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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간 기세를 몰아 슬쩍 가까운 발코니로 향했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서 심신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다.
춤을 추는 동안 너무 긴장을 곤두세운 탓인지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젠장, 그냥 눈 딱 감고 그놈 발 한번 밟아줄걸.
“아…….”
“어…….”
또 마주쳐 버렸네.
한적한 발코니에서 둘이 사이좋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알폰소와, 그와 비슷한 밤색 머릿결의 한 추기경이었다.
짐짓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두 남자가 실로 살가운 미소를 보냈다.
“멋진 춤이었습니다, 부인.”
“레이디 루드베키아.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그러니까…….”
“로크루아 추기경입니다.”
싱긋 웃으며 스스로를 소개하는 로크루아 추기경은 꽤 젊어 보였다.
고작 스물여섯인 체시아레만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잘해야 서른 후반 정도쯤 보였다.
게다가 알폰소와 퍽 닮은 듯도 했다. 방계인 걸까?
“바람 쐬러 나오신 겁니까?”
“제가 그만 대화를 방해한 것 같네요.”
“아닙니다, 숙부님과 안부 인사나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서요.”
역시 친척이었구나.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알폰소가 로마냐의 추기경과 정겹게 붙어 있을 리가 없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때리고 지나갔다.
알폰소는 원작에서 성도 침공 연합군의 일원이었고, 당시 교황청 내부에선 배신자 몇몇이 성배를 빼돌려 연합군에 넘겨주었다.
우리 가문이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 것에는 성배가 빼돌려진 탓이 결정적이었다.
로크루아 추기경 역시 그중 하나였을까.
내통자가 정확히 누구누구였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얄궂게도 구체적인 신원은 서술되진 않았던 것 같다.
혹은 단순히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이려나.
“어머, 숙부이셨어요?”
“예, 애석하게도 그만 이런 사내구실 못 하는 부실한 조카 놈을 두게 되었습니다.”
순간 비꼬는 건가 싶어 조금 놀랐으나, 시원스레 미소 짓는 로크루아 추기경도 탄식을 내뱉는 알폰소도 마냥 허심탄회하고 쾌활해 보였다.
“환장하겠군요, 그거 대체 언제까지 들먹일 작정이십니까?”
“왜, 창피스럽느냐? 창피한 줄은 알아서 다행이구나. 이런 천사 같은 분을 그대로 놓쳐 버리다니, 하여간 비셸리에 가문의 수치로다.”
“할 말 없군요.”
일을 그렇게 강제한 건 바로 내 아버지와 오빠였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히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태도가 새삼 고마웠다.
“그럼 레이디 루드베키아, 이번 대회에서 부군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숙부님의 기도는 죄 영험치 못하거든요. 여태 파문당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아니 이놈이…….”
티격태격하며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둘을 미소로 배웅한 뒤, 나는 아름답게 꾸며진 화단 곁에 놓인 작은 벤치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문득 이곳에 갓 왔을 때 참석했던 궁중연회가 떠올랐다.
그때와 비하면 참으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구나.
체시아레 놈만 없다면 퍽 마음 놓고 즐겼을 텐데.
어쨌든 제대로 처신해야 했다.
최대한 체시아레의 비위를 맞춰가며 놈의 꿍꿍이가 뭔지 알아내야 한다.
워낙 예측 불가한 미친놈이라 약간만 실수해도 여태 꿋꿋이 쌓아온 공든 탑이 단숨에 무너질 수 있었다.
내 팔자야. 살아남기 힘들구먼.
“……공자비님!”
“아리엔 공주님?”
총총 걸어들어온 작은 소녀가 곧장 몸을 일으키는 내 손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양 갈래로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부인 오늘 정말 요정님 같아요.”
“고마워요. 공주님도 무척 아름다우세요. 새 드레스인가요?”
“네, 아바마마가 새로 선물해 주셨어요. 저랑 똑같이 왕관 쓰셨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리엔의 머리를 장식한 작은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앙증맞기도 해라.
“부인도 공주님이라서 왕관 쓰신 거예요?”
“아하하, 그럴 리가요. 이건 그냥 장신구랍니다.”
“그렇지만 레아가 부인은 공주님 맞다고 했는데…….”
“자, 공주, 부인을 곤란하게 해드리면 안 되지요.”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아리엔의 뒤로 나붓이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에 나는 화들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비전하.”
“제게 예를 갖추실 것 없답니다. 공주가 어찌나 부인 얘기를 많이 하던지, 좀 더 빨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어 송구스럽군요.”
그러고 보니 북부에 와서 꼭 두 번째로 보는 왕비였다.
