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36)

* * *

웬만한 이들은 전부 궁중 연회에 가 있는 탓인지 신전은 평소보다 더 고요하고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아까 수사들이 마련해 준 방으로 가서 맡겨둔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장신구들을 챙겨 나오는 찰나였다.

“예하께선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듯, 스카풀라 후드를 깊게 눌러쓴 거대한 남자가 쉰 것 같은 거칠고 거슬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우리 남매의 축제 거리 안내원을 맡았던 그 사람이었다.

입을 연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단번에 들어도 진한 남부 토박이 억양이었다.

에렌딜 신전에 깃들어 있는 교황청발 스파이 중 하나라고 보긴 어려웠다.

전혀 수도사 같지도 않을뿐더러 북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심장이 초조하게 뛰기 시작했으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투박한 대리석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늘 칙칙하다 느껴왔으나 오늘따라 암흑의 미궁이 따로 없었다.

긴 통로에 늘어진 성상들이 연옥에서 올라온 유령들처럼 음산하고 위압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것만은 아까 변장했을 때도 내내 차고 있었다.

말없이 무수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마침내 어느 문이 활짝 열린 커다란 방 입구에 들어섰을 때, 저 멀리서부터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신전 일부 구역의 정문 중 하나가 닫히는 소리.

내가 화들짝 놀라 돌아봄과 동시에 등 뒤의 문 또한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여긴…….”

“어서 와.”

체시아레는 바지 위에 셔츠만 대충 걸친 모양새로 벽난로 곁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 내왔는지 술잔을 홀짝거리면서 한쪽 다리를 탁자 위에 편하게 올려놓은 모습이 유유자적이 따로 없었다.

“여긴 대주교실 아니야?”

“별걸 다 신경 쓰는구나. 그 안달 난 노인네라면 내가 여기 머물렀다는 사실에 되레 황송해할걸.”

비웃는 투로 대꾸한 놈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그냥 옷을 갈아입지 말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갑자기 저놈이 내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서 난로 속에 처박아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일어서였다.

“안 그러나?”

눈은 나를 노려보면서, 말은 내 뒤의 인간에게 하는 소리였다.

문을 닫고서 동상처럼 서 있던 가짜 수도사가 내 곁을 성큼 지나쳐 체시아레의 옆으로 가 섰다. 그러고는 눌러쓴 후드를 내렸다.

“뭐, 발바닥이라도 핥으려 들 양반이니까요.”

끔찍한 흉터가 눈꺼풀 위로 가로지른 눈이 검게 번득였다.

단 내가 놀란 건 가짜 수도사 씨의 험악한 외모 탓이 아니었다. 그의 거칠고 뻣뻣한 붉은 머리카락 탓이었다.

난 이자를 오늘 처음 보았다. 정확히는 이렇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원작 내용을 아는 덕에, 체시아레가 몹시 충성스러우며 잔인한 심복 하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심복이 매우 험악한 인상에 북슬북슬한 적발이라는 사실도.

거기다 저 목소리…… 아까는 일부러 쉬게 낸 모양인지 미처 몰라봤는데, 분명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맞아, 분명 지난번…….

‘멋지시군요, 부인.’

그때 내 발을 아작 냈던 게 설마 네놈이었냐?

이름이 피에트로였던가? 저자의 말로가 어떻게 됐더라?

“이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그간 고생 많았다.”

“그걸 말이라 하십니까. 이 제가 향수병에 걸려 엉엉 울 뻔했습니다요. 오매불망 예하만 기다렸죠.”

“토닥여 주기라도 하랴?”

“사양은 않겠습니다.”

지들끼리 만담을 주고받으며 시선은 여전히 날 노려보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날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는 속내야 뻔했다.

내가 저 가짜 수도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건 모르겠지만.

이런, 친정으로부터의 감시야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으나 피에트로가 혼자 여기 와 있었다는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체시아레는 어떤 일이 있어도 피에트로를 멀리 떼어놓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북부에 보냈던 거라고? 날 감시하기 위해? 대체 언제부터?

체시아레 놈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피하는 척하면서 피에트로 쪽을 흘긋 살폈다.

그저 태연하게 주인과 만담을 주고받고 있는 듯했으나 어째서인지 저 괴물 같은 사내 또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곰처럼 울퉁불퉁한 거대한 어깨가 뻣뻣했다.

“사양치 않기에는 양심이 찔리지 않나, 너. 제대로 한 게 없잖아.”

“그 부분에 대한 처벌은 따로 달게 받겠습니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루비 네가 말해봐.”

나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는 그러는 시늉을 했다.

“뭐를 말이야?”

무표정하던 체시아레의 만면에 서늘한 미소가 퍼져갔다.

