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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분과는 몹시 대조적으로 하늘이 시리도록 맑은 날이다.
물론 남편 놈의 건승을 비는 입장으로선 다행인 일이나 쓸데없이 쨍쨍한 햇볕에 괜히 심술이 났다.
왜 매번 날씨조차 날 약 올리는 것 같냐고?
“춥진 않아?”
다정한 투로 묻는 체시아레 놈을 힐긋 돌아보았다.
검은 수단 차림으로 앉아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묵주를 쥐고 있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고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를 보는 푸른 눈길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경기 내내 이 새끼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없이 슬퍼진다.
“응, 괜찮아.”
“이 자리가 불편하다면 바로 말해도 돼.”
웃기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닌 거 잘 아실 텐데? 하여간 성격 쓰레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 의례에 어긋난다고 누가 트집 잡을까 봐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트집 잡을 것도 없잖아, 매제가 객석에 있다면 몰라도. 오히려 이편이 더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 남매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 원작에 나왔던 그대로라는 면에서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어쨌든 아버님조차 이 자리 배치에 별말 없는 사실을 감안하면 딱히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나와 남편이 합방을 했든 안 했든 다들 날 오메르타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건 변함없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저기 나오시네, 우리 매제.”
“우와아아아아아!”
함성이 울렸다.
순식간에 양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었다.
각양각색의 갑옷을 걸친 선수들이 질서정연하게 말을 몰아 관람석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온갖 응원과 야유가 빗발치며 쏟아져 내렸다.
그래, 이 부분도 기억난다. 신성한 감독단의 축복 기도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시간.
친지들로부터 축복을 받고 승리를 기원하는 손수건이 날아다니는 시간이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이미 최종 우승은 결정 난 듯하군.”
체시아레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드는 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우리가 앉은 발코니석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곧장 내 쪽으로 올 줄이야…….
“축복 감사합니다.”
넉살 좋게도 대꾸한 남편 놈이 내게 시선을 꽂았다.
햇볕에 물든 은빛 머리카락이 금발처럼 반짝거리고, 홍옥 같은 눈 역시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바람에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익숙한 새까만 갑옷조차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느낌.
“이스, 이거요.”
황급히 케이프 안자락을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오늘을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놓은 손수건.
이번엔 뭘 새겨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했는데 말이야.
손수건을 건네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수그리니 허벅지가 아려왔다.
꾹 참으며 방긋방긋 웃는 나를 기세등등하게 지켜보던 남편 녀석이 냉큼 손수건을 받아 갔다.
그러더니 한 번 들여다보고는 나를 향해 씩 웃는 것이었다.
“이런 건 어제 줬어야지.”
“하지만 다들 지금…….”
“그러니까 남들 다 줄 때 마지못해 주는 느낌이라고, 이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발끈해서 외치자 이스케는 얄밉게 쿡쿡 웃는 소리를 내더니 다음으로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팔을 뻗어와 내 발을 붙든 것이다.
정확히는 내 구두 굽을 손바닥으로 살짝 받쳐 잡고는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천하의 오메르타 소공작께서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아마 저 자식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순 얼어붙어 버린 나와는 달리 남편 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뻔뻔한 얼굴로 상쾌하게 내뱉었다.
“고마워, 마누라.”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어제 내가 너무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후다닥 가버린 바람에 기분이 상한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마냥 쾌활해 보여서 다행이야.
“다치면 안 돼요.”
좀 더 그럴싸한 말을 하고 싶었으나 기껏 나온 소리라곤 저것뿐이었다.
그가 무사히 우승하리란 거 어차피 알고 있었지만.
이스케는 대답 대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씩 웃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러고는 관중들이 열렬히 환호하거나 말거나 눈길도 주지 않으며 곧장 국왕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참으로 변함없는 한결같은 모습에 그만 미소가 나왔다.
“자주 그래?”
“응……?”
“자주 방금처럼 하냐고.”
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옆을 빤히 쳐다보았다.
체시아레는 여전히 기분 좋게 미소 띤 표정을 하고서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다만 눈매가 그새 어둑하게 물든 모양새에 절로 섬뜩함이 일었다.
네놈은 뭐 이렇게 하나하나 불만이 많냐?
사방에서 색색의 손수건이 날아다니고 열띤 응원과 조롱이 한바탕 오간 끝에 선수들이 다시 퇴장했다.
이윽고 체시아레를 비롯한 감독단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정 서약과 축복 기도가 시작되자마자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럽던 일대가 순식간에 엄숙함의 영토가 되었다.
나는 아주 옅은 푸른빛을 띤 투명한 막이 마치 유리 돔처럼 경기장을 감싸는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행여나 마수가 객석 쪽으로 달려드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토록 큰 신성 쉴드를 유지할 수 있다니, 괜히 추기경들이 필요한 게 아니긴 하구나.
대체 이 세계의 신성의 기준이 뭔지 궁금하군.
차라리 마법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성직자들의 인성이나 방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아멘.”
“아멘.”
뭐가 됐든 이 망할 축제가 속히 끝나길.
그렇게 몰래 빌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 성호를 그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