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36)

* * *

거대한 돔형 경기장을 메운 인파는 지난번보다 더 어마어마해 보였다.

이맘때면 에렌딜은 늘 외국인 손님들로 북적였으나 올해는 특히 더했다.

브리타냐의 총아 이스케 반 오메르타가 이번 경기에서 또다시 우승할 수 있을지 다들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혹은 그와 보르히아 남매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동안 어떤 흥미로운 사고라도 터지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서 바다를 건너 달려왔거나.

소문. 말. 어림짐작.

그런 것이 너무 많다. 엘레니아는 그러한 상념을 오늘따라 유독 푸른 하늘로 날려 보내며 가볍게 부채질을 시작했다.

기후는 서늘했으나 밀집된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인지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트집 잡는 것처럼 들리긴 싫지만, 좀 그렇지 않아?”

옆자리에 앉아 마찬가지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하던 프레이야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엘레니아는 일부러 느릿하게 반문했다.

“뭐가?”

“아니, 자리 배치가 아무래도 좀…….”

뭘 두고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엘레니아는 시선을 힐끔 돌려 저만치 추기경단의 검은 수단으로 파도치는 관람석 쪽을 바라보았다.

로마냐에서 발걸음 하신 신성한 위원회를 위해 마련된 발코니 모양의 관람석.

가장 앞쪽 상석에는 단연 발렌티노 추기경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누이가 앉아 있었다.

프레이야의 지적이 옳기는 했다.

의례적으로 루드베키아는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엘레니아와 함께 앉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엄연히 오메르타의 공자비니까.

그러나 누구도 그 점을 굳이 지적하고 들지 않는 이유야 차고 넘쳤다.

당연히 그러리라 여기기도 했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엘레니아는 문득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 자신 역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 배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탓이었다.

“엘렌?”

“……응.”

“괜찮아? 표정이 갑자기 안 좋은걸.”

“…….”

“미안해, 공작님께서도 납득하셨을 일을 내가 괜히 꺼냈나 봐.”

납득이라. 엘레니아는 이번에는 국왕과 오메르타 공작 등이 앉아 있는 쪽으로 힐긋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요즘 들어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골똘한 모습이었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납득하고 말고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근래 들어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녀 자신도 포함되었다.

“아무튼 의외로 괜찮은 분 같더라, 발렌티노 추기경님. 어제 연회에서 보니까 이스한테도 엄청 깍듯이 대하시던데.”

쾌활하게 화제를 돌리는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레니아는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어제의 궁중 연회를 떠올렸다.

확실히 소문과는 달리, 체시아레는 부친의 권세를 등에 업고 북부를 뭐 보듯 하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하면서도 우아했다.

한데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다 한숨 돌릴 겸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찾았을 때 남매는 사라져 있었다.

엘레니아가 그걸 이스케에게 말했을 때 들은 답이 걸작이었다. 둘이 축제 거리 구경하러 갔다나.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허용해 줄 거면 애초에 그녀더러 보르히아 남매를 지켜봐 달란 부탁을 왜 한 것인가?

문제의 남매는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 슬쩍 나타났다.

체시아레는 시종일관 쾌활하고 만족스러워 보였고, 루드베키아는 좀 피곤한 듯했으나 괜찮아 보였다.

많이 피곤했는지 금방 양해를 구하고 먼저 공작저로 돌아가긴 했지만.

조금 묘하긴 했다. 엘레니아가 아는 루드베키아라면 다음 날 이스케가 중대한 시합을 앞둔 와중에 그리 빨리 가버리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며칠간 둘만 있을 틈도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피곤할 만도 하지. 거리 구경은 둘째 치고 친정 인사들뿐만 아니라 옛 정혼자들까지 온 마당에 이래저래 신경 쓰느라 내색은 안 해도 상당히 지쳤을 것이었다.

그 점은 엘레니아도 감안하고 있었다. 이스케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꾸만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걸까.

옆에 딱 붙어서 살펴보고도 싶었으나 얼마 전 있었던 소동 탓에 사이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루드베키아와 프레이야와의 그 소동 말이다.

“그나저나 넌 손수건 누구한테 줄 거야?”

엘레니아는 잠시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형 놀이 하던 시절부터 알아온 얼굴이거늘 왜 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녀의 시선이 묘하다 느꼈는지, 보라색 눈을 예쁘게 반짝이던 프레이야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엘렌? 왜 그래?”

“……아니야. 난 어차피 안 만들었거든. 오빠한텐 루비가 줄 거니까.”

“그래……?”

“너는?”

“나도 실은 안 만들었어. 줄 사람이 없잖아? 옛날이었다면 이스한테나 줬겠지만.”

하고 시원스레 빙긋 웃어 보이는 프레이야였다.

‘그렇구나’ 하는 속삭임을 흘려보내며 엘레니아는 축제가 끝나는 대로 프레이야와 루드베키아의 일을 제대로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엘레니아가 친지들과 함께 앉아 있는 객석으로부터 동쪽으로 좀 떨어진 지점에는 자랑스러운 롱기누스 성기사단의 소수 정예가 옹기종기 모여 서로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악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주변 놈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 안 들리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목청 하나는 왕국 제일인 도시 경비대 놈들이 에워싸고 있는 자리다.

