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36)

* * *

“에렌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아하게 예를 올린 엘레니아가 기품 있게 체시아레를 마주 보다 말고 내 쪽을 한번 힐긋 바라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안 닮았는지 느낀 걸까?

“공녀의 미모는 과연 듣던 대로이군. 루비, 너 질투 나겠는걸.”

“그러는 오빠는 내 남편한테 질투하고 있으면서.”

“이런, 들켜버렸네.”

체시아레가 짐짓 머쓱하다는 듯 혀를 차 보이자 사방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우리의 얼음 남매조차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이 얼마나 훈훈한 풍경인가?

양쪽에 각각 오빠 놈과 남편 놈의 팔짱을 끼고서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자니 점점 더 불길함이 커져갔다.

시종일관 상이라도 받을 만한 나긋나긋한 태도를 유지 중인 체시아레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크게 놀랍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먹은 대로 스스로를 연출할 수 있는 놈이니까.

내가 거슬리는 점은 나에게조차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굴 때면 늘 내 허를 찌르는 난장판으로 이어졌다.

이거 예상보다 더 힘들어지겠는데…….

“오늘도 눈부시게 사랑스러우십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아,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아까 환영단 대열에 끼어 있던 대주교의 재등장에 나는 등을 꼿꼿이 폈다.

대주교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인간 때문에.

“예하, 이쪽은 제 질녀 퓨리아나 후작 여식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렌티노 추기경님.”

절친과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자태로 예를 올리는 프레이야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엘레니아와 비슷하게 가닥가닥 땋아 올린 머리카락은 자수정과 스피넬로 찬연했고 짙은 자줏빛 드레스는 보라색 눈을 더더욱 환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살짝 체시아레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뜻 모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나아가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이것 참, 에렌딜은 원래 이리 미인들 천지인가? 아우 놈을 떼어놓고 오길 잘했군.”

“만약 엔죠 오빠가 여기 와서 남부에서처럼 굴었다면 오늘 저녁에 도로 배를 타야 했을걸.”

“그건 그래, 그래도 그놈이 빠져서 서운하지 않아?”

“별로, 와봤자 소동만 일으킬 텐데 뭐.”

부러 새침하게 덧붙이자 체시아레는 낮게 웃는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묘한 미소를 띤 채 우리를 번갈아 보던 프레이야가 나를 향해 말을 붙인 것은 그때였다.

“찬사는 이쪽에서 올려야 할 듯한데요. 부인, 예하께서 이리 멋진 분이라고 말 안 해주셨잖아요.”

“내 누이와 꽤 가까운 모양인데.”

“누구든 친해지고 싶어 할 만큼 사랑스러운 분이니 당연하지요.”

“그런가? 사실이야, 루비?”

이참에 너희 둘이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으로 가면 안 되겠니?

똑같이 가증 그 자체인 모양새가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데.

짐짓 장난스러운 체시아레 놈의 물음에 나는 냉큼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응, 난 영애 좋아. 그래서 말인데 일전에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싶어요, 영애.”

호호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다른 추기경들과 대화를 나누던 참인 대주교가 흠칫 이쪽을 돌아보았다.

체시아레 역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알면 다쳐, 여자들끼리 일이거든. 아무튼 마음 풀어주실 거죠, 영애?”

하고 슬그머니 눈치 보는 시늉을 하는 나를 향해 프레이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요것 봐라’ 하는 눈빛이다.

“부인께서도 참, 저야 진작 잊었는걸요. 굳이 이 자리에서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프리.”

엘레니아의 냉랭한 음성은 모든 이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아차 싶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뭔가 잘못을 했든 안 했든.

멈칫 돌아보는 프레이야를 향해 엘레니아가 나무라듯 눈짓을 해 보였다.

프레이야의 시선이 내 옆으로, 이스케에게로 미끄러졌다.

오호라.

나는 부러 주춤거리며 이스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표정을 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예하께서 오해하실까 우려스럽군요. 제 부인이 워낙 심성이 고운지라, 아시다시피.”

야릇하게 미소 띤 얼굴. 장갑 낀 커다란 손이 내 등허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기묘한 눈길을 던지던 체시아레가 이내 알 만하다는 미소로 응대했다.

“그거 다행이군. 내 누이는 어디 가서 괴롭힐 당한 아이가 아니라는 거 내가 알지만, 연고도 없는 땅에 보내놓으니 역시 걱정스러웠단 말이지. 매제가 듬직해서 안심이야.”

이 두 놈이 내 머리 위에서 나란히 마주 웃는 순간이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여기서 나만큼 복 터져 보이는 사람이 또 있으려나.

