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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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오메르타 성에서 주최하는 만찬회.

기억하는 내용대로이기도 했기에 새삼스러울 건 없었으나 체시아레 놈이 공작저 안에 있는 모양새가 영 봐주기 거슬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지만, 뭔가 침범당하는 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이스케가 이곳에 같이 있었다면 좀 달랐으려나.

문득 그가 여기 있었으면 싶어졌으나 오늘 후반전까지 무사히 치러낸 후보들은 지금쯤 앙그반 궁의 숙소에서 죽은 듯 휴식하고 있을 터였다.

체시아레는 여기 있는데 이스케는 궁에 있다니 이것 참 아이러니하군.

“아, 루비.”

어쨌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띠고서 만찬 테이블로 돌아온 나는 하마터면 앉다 말고 멈칫할 뻔했다.

젠장할. 이건 또 무슨 웃기지도 않는 조합이지?

체시아레가 내게 더없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자. 원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관절 무슨 이유로 오메르타 공작이 바로 앞에 오붓이 마주 앉아 계시는가?

설상가상으로 알폰소 공은 여기 왜 껴 있는 거지?

나의 시아버님과 우리 가문 덕에 국제적 고자로 전락한 옛 파혼자와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나의 오빠 놈이 한자리에 사이좋게 앉아 뭘 하는 걸까?

당황한 기색을 영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알폰소가 양해를 구하듯 이를 드러냈다.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이다.

“이런, 놀란 표정이시군요. 오메르타 공작께 드릴 말씀이 있어 어쩌다 보니 이리되고 말았습니다.”

아하, 그렇단 말인가.

어쩌다 보니 내 오빠 놈과 마주 앉아 같이 시시덕 술 마시고 있었다 이거요?

넉살이 좋은 건지 그냥 원래부터 티 없이 해맑았던 건지 혼란스럽군.

“이 대회 감상은 처음이셨을 텐데, 소감이 어떻소이까?”

다들 뭐에 씌기라도 한 걸까?

알폰소뿐만 아니라 아버님 또한 만만찮은 넉살을 자랑하시는 것 같다.

체시아레 놈이야 원체 철면피니 그렇다 쳐도, 지금 이 조합이 매우 기괴하다 여기는 건 나뿐인 게야?

“상상 이상으로 굉장해요. 다들……. 다만 저는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내 아들놈 걱정은 하실 것 없소이다. 그 정도로 물 빠진 경기에서 나가떨어질 놈이었다면 어디 성하께서 귀한 따님을 보내셨겠소?”

“이런, 아버지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도 솔직히 매제가 좀 걱정되긴 했습니다.”

아버님이 알 만하다는 투로 너스레를 떨자 마찬가지로 넉살 좋게 받아치는 체시아레였다.

그러고는 알폰소까지 함께 셋이서 좋다고 껄껄 웃는 것이 아닌가.

이 양반들 혹시 정신 돌아버릴 정도로 취한 거 아니야?

이것들이 뭔 꿍꿍인지 몰라도 어설프게 휩쓸려 줄 마음 없다.

최소한의 대꾸만 하고 가능한 말을 하지 말아야겠어.

하여 나는 어설프게 따라 웃는 체하면서 빵 바구니에 담긴 따끈한 버터 롤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체시아레가 말을 걸어옴과 동시에 한입 가득 커다랗게 베어 물었다.

“그나저나 이런 대단한 성의 안주인이라니, 루비 너 하루하루가 떨리겠구나.”

“……으응.”

“과찬이십니다, 예하. 남부 귀족성의 웅장함에 비하면 초라하다 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렘브란트의 비셸리에 성도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지 않소?”

입안 가득 씹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아버님이 다시 끼어들었다.

이에 알폰소가 생글거리는 낯으로 겸손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독특한 양식은 무슨, 진작 유행 지난 고대 구식 양식이라 흉물이 따로 없습니다. 전통 운운하는 원로 노인네들 등쌀에 재건도 마음대로 못 하고 있지 뭡니까.”

“그거 안타까운 일이구려.”

너구리 양반들이 지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동안 열심히 와구와구 씹어 삼킨 뒤 버터 롤을 또 하나 집어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향긋한 허브가 박힌 결에 버찌 잼을 듬뿍 바른 뒤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힘들군. 말 걸지 마, 말 걸지 마.

“한데 이번 여정에 곤팔로니에레께서 동반하시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바쁘셨나 봅니다.”

엔죠가 신성 로마냐의 곤팔로니에레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체시아레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티 없이 해맑은 알폰소는 짐작이나 하려나.

물론 체시아레는 뻔뻔함으론 세계관 최강자답게 유유자적 대꾸했다.

“하긴 공께선 의외로 제 아우와 죽이 잘 맞으셨지요. 아닌 게 아니라 오겠다 생떼를 부려대는 것을 아버지가 겨우 뜯어말리셨습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뭐 알 만큼 아시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 여기 왔다면 필히 사방팔방 추파를 날려대다 진작 경기장 한복판에 던져졌을지도 몰라서.”

“하하하, 여전히 혈기왕성하신가 봅니다.”

지들끼리 좋단다.

저 주장에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이긴 하다만, 적어도 엔죠는 네놈들처럼 시종일관 음모나 꾸미는 다중인격들은 아니라고.

대체 이게 뭔 수작질인 거야? 소리 없는 욕설을 삼키며 나머지 버터 롤 반쪽을 씹어 삼킨 뒤 이번엔 새하얗고 동그란 빵을 집어 들었다.

“그럼에도 역시 왔으면 좋았겠지만. 안 그래, 루비?”

“으응.”

이럴 때만큼은 이 많은 양의 음식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담백한 빵 속에는 새콤한 노란 크림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와인을 몇 모금 넘기고 곧바로 새 빵을 집어 베어 무는 사이 세 놈의 눈빛은 서서히 멍해져 갔다.

심지어 체시아레 놈조차 뭔가 매우 신기한 것을 보듯 날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루비, 너……. 엄청 배고팠나 보구나.”

“으응, 오을 기자애서…….”

“아, 그래. 긴장해서 제대로 못 먹은 것 같긴 하더군.”

“빵만 들지 말고 다른 것도 드시오. 우린 손 안 댈 테니 말이오.”

그것참 다정한 말씀이로군요, 아버님.

난 단지 너네랑 말하기 싫어서 입안을 비우지 않는 것뿐인데요.

다시금 껄껄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나 또한 머쓱하게 웃는 시늉을 하며 으깬 감자와 간 고기로 속을 채운 파이 접시를 끌어당겼다.

칼로 가르지 않고 스푼만으로 와구와구 퍼먹는 북부식 파이였다.

크기가 어마어마 한지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두가 안 났던 요리다. 셰퍼드 파이랬나?

속 모를 망할 아버님은 일순 내게 뭔가 질문을 던질 기세였으나, 내가 북부의 기상이 담긴 대왕 파이를 커다랗게 한입 떠넣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내 오빠 놈에게 화살을 돌렸다. 휴우.

“예하께선 북부 음식이 입에 맞으신지 걱정이로군요.”

“염려 마시길, 이래 봬도 식도락이 취미라서. 공작께선 남부에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젊었을 적 몇 번인가, 운 좋게도 성탄절 시즌에 방문했던 기억이…….”

내가 미친 건지 다들 미쳐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실컷들 사이좋게 놀아라.

원래 항상 나 빼고 다들 그랬으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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