그것보다 매일 지겹게 보는 낯짝들끼리 이런 날에조차 함께 꼭 붙어 있다니, 저놈들은 어지간히 서로를 사랑하나 보다며 남들이 오해할 법한 풍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또 뭐를, 새끼야?”

“우리 중 이스케 그놈만 참가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이러니까 우리가 어차피 그 자식한테 밀릴 거 뻔해서 일부러 몸 사린 것 같단 말이다!”

평소 소수 정예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품고 있는 탓인지 혹은 단지 경기장을 채운 열기에 따라 흥분해 버린 건지, 퍽 자괴감 어려 보이는 낯짝으로 툴툴거리는 카뮤였다.

아이반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관람석 팔걸이를 장갑으로 벅벅 닦아내고 있던 갈라르가 음울한 투로 나섰다.

“전부 네 탓이다, 카뮤. 내가 제안했을 때 너도 따라 잽싸게 선수를 쳤어야 했다.”

“잽싸게 치긴 뭘 쳐, 곰탱이 자식아! 너야말로 호기롭게 같이 참석하느니 떠들어놓곤 여기 앉아서 뭐 하냐?”

“그러려 했는데 이스케 그 자식이 다른 일을 맡겼잖냐.”

“그러니까 대체 언제부터 그 새끼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했냐고? 그리고 일이라 해봤자 아무 쓰잘데기없는 보모 노릇이잖아! 아,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 새끼 그거 일부러 이 그림을 노린 게 틀림없어. 우릴 전부 오합지졸로 만들고 지 혼자 잘난 척하고 싶어서 꾸민 거 아니야? 야, 아이반.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냐?”

“어.”

아이반이 툭 던진 명쾌하고 간단한 대답에 잠시 침묵 아닌 침묵이 흘렀다.

동료들이 황당한 낯짝으로 노려보거나 말거나, 아이반은 기품 어린 몸짓으로 잎담배를 꺼내 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것보다 어제 어떻게 된 건지나 자세히 말해봐라. 어디까지 쫓아갔다고?”

“……왜 갑자기 네가 리더인 척하고 앉았냐?”

카뮤의 어처구니를 상실한 으르렁거림에도 아이반은 대관절 뭐에 들렸는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언제나처럼 조용히 싱글거리며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만지작대던 루브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신전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봤어. 추기경이 바로 눈치 깐 거 같던데, 우리가 뒤밟는 거.”

“미행을 예측 못 할 처지는 못 되지.”

“아무튼 별거 없었어. 시간 낭비 인력 낭비가 따로 없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사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잖냐.”

“너희가 뭘 걱정하고서 이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추기경이 공자비를 빼돌려서 로마냐로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그래? 아무리 그치들이라 해도 말이 안 된다고.”

그건 그랬다. 솔직히 아이반 또한 이스케가 정확히 뭘 걱정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제 마누라 보모 노릇 해달라고 부탁하려면 적어도 이유는 설명해 줘야 염치가 있지 않은가.

그놈한테 염치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나도 몰라, 새꺄.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다른 별일은 없었냐? 갈라르?”

“좀 수상한 놈이긴 했다.”

“발렌티노 추기경이 말이냐?”

“아니, 같이 다니던 수도승 행세하는 놈. 그렇게 기세가 야수 같은 놈은 처음이었다.”

다들 일제히 하던 짓을 멈추고 갈라르의 야수의 그것 그 자체인 무시무시한 면상을 빤히 응시했다.

갈라르는 머리를 갸웃했다.

“내 말이 안 믿기나?”

“……믿어, 믿는다.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냐?”

“면상은 못 봤어도 감으로는 알아볼 것 같다. 어쨌든 공자비는 꽤 즐거워 보이시던데, 우리가 하는 짓 알고서 불쾌해하시지 않을까.”

“부부싸움은 그 새끼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지, 뭐. 아, 젠장. 더워 죽겠네.”

잔뜩 흥분한 군중들 틈에 있어서인지 이마에 땀이 배는 느낌이었다.

아이반이 습관적으로 손수건을 꺼내는 찰나 여태 한마디도 없이 지그시 그를 노려보고만 있던 카뮤가 불쑥 으르렁거렸다.

“너 그 손수건은 뭐냐?”

“……뭐?”

“척 봐도 여자한테서 받은 건데? 참가도 안 하는 새끼가 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걸 받았냐?”

아이반은 조용히 시선을 돌려 저만치 향기로운 무리가 앉아 있는 객석 쪽을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나른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는 한 영애 쪽을.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흩날리는 풍경이 이 거리에서도 생생했다.

“그냥, 레아가 준 거다. 쪼끄만 게 제법 솜씨가…….”

“지랄 마, 이 새끼야! 공녀한테서 받은 거잖아!”

“아, 아니, 이 말 엉덩이 대가리가 뭔 큰일 날 개소리야?!”

“그럼 왜 방금 공녀 쪽 보면서 실실댔는데?!”

“내가 언제?!”

“와, 이 새끼 이거 이제 보니까 공녀한테 흑심 있어서 이스케한테 알랑거린 거구먼?!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하다 했다! 이 배신자 새끼!”

“그런 거 아니라고 미친놈들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