이리되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왕비가 되고 싶어, 루비?”

그 질문을 듣고 싶을 사람은 정작 따로 있는데 말이지.

파도 같은 혼란이 물러가면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 치면, 아마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원작의 결말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엘레니아의 암살도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러면 아리엔은? 아리엔의 운명은 어떻게 되지? 게다가 이스케가 과연 그걸 바랄까?

“나는…… 모르겠어, 상상도 안 해본 일인걸. 남편이 거기에 순순히 동조할지도 모르겠고.”

“네 남편이야 네가 왕비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만 하면 될 거고.”

코웃음을 치듯 중얼거리는 체시아레였다.

눈매가 난폭하게 일그러지는 모양새가 진심으로 그리 믿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러면……. 난 집에 돌아갈 가망이 아예 없어지는 거네. 오빤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

체시아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내 손을 잡고 서서 한참 말없이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 눈에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네 말이 옳아.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지.”

마침내 동문서답하는 음성은 낮디낮았다. 거의 잠긴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 어디 섬에서 고기나 잡고 살면서 만족할 인물은 못 되지.”

“그게 지금…….”

“왕비가 되고 싶어, 루비? 솔직하게 말해봐. 여기서 행복한 거야?”

표정이 싹 가셨던 눈에 순식간에 불꽃이 일었다. 푸른 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잡힌 손이 아파왔다.

급작스러운 건 둘째 치고 하도 끔찍한 기세라 그만 당혹감이 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그놈 옆에서 왕비가 되면 행복할 거냐고 묻고 있잖아. 아무리 봐도 넌 더 이상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것 같지가 않거든.”

입이 벌어졌다.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만일 눈빛만으로 사람을 도륙 낼 수 있다면 난 진작 조각조각이 되어 흩어졌을 것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오직…….”

“넌 여기 있는 동안 내내 철저하게 신전의 접근을 외면했어. 그게 왜일까?”

“그거야 집안사람들이 항상 의심하고 있으니까, 남편도 싫어하고 또…….”

“아니. 네가 여전히 날 그리워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전과 통해 소통할 방법을 찾았겠지. 매번 감시당하는 편지만 쓰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그놈이 무슨 권리가 있다고 너를 막지? 무슨 권리로 널 마음대로 해?”

마지막 말이 폭발하듯 울렸다.

비단 나를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퍼뜩 의구심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걸까?

그가 갈구하는 모든 걸 가진 내 남편을?

흠 하나 없는 고귀한 혈통도 기사의 견장도 빛나는 왕좌도 심지어 부친을 거스를 능력도 전부, 힘 하나 들일 필요 없이 그저 날 때부터 당연히 타고난 권리의 소유자라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교황의 장남 체시아레 데 보르히아가 은밀히 간직한 열등감.

그가 그토록 물불 가리지 않는 야심가인 건 어쩌면 그 열등감 탓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이스케의 존재가 이토록이나 그에게 거슬리는 열등감의 반사체일 줄이야.

“나는…….”

“…….”

“오빠, 나는 지금 무척 혼란스러워. 내 남편은 나한테 잘해주지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잘해준다는 말 같은 거 붙이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그러나 체시아레가 가진 열등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무엇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는지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였다.

내가 그걸 알 수 있는 진짜 루드베키아가 아니라 3년 전 그녀의 몸을 독차지한 외부인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널 여기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그가 내 말을 끊고 으스스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 나를 가까이 바짝 끌어당겼다.

결단을 내린 독사의 그것처럼 활활 작열하는 눈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잘해줘? 그래, 내가 그 모든 꼴을 보고도 이걸 예상 못 했다면 신이 나를 용서하실 일이지. 그놈이랑 여기서 왕비가 되고 싶어? 그래?”

“내, 내 말은…….”

“더는 아버지 꼭두각시 짓 할 마음 없어. 착각하지 마, 루비. 그놈이 널 버리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렇게 되면 왕비도 왕비 나름이지. 결국 언제까지나 너와 나야. 이제부터 깨닫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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