“그나저나 루비, 이 오라버니의 북부에서의 첫 춤을 상대해 주지 않겠어?”

불쑥 말문을 돌린 체시아레가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약간 실었다.

어느덧 느릿하고 잔잔한 음악이 바뀌면서 발랄하고도 경쾌한 왈츠곡이 흐르고 있었다.

다정한 살얼음으로 뒤덮인 짙푸른 눈에 내 연푸른 눈이 비쳐 보였다.

“어떤가, 매제. 오늘 하루쯤은 첫 춤을 양보할 수 있겠지.”

“못 할 명분이 없긴 합니다만.”

예의 그 게슴츠레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남편 놈이 머뭇거리는 내 어깨를 살짝 밀었다.

“가봐.”

“아…….”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깐깐한 안하무인께서 왜 이렇게 정중하게 구는 거야.

짧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못내 아쉽다.

나는 하릴없이 방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네, 그럼. 근데 나 하도 오랜만이라 오빠 발등 밟을지도 몰라.”

“새삼스럽게, 처음 배울 때부터 내 발등 위에서 췄잖아.”

그건 내가 아니란다.

껍데기는 같을지언정, 그때의 어린 소녀는 나와 다른 영혼이라고.

체시아레 놈에게 꼭 붙들린 채 댄스 플로어로 다가가니, 이미 많은 남녀가 속속히 합류하며 짝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 역시 춤 대열에 끼어 사이좋게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나와 체시아레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곳곳의 시선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남매에 대한 호기심은 둘째 치고, 체시아레는 어디서든 엄청난 추종을 받는 놈이었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댄스 플로어의 화려한 불빛 아래 선 그는 아찔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남부의 왕자님처럼 보였다.

그래봤자 변태 사이코지만.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응?”

“네 남편. 널 독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데.”

나직하게 속삭인 놈이 뒤로 홱 물러나며 싱긋 다정하게 웃었다.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을 쳤다.

“무슨 말이야? 그게.”

“제법 예쁘게 입혀놨잖아.”

표범 같은 시선이 내 머리를 장식한 코로나로부터 드레스 아래 빼꼼 나온 구두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고는 다시 빠르게 홱 올라와 내 눈을 바투 응시했다.

“여자 옷 뒤적거릴 인물은 못 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풋풋하시군. 첫사랑의 힘인가?”

냉소와 농기가 어우러진 낮은 음성이 내 등골에 싸늘한 감각을 흘려보냈다.

내 몸에 두른 그의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공포스러웠으나 나는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게 웃었다.

조심해야 해, 내 속내를 조금이라도 들켰다간…….

“오빠만큼은 아니지.”

“내가 풋풋하단 뜻이냐?”

“가끔, 가령 지금 같을 때 말이야. 오빠랑 비할 만한 남자가 또 어디 있겠어?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셔? 엔죠 오빠는?”

“아버지는 새 애인이랑 노느라 정신없으시단다. 줄리아가 임신했거든.”

짝, 하는 박자에 맞춰 그가 내 허리를 잡고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머리 위의 아름드리 샹들리에가 빙그르르 돌았다.

“엔죠 녀석은 리미니 진군에 참전했다가 사고 치는 바람에 아버지한테 신나게 처맞았고.”

“아……. 엔죠 오빠답네.”

“요즘 어머니 집에 숨어 지내는 중이야. 그런 놈한테 교황군 총괄직이라니, 아버지는 언제 정신을 차리실지, 원.”

사파이어색 눈동자에 어둡고도 쓰라린 표정이 스쳐 갔다.

나는 코르티잔 출신이라는 체시아레와 엔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사가에서 조용히 지내며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어 아주 가끔밖에 만난 적 없지만, 체시아레의 생모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던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솔직히 그런 자리에는 누구보다도 오빠가 적격이긴 해. 하지만 난 오빠가 위험한 곳에 안 갔으면 좋겠는걸.”

칼로 벤 듯한 미소를 고정하고 있던 놈의 입매가 약간 풀어졌다.

“내 사랑스러운 누이. 어쨌든 요즘 아버지 심기가 오락가락해. 엔죠도 엔죠지만, 사고는 너도 쳤잖아.”

그래, 아주 거하게 쳐버렸지. 혼인 무효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내가 대꾸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찰나 곡이 끝으로 치달았다.

마지막으로 나를 홱 품속으로 끌어당긴 체시아레가 소름 끼치도록 유쾌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문제는 나중에 둘이서 차차 얘기하고, 일단은 이 돼지우리 구경부터 끝마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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