첫인상은 마냥 이국적이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한 마리의 우아한 고양이 같은 여인이었다.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자줏빛 실크 드레스를 걸친 모습이 일국의 왕비라기보다는 설화 속 님프 같다.
아리엔이 자라면 저렇게 되려나? 페아놀 왕이 어쩌다 그런 로맨티시스트가 되었는지 알 것 같군.
“공주와 자주 어울려 주셔서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뇨, 오히려 공주께서 저와 놀아주시는 편이지요.”
조금 머쓱하게 대답하자 모녀가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얼굴이 매우 비슷하네.
거참, 꼭 빼닮은 사이좋은 모녀라니. 보기 좋으면서도 뭔가 부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다.
“잘 적응해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실은 몇 번이나 초대장을 보내려 했다가 괜히 누만 끼칠까 싶어 망설여 왔답니다.”
브리타냐 귀족 사회에서의 왕비의 입지를 고려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나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또 다른 처지라고 할까.
“누가 될 만한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전하께서 초대해 주신다면 저야 영광인걸요.”
“부인께선 과연 사랑스러운 만큼 다정하신 분이군요.”
요염한 레몬색 눈동자가 야릇한 빛을 발하며 살짝 휘었다.
묘하게 홀리는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는 찰나였다.
“왜 이렇게 늦어지나 했더니.”
잠깐이나마 느슨해졌던 전신의 감각이 다시 날카롭게 곤두섰다. 아아, 망할 자식.
“발렌티노 추기경님.”
“……왕비 전하.”
나붓하게 인사하는 왕비를 한 번 힐긋 돌아본 체시아레가 짧고도 냉랭하게 대꾸했다.
화들짝 제 어미 뒤로 숨는 아리엔 쪽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태까지와의 태도와 판이한 무례의 극치였으나 정작 왕비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부인, 또 뵙기를. 가지요, 공주.”
아리엔이 아쉽게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체시아레 앞에서 더 알짱거려봤자 좋을 거 없을 터였다.
어린애 앞이라고 자제하는 부류는 못 되는 놈이니까.
나는 부러 명랑하게 활짝 웃었다.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새 못 기다리고 나 찾으러 온 거야?”
“좋단다. 나뿐이겠냐, 네 남편이 안달이 났던데. 내가 가보겠다고 하니까 마지못해 양보하더군. 귀여운 놈이라니까.”
대체 그 괴수의 어디가 귀여운지 모르겠다만 그 귀여운 놈이 바로 우리 가문을 몰살할 장본인이시란다.
슬슬 재수가 없어지려고 하는군.
난 피 말라 죽겠거늘 너희 둘은 그리 내숭 떨어가며 알콩달콩하겠다 이거냐?
체시아레는 짐짓 장난스럽게 내 이마를 톡 건드리더니 불쑥 나를 지나쳐 발코니 난간 가까이 다가섰다.
갑자기 풍경 구경할 마음이라도 든 건가?
“여긴 딱히 볼 게 없군. 앙그반 궁의 달의 탑이 그리 유명하다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그냥 촌스러운 시계탑일 뿐이고.”
그럼 그렇지. 하여간 오만한 새끼.
“남부랑은 많이 다르긴 하지. 별로 재미가 없는 거야? 난 오빠가 꽤 즐거워하고 있는 줄 알았어.”
“당연히 즐겁지, 널 봐서 무척 즐거워. 다만 이곳 연회는 시시하기 짝이 없구나. 차라리 시내 구경을 가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로마냐에서 종종 그렇게 하곤 했다.
부활절 혹은 성탄절 축제가 다가올 때면 체시아레는 꼭 나를 데리고 축제 거리를 돌아다녔다.
산타 마리아 광장에서 벌어지는 야외극과 행렬, 시합, 성대한 불꽃놀이와 거리 곳곳 타오르는 거대한 모닥불…….
신나는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종종 그가 내게서 바라는 것이 진정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있었다.
아주 많은 면에서 내 전생의 큰오빠와 비슷한 그가.
“이곳 신전도 좀 둘러보고 싶고. 어때?”
“나도 에렌딜 시내를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오빠를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걸.”
“설마 내가 너더러 안내를 맡으라고 할까.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네, 남편 때문에 그래?”
나긋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돌아보는 그의 눈길은 독사의 그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깜박거렸으나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응, 의외로 잔소리가 좀 많거든.”
“잔소리야, 질투야?”
“아마 둘 다? 그래도 오빠가 말하면 어쩔 수 없어 하지 않을까?”
“아직 네 남편을 잘 모르는구나.”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와 내 등에 손을 얹었다.
살짝 쓰다듬었다 살짝 밀치는 손길의 감촉에 끈적한 오한이 일었다.
“가서 얘기하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