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공녀?”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엘레니아는 화들짝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타국의 대사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 뻔하다니, 이게 웬 답지않은 바보 같은 짓인가.
“송구합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허허, 마음 쓰실 거 없습니다. 좌우지간 공녀께선 과연 듣던 대로 기품이 넘쳐 흐르시는군요.”
“……저에 대해 많이 들으셨나 봅니다.”
“아, 부디 불쾌히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오메르타 공녀의 미모는 도리아스 왕실까지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라, 언젠가 실물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하고 겸연쩍게 미소 짓는 도리아스국의 대사를 엘레니아는 잠시 말없이 빤히 응시했다.
딱히 불쾌감이 일지는 않았다. 단지 역시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일 뿐이었다.
이미 무수한 혼담이 끊임없이 쏟아져 오는 입장이다.
대번에 눈치채지 못하면 도리어 둔하다 할 것이었다.
도리아스 왕실 측에서 예전부터 브리타냐에 손을 뻗으려 안달이라는 사실도 대강 알고 있었다.
단 오메르타 가문과 보르히아 가문이 혼약으로 동맹을 맺은 시기에 이리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파경이 이뤄졌다면 모를까, 혹은 예전처럼 누가 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면 모를까. 현재의 로마냐와 냉랭한 관계인 도리아스 왕실로선 모험인 셈이었다.
혹 아버지가 그쪽에 다른 속내라도 내비친 것인가.
어쨌든 이런 대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엘레니아는 술잔을 기울이는 척하면서 다시 저만치 만찬 테이블 쪽을 힐긋거렸다.
오메르타 공작과 렘브란트의 비셸리에 공작, 거기다 발렌티노 추기경까지 사이좋게 앉아 있는 장소.
참으로 기괴한 조합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었다.
모두 오늘 경기의 열기로 인해 잔뜩 흥이 들떠 정신이 팔려 있는 탓에 그럭저럭 묻히는 그림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만찬회가 파하기까지 내내 입을 벌린 채 저 세 작자를 지켜보느라 넋이 빠졌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까부터 계속 엘레니아의 신경을 끌어당기고 있는 요소는 저 비현실적 자체인 조합의 그림이 아니었다.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발렌티노 추기경의 옆에 앉아 있는 루드베키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하고 있는 행위가.
“공녀께선 혹 도리아스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부끄러우나 아직 에렌딜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만.”
이제 루드베키아는 어느덧 셰퍼드 파이를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커다란 접시에 수북이 쌓인 레몬 타르트를 먹고 있었다.
엄청 맛있나 보다 싶은 건 둘째 치고 한시라도 입안이 비는 틈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가 이상했다. 여태 같이 식사할 때조차 그녀가 저토록…… 잘 먹는다고 해야 할까, 식욕이 왕성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시 친정 오빠가 와 있는 덕에 마음이 편한 것일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자리에선 상당히 불편할 터인데.
“공녀, 여기 계셨군요.”
“아이반 경.”
불쑥 끼어든 쾌활한 목소리가 새삼 반가웠다.
엘레니아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이반을 돌아보는 동안 대사가 약간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 같이 게임하려는 중에 혼자 빠져나가깁니까?”
“미안하게 됐네요. 여기 카자흐 공께서 잠시…….”
“아니, 이분께선……? 어디 보자, 도리아스의 사절 아니십니까?”
소녀처럼 고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눈을 위협적으로 부라려 대는 아이반의 모습에 일국의 대사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게 뭐였든 카자흐 공은 헛기침을 좀 하고는 순순히 양해를 구하며 물러났다.
“혹시 제가 눈치 없이 끼어든 겁니까?”
“아뇨, 오히려 고맙습니다. 영 지루하던 참이라.”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엘레니아는 시선을 완전히 저쪽으로 고정했다.
세 기괴한 조합의 남자들이 시시덕거리는 가운데, 루드베키아는 여전히 묵묵히 테이블의 모든 요리를 해치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타르트를 수 개나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서 이젠 초콜릿 수플레와 딸기 푸딩을 먹는 중이다.
“좀 이상하긴 하군요.”
아이반이 낮게 가라앉은 투로 속삭였다.
엘레니아와 같은 곳을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상하다는 것이 저 세 남자의 조합을 두고 하는 말인지 루드베키아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굉장히…… 맛있게 드시는데요. 공자비께서 원래 항상 저리 식욕이 좋으셨습니까?”
역시 아이반 또한 루드베키아가 뭔가 이상하다 느낀 듯했다.
뜻밖의 동지가 생긴 기분에 엘레니아는 낮게 마주 속삭였다.
“갑자기 뭔가 무리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늘 내내 쭉 그런 느낌이 들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거슬리는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하며 골똘히 루드베키아 쪽을 응시하던 엘레니아는, 이내 뭔가 묘한 느낌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아이반이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대뜸 씩 웃었다.
“왜 갑자기 웃으시는지요?”
“아닙니다, 그냥 역시 공녀께선 다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거 아닙니다.”
바로 그때 루드베키아가 음료를 쭉 들이켜더니 무어라 양해를 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양이 보였다.
토하러 가는 걸까. 엘레니아는 문득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역시 마음이 편한 게 아니라 그 반대였던 걸까.
순간 쫓아가야 하나 싶었으나 곧 바보 같은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쫓아가서 뭘 어쩐단 말인가?
“공녀? 괜찮으십니까?”
“……예, 물론.”
부디 이 축제가 어서 빨리 끝나 버렸으면 좋겠어.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바람을 마음속으로 삼키며 엘레니아는 아이반과 함께 친구들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프레이야를 선두로 한 영애들 대여섯과 영식들 여럿이 왁자지껄 모인 테이블에는 술 게임이 한창이었다.
“엘렌, 어서 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엘레니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프레이야가 불쑥 팔짱을 끼며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취기가 조금 오른 모양이었다.
“중간에 도리아스 쪽 대사분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보다 너 너무 마신 거 아니야?”
“난 별로 안 마셨는걸? 우리 로렌이야말로 엄청 마셨지, 불쌍하게도.”
과연,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 한쪽에 찌그러져 꾸벅꾸벅하고 있는 소년 종자는 퍽 가련해 보였다.
하필이면 자리도 자리인지라, 나이 핑계를 대고 적당히 빼려고 했어도 성질 고약한 팔라딘 선배들이 곱게 넘어가 줬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기다렸다는 듯 킥킥 이죽거렸다.
“고작 그거 마시고 나가떨어지다니, 성기사 서임은 일찌감치 포기해라. 애송아.”
“암, 너같이 약한 놈이 우리 동료가 된다니 신이 노하실 일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대로 즐거운 분위기.
그런데 중요한 이들이 빠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엘레니아는 슬슬 스스로의 상태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 이 모든 게 전부 이스케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즉, 애초에 왜 그딴 부탁을 해서 사람 기분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는가?
정작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발렌티노 추기경과 퍽 죽이 잘 맞아 보이지 않았던가?
어디든 그놈의 오빠 놈들이 문제다. 멋대로인 주제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엘레니아는 아까부터 예의주시하던, 자신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어느덧 우스꽝스러운 조합이 둘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