그러면서 농을 부리듯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죽대는 것이었다.

“어쩌면 좋겠느냐고. 너 때문에 이 녀석이 혼나게 생겼잖아?”

“오빠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여태 저 사람 시켜서 나 감시한 거야?”

“네가 자꾸 걱정을 끼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내 얌전한 누이가 가출은 대체 왜 했던 거지?”

나의 가출 소동을 전해 듣고 보낸 건가, 그럼.

그렇다면 나와 마수들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모르는 걸까.

평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호흡이 자꾸만 떨려왔다. 이런 젠장할.

침착해, 신중해야 해…….

어설프게 떠봤다간 다 망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벌어진 입을 살그머니 앙다물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적은 처음이라서. 난 나쁜 짓 하나도 못 하는 거 오빠도 알잖아. 오빠야말로 나한테 왜 그런 거야?”

이거야말로 짐작 밖이라는 듯, 비릿하게 웃고 있던 놈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라라.

“뭐를 말이야?”

“다 나를 살인자 취급했단 말이야. 내가 신전에서 대주교의 질녀를 독살하려고 했다며 멋대로 떠들어댔다고. 이제 보니까 아버지가 저 사람 시켜서 한 일 아니야? 적어도 오빠가 언질이라도 해줬다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내가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는 동안 체시아레는 묵묵히 날 주시하다 말고 심복과 시선을 교환하나 싶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후작가 계집 말인가. 그딴 걸 없애봤자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야 나는……. 몰라, 모르지. 아버지도 오빠도 항상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의아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피에트로, 알아낸 거 뱉어봐.”

역시 가짜 수도사 씨의 정체는 피에트로가 맞았다.

그것보다 망할 오빠 놈이 정말로 그 독살 기도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는 듯해 보여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별안간 얼마 전에 프레이야와 가졌던 기괴한 조우가 퍼뜩 뇌리 한구석을 스쳐 갔다.

그때 프레이야는 대담하게도 내게 자신의 야망을 흘렸다.

그녀는 북부의 모후가 되고 싶어 한다.

만일 프레이야뿐만 아니라 프레이야의 숙부인 대주교 또한 순전히 시스티나의 성벽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면…….

“열심히 꼬리를 흔들면서도 딴 밥그릇을 두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탐욕스러운 늙은 개죠.”

“그렇단 말이지. 애초에 마곡석으로 암살하려 했다면 신전이야말로 최악의 장소이긴 하다. 이래저래 속이 빤히 보이는 족속이군.”

새로이 깨닫게 된 정보에 취해 있을 틈도 없었다.

느긋하게 술잔을 채운 체시아레가 눈알을 혼란스럽게 굴리고 있는 나를 향해 다시 툭 내뱉었다.

“그래, 무서웠을 만도 하지. 가엽게도. 그렇다 한들 그런 충동적인 행동이라니, 너답지 않아.”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생각이 짧았던 거 알아. 계속 반성하고 있…….”

“남편한테 안길 때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대뜸 본론으로 훅 치고 들어가는 꼬라지가 참으로 친숙하군.

나도 모르게 시선이 벽난로 위에 달린 십자가 장식 쪽으로 돌아갔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내 십자가는 큰오빠 놈이 틀림없어.

“아버지 화 많이 나셨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싶지만, 아버지는 이 자리에 안 계시니 어떻게 된 건지 솔직하게 말해봐. 오늘 네 남편 하는 모양 보니까 억지로 널 밀어붙인 것 같진 않던데.”

희미한 조소마저 싹 사라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눈은 푸른 불꽃처럼 활활 작열하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구릿빛 팔뚝에 핏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심장을 좀먹는 듯한 공포와 동시에 어째서인지 원인 모를 기묘한 의아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걸 예상치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가 오직 내가 자기 계획을 망쳐서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뭐가 됐든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본심을 들켜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나는 완전히 풀이 죽은 꼴로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대로라면 죽을 것 같아서 그랬어…….”

“…….”

“오빠는 내 남편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못 봤잖아. 지금은 갑자기 상냥하게 대해주고 있지만, 여태 겪었던 사람들이랑은 완전히 달라. 안 그래도 날 엄청 싫어했는데, 그 죽을 뻔한 영애도 하필 오랜 친구라서…….”

“널 찾느라 며칠 내내 에렌딜을 이 잡듯 뒤졌다고 들었는데.”

“그게 내가 걱정돼서였다고 생각해? 난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 내가 이대로 여기서 사악한 보르히아 계집 취급받으면서 죽게 되어버리면…….”

