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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스의 사절단이 입장하십니다!”
“코뮌의 비스콘티 왕자 부부께서 입장하십니다!”
“파비아 공국의 사절단이 입장하십니다!”
프레스코화가 덮인 드높은 천장의 연회장은 반짝반짝 화려하게 빛나는 사람들과 이국적인 차림새의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며칠 앞서 에렌딜에 도착한 귀빈들과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사절단까지, 하나같이 여독도 모르는 얼굴로 즐겁게 웃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평소 브리타냐와 사이가 좋았느냐 나빴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마치 전생의 스포츠 경기를 연상시킨다.
외국 귀빈들이 참석하는 연회는 로마냐에서도 몇 번 겪어봤으나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이었다.
내가 검투 대회라는 국제적 행사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차라리 정신없는 편이 잡생각도 안 들고 좋았기에 나는 오메르타의 공자비로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고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개중에는 로마냐에서 몇 번 본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가령…….
“이곳에서 뵙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군요, 레이디 루드베키아.”
내 옛 파혼자라든가 파혼자라든가.
으윽, 짐작이야 했다만 막상 다시 마주치니 새삼 민망하기 그지없다.
원작에선 파혼자들 쪽에서 루드베키아를 피해 다니느라 정신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도 반갑네요, 오소렐 공.”
“추기경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웬일로 혼자 계시는 걸 보아하니.”
이 새끼가? 나는 도발적으로 미소 짓는 옛 혼약자를 향해 방긋 마주 웃었다.
“네, 덕분에 공께서 또 제 목덜미를 틀어쥐고 다그칠 일은 벌어지지 않겠군요.”
오소렐 공은 곧바로 뭐 씹은 표정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침착하게 받아쳤다.
“글쎄요, 이번에 부인의 목덜미를 틀어쥘 남자는 제가 아니게 될 듯하군요, 운 좋게도. 듣자 하니 부군과 퍽 사이가 좋으시다던데, 꽤 즐거운 축제가 될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운이 좋죠. 제 남편은 헛소문을 듣고 정혼자에게 화풀이하는 못난 사내가 아니거든요.”
헛소문을 듣고 의심스러워졌다면 체시아레한테 가서 따져보지.
그러나 그랬던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튼 방금 한 대꾸는 허세에 불과했다.
만일 체시아레가 작정하고 이스케를 도발하려 든다면…….
이런 젠장할. 정신 차리자, 정신! 똑바로 처신해야 돼.
체시아레한테 뭔 짓을 당하든 절대로…….
“내가 못난…….”
쌍소리라도 내뱉을 기세이던 오소렐 공이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잇새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래, 못나게 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 탓에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요, 부인의 오라비로부터.”
“미안하게 됐네요.”
“실은, 부인, 제가 오늘…….”
“그럼 실례할게요, 제가 목이 너무 타서.”
오소렐 공은 내게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씨이, 긴장 풀려고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하필 저 인간이랑 마주쳐서는.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 앤디미온 경.”
“이것 좀 맛보십시오. 톡 쏘는 느낌이 아주 시원합니다.”
휴, 착한 녀석. 마침 목도 마른 참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앤디미온이 건네주는 노란 음료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맙긴 한데, 지난번부터 네가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 뿐이냐? 네 상관이 나 감시하라고 하디?
“그나저나 오늘 정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부인.”
“고마워요. 경도 마찬가지인걸요. 지난번보다 키도 좀 자라신 듯한데…….”
“앗, 정말요? 진심이십니까?”
물론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몇 센티는 더 커진 것 같다.
하긴 쑥쑥 자랄 나이이긴 하구나.
이러다 제 형만큼 커져 버리는 거 아니야?
“와, 그런데 진짜 사람들 많군요. 올해는 특히 더 외국 귀빈들이 많이 오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예, 예전엔 저도 어린애였지만……. 어라, 보십시오, 렘브란트에서도 사절단이 왔나 봅니다.”
나는 무심결에 눈을 돌리다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이고, 차라리 그냥 남편 놈한테 나도 같이 마중 가겠다고 조를 걸 그랬어!
“부인?”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저자가 대관절 왜 오늘 이 시점에 이곳에 와 있는가.
분명 원작에선 에렌딜에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앤디미온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나는 잽싸게 드레스 자락을 추켜잡고 종종걸음을 쳤다.
이 이상 옛 파혼자들이랑 부딪히는 건 지양해야 한다.
하물며 렘브란트의 비셸리에 공작은 여느 파혼자들이랑 비교를 불허했다.
아직까지도 국제적 고자로 조롱당하기 일쑤인 사람인데, 만일 그가 오소렐 공처럼 내게 앙금을 품고 있다면 안 그래도 신경 쓸 거리가 산더미이거늘…….
“부인, 부인!”
일단 화장실에 가서 마음을 재정비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찰나 폴짝폴짝 튀어나온 누군가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앙증맞은 분홍색 드레스 차림의 인형 같은 어린 소녀, 레아였다.
“아, 에스포시 영애…….”
