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 위에 찬사를 보내는 바다.
그간 나 때문에 몇 년을 시달렸는데도, 딸기 푸딩을 먹을 때쯤 드디어 말썽을 일으키긴 했으나 이만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그 많은 음식을 그렇게 순식간에 해치웠다니, 나도 참 미쳤지.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어쩌면 단순히 세 작자 모두 취해서 맛이 간 상태일 뿐일지도 몰랐다.
체시아레야 절대 그럴 놈은 못 된다는 거 내가 알지만, 아버님이나 알폰소 공은 또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 모두에게 약간의 빈틈이라도 내보일 수 없었다.
에휴, 죽겠군. 그래도 내일까지만 견디면 이것도 전부 끝난다.
“괜찮아?”
입안을 깨끗이 헹구고 화장을 다시 고친 뒤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시늉을 하며 나오는 찰나였다.
아무래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대선 오빠 놈의 모습에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가슴이 여우 앞의 토끼처럼 쿵쿵 뛰어대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괜찮아, 겁먹을 거 없어, 이 녀석은 내 거식증에 관해서만큼은 전혀 모르니까…….
“응, 고마워. 단걸 너무 먹었더니 입안이 텁텁해졌을 뿐이야.”
“그럴 만도 하지. 그나저나 무척 오랜만에 보네.”
“뭐를?”
“네가 그렇게 잘 먹는 모습.”
순간 뭔가를 눈치채고 비아냥대는 건가 싶어 철렁했으나, 푸른 눈을 내리깔고서 잠시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는 체시아레는 웬일인지 비아냥대는 것 같지도, 딱히 꼬투리를 잡으려 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봐.”
생소하다면 생소한 분위기.
어째 묘하게 씁쓸하게 들리는 건 단지 내 착각일 뿐이겠지?
설마 이 자식 진짜로 취한 건가?
그럴 놈이 못 된다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지 않은가.
이 사이코 변태께서 가끔 나의, 그러니까 루드베키아의 어린 시절을 언급할 때면 거의 낯설 정도로 묘한 표정이 된다는 사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 시절이 그리운 건가 보다도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루드베키아는 내가 아닌걸.
아무것도 모르고 너 같은 놈을 졸졸 따랐을 그때의 그 소녀는 내가 아니라고.
“난 항상 나름 잘 먹었는데…… 단지 소식을 즐기려 애썼을 뿐이야. 유행에 맞춰서 말이야.”
“…….”
“오빠, 왜 그래? 내가 또 뭐 실수했어?”
태연함과 조심스러움의 경계를 넘나들며 묻자 놈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팔짱을 풀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왼손을 잡아 올리고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로마냐에서 대리 결혼을 치를 때부터 껴온 반지는 이렇다 할 특색 없이 평범했다.
“아니…… 그냥 있는 것뿐이야.”
이건 또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란 말인가?
짧은 침묵이 스쳐 갔다.
다중인격 오빠 놈은 이번엔 또 무슨 심산인지 한참 조용히 내 손만 만지작대다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마침내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은 다시 예의 그 음울하게 미소 띤 얼굴이었다.
“저택 구경 좀 시켜줄래?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이라니……?”
“네 유리 정원.”
“…….”
“꽤 유명한 것 같던데.”
……그럼 그렇지. 답지 않게 뜸 들일 때부터 이상했어.
긴장이 다시 치솟으면서 겨드랑이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유명하지는…… 보면 실망할 거야. 그냥 로마냐의 집 정원 조금 흉내 낸 거에 불과하거든.”
“그거야 직접 보면 알 일이지. 혹시 나한테 보여주기 싫어?”
천연덕스러운 투였으나 그 아래 경고의 기미가 어수선하게 깔려 있었다.
아주 정확하게 짚었다, 이놈아.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체시아레가 그 정원에 발을 들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
고작 온실 정원일 뿐이거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할 순 없는 고로 황급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가자.”
* *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서 뜰로 향하는 남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엘레니아는 잠시 심각한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대체 내 어디가 잘못된 거지.’
제집에서 기웃대며 남 염탐하는 짓거리는 다섯 살 이후로 졸업했거늘.
이대로 발을 돌려 만찬회장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마음을 먹은 것과는 반대로, 어느덧 브리타냐의 얼음 공녀께서는 올케의 뒤를 쫓아 은밀하게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대관절 뭐에 홀려 이런 짓거리나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단지 오빠의 부탁 때문에?
아까부터 루드베키아가 심상치가 않게 느껴져서?
뭐에 홀렸건 간에 종일 신경 한구석을 거슬리게 긁고 있는 어떤 감이라고 할까, 그런 기이한 거슬림이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않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정당화에 불과했지만…….
“에헴.”
등 뒤에서 불쑥 울린 낮은 헛기침 소리에 엘레니아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말간 녹색 눈을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이고 있는 한 송이 꽃 같은 팔라딘을 보게 되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가 경을 잘 몰랐다면 경께서 절 감시하고 있다 생각했을 겁니다.”
“제가 공녀를 잘 몰랐다면 공녀께서 남부의 황태자에게 반했다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놀리는 건가?
엘레니아는 잠깐 정색하고 아이반의 실실 웃는 낯짝을 바로 쏘아보았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빠가 그쪽에게도……?”
“예. 공녀께도 그럼……?”
“이럴 거면 애초에 경기 참석은 왜 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냥 본인이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을.”
엘레니아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녀는 모르고 자신들은 아는 이유가 입안에서 맴도는 것을 삼키며 아이반은 가만히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유리 정원을 둘러볼 요량인가 봅니다.”
“…….”
“공녀?”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루비가 알면 굉장히 불쾌해할 텐데, 스스로가 한심해요.”
“우리가 한심해할 인물은 따로 있죠. 애초에 이스 그 자식이 원흉 아닙니까.”
“오빠는 로마냐 인사들을 잘 지켜보란 식으로 말했지 이런 식으로 염탐하라고 하진 않았습니다만.”
“뭐 말이야 그렇지만, 공녀께서도 나름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뭔가 걸리신다면 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자, 그럼.”
하고 나긋나긋하게 덧붙인 아이반이 대뜸 불쑥 한쪽 팔을 내밀었다.
엘레니아는 잠시 멀뚱히 그 선 좋은 팔을 노려봤다가, 마침내 겨우 입을 열었다.
“예……?”
“가시죠. 저희도 뜰에서 산책을 하러 나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