“그놈이 널 때렸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면서 젖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체시아레는 도무지 속내를 읽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서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리고 오히려 그게 네가 바라던 바 아니냐? 나와 나의 정혼자가 서로를 질색하게 되는 거 말이지.

“루비.”

“……열심히 웃으면서 비위 맞추니까 갑자기 거칠게 굴지 않았어. 그러니까 알 것 같더라, 내가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상관없었단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초조하고도 으스스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쯤 궁에 있을 이스케에게 왠지 모를 죄스런 감정이 일었다.

내가 방금 내뱉은 대사가 대부분 사실에 기반했음에도 말이다.

로마냐로 돌아갈 마음은 당연히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래, 너도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지.”

마침내 입을 연 체시아레의 음성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딱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그다운 태도였으나 마찬가지로 느슨해진 그의 만면에 서린 미소가 지나칠 정도로 매끄러워서 나는 도리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리될까 봐 나도 그리 반대했던 건데,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펄펄 뛰셔도 본인의 자업자득이라 볼 수밖에. 애초에 너 혼자 감당하기는 버거운 장소였어.”

“오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말이야, 루비. 원하는 걸 얻고자 육욕을 이용하는 건 심히 불경한 짓이라고. 시스티나의 천사인 네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기지가 않는걸.”

아니나 다를까.

하여간 여러모로 신박한 새끼라고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무슨 그럴싸한 구실을 대도 그냥 곱게 넘어가지 않으리란 예상은 했었으나 그걸 그렇게 갖다 붙이다니.

추기경은 추기경이란 거냐?

그가 술잔을 피에트로에게 건네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또아리를 풀고 다가오는 독사의 모양 그 자체다.

대번에 올라가 눈높이에 부질없이 어쩔 도리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응? 명색이 교황 성하의 여식이거늘.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나는 단지…….”

“물론 네 탓만 할 순 없겠지. 아무리 봐도 이 금수 새끼 소굴 같은 땅이 널 못쓰게 물들어 버린 것 같으니.”

어느 나라 사람이 봐도 금수 새끼 소굴은 브리타냐가 아니라 로마냐일 터인데요.

어이가 없었으나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내 사랑스러운 누이, 잠깐 못 본 새 그런 몹쓸 버릇을 들이면 어떡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다정하기 그지없다.

나는 내 몸에서부터 물러나 있기 위한 수단으로 딴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양탄자는 타는 쓰레기로 분류하나?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괜찮아, 적어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고쳐질 가능성은 있다는 거잖아?”

그가 내 볼을 만지던 손길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피에트로를 향해 가볍게 턱짓을 했다. 나가서 문 앞을 지키고 있으란 뜻이었다.

피에트로는 그 육중한 체구가 무색하게도 감탄스러울 만큼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남편이 알아챌 거야.”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목소리가 퍽 애원하는 투로 흘러나왔다.

피식하는 조소가 놈의 입가에 어렸다.

내게로 수그린 짙푸른 눈동자에 무언가 잔뜩 일그러진, 분출하지 못해 안달이 난 기묘한 불꽃 같은 것이 희미하게 내비치다 사라졌다.

잠깐이었으나 분노 같은 것과는 성질이 달라 보이는 기괴한 감정의 조각.

어처구니없는 얘기지만 문득 언젠가 이스케의 눈에서 저것과 똑같은 표정을 봤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밤에 나한테 오면 나는…….”

“당분간 둘이 얼굴 마주 볼 틈도 별로 없을 텐데? 그다음이야 네가 알아서 처신해야지.”

오늘부터 경기가 끝나기까지 모든 참가자와 감독 위원회는 앙그반 궁의 지정 숙소에 머문다.

그건 나도 알았다. 그 이후로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 억지로 밀어붙이진 않을 것 같다.

당분간 시중은 알아서 하겠다 하고…….

그런데도 왜 쓸데없는 말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 사이코 여우 오빠 놈에게 홀라당 넘어간 남편이 행여나 내 몸에 생긴 새로운 상처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그게 그리 상상하기 무섭나?

팔목을 움켜잡은 억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다음 순간 몸이 홱 돌아갔다.

정확히는 반쯤 날아갔다.

비틀대며 중심을 잡는 동안 팔이 탁자 위를 허우적대면서 술병을 비롯한 잡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또한 결국엔 바닥에 같이 쓰러져 버렸다.

아아, 온몸이 벌써 얼얼해.

“다리를 보이게 대.”

한숨이 나오는군. 어차피 이럴 줄 알았으니 뭐 괜찮아. 잠깐만 참으면 끝나.

딴생각에 집중하자, 딴생각에.

저 혁대는 안 타는 쓰레기? 타는 쓰레기? 이 세계는 재활용 같은 개념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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