“오늘 왜 이렇게 예쁘세요?”
“아하하, 고마워요. 영애가 더 예쁜걸요.”
“거짓말. 저랑 같이 아리엔 공주님한테 가실래요? 공주님도 그 왕관 보고 싶어 하실 거예요.”
“왕관이 아니라 코로나랍니다. 제가 일단 먼저 화장실부터…….”
대충 둘러대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물어물 벌어지는 입매가 심상치가 않아서 나는 그만 멈칫했다.
“영애?”
“부인, 저 미워요?”
“네?”
“다 우리 멍청한 오빠 때문이죠? 오빠가 미워져서 저도 미운 거예요?”
이런. 아무래도 레아는 내가 티파티에서의 사건 때문에 아이반 경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던가.
“그렇지 않아요. 아이반 경도 영애도 미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걸요.”
“하지만…… 혹시 우리 오빠가 또 괴롭혔어요?”
“아이반 경은 저를 괴롭히신 게 아니라…….”
“그럼 후작 영애가 또 괴롭혔어요?”
“그게…….”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아, 결국 따라잡혀 버렸다.
나는 심호흡을 좀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연미복, 산뜻한 밤색 머리카락과 밤바다처럼 새까만 눈동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오랜만이에요, 알폰소 공.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거 반갑다는 뜻입니까?”
“대회에 참석하러 오신 건가요?”
“이런, 아닙니다. 제 휘하 기사가 참석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참가인원이 워낙 쟁쟁해서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진 못하겠더군요.”
농담조로 덧붙인 그가 나와 레아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레아는 새삼 수줍음이라도 타는 건지 어쩐 건지, 우리에게 인사 비슷한 말을 우물거리고는 제 유모가 있는 쪽으로 총총 달려가 버렸다.
“부인께서는 여전하시군요.”
“네?”
“그때도 절 피해 도망가 버리셨잖습니까.”
내가 자길 피해 도망가는 걸 빤히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어디 쥐구멍 없나?
“마지막으로 인사드릴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서.”
“그때는, 제가…….”
“물론 이해합니다.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나 때문에 천하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남자에게 무슨 인사를 건넬 수가 있겠나.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 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신방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알폰소 공, 그때 일은…….”
“아니. 괜찮습니다, 부인. 전부 끝난 일이니까요. 이젠 짓궂은 놀림에도 슬슬 익숙해졌고 말입니다.”
비꼬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알폰소의 표정을 살폈다.
기억 속 그대로 다정한 미소.
아무런 앙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달관 그 자체인 미소였다.
원작에서 우리 가문의 붕괴를 돕는 데 일조했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 둘이 나란히 마주 서 있는 모습에 사방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조합인가?
그러나 알폰소는 남들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걱정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지만, 실은 저 얼마 전에 새로 약혼했습니다.”
이미 대강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나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러셨어요?”
“물론 그러고도 여전히 놀려대는 녀석들이 있지만요. 하여간 사내놈들이란, 뭐 저라도 놀려댔을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좋은 분을 만나시게 되어서…….”
“다행이죠. 부인께서도 그러신 듯하여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보다 용기 있는 놈이었다면 그 행운은 제가 잡았겠지만.”
기분이 점점 아리송해지려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무슨 꿍꿍이야 대체?
“공을 탓할 만한 일이 아니었는걸요. 그땐 저도 어렸고…….”
“탓할 일 맞습니다. 서약을 나눈 이상 끝까지 책임져야 했는데, 저 또한 그저 그런 범부와 다를 바 없었나 봅니다. 부끄러운 일이죠.”
“…….”
“단지……. 면목 없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자기한테 그런 수치를 안겨주고도 잘 먹고 잘사나 확인하고 싶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중에 쳐부술 때 아무런 거리낌도 없게?
의혹이 이는 한편으론 그의 시선이 너무도 진솔하게 느껴져서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차라리 아까의 오소렐 공처럼 뺀질거리는 편이 나을 지경인데.
“전 잘 지내요, 보시다시피…….”
“로마냐의 수행단이 도착하셨습니다!”
한껏 들뜬 연회장의 분위기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엄숙해졌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아아,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냐.
내 친정 덕에 국제적 고자로 전락한 옛 정혼자와 괴물 같은 사이코 친정 오라비와 무시무시한 주인공 되시는 남편 놈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네.
살려줘, 이놈들아.
“이거야 원, 수컷 냄새에 질식하겠군요.”
알폰소가 의미심장한 듯 농기가 다분히 벤 어조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당신도 수컷이면서 뭔 소리야 이 양반아.
새삼 진짜 고자라도 된 것처럼 말하기는.
“수컷 ㄴ…… 그게 도대체 뭔가요?”
“저 같은 범부는 잽싸게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그러한 종류를 뜻합니다.”
뭐 같은 소리를 참으로 진지하게 설명한 옛 정혼자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이해가 갈 듯 말 듯한데.
웅장한 연회장 정문에서부터 국왕이 앉은 상석까지 사람들이 순식간에 홍해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지는 모습은 실로 진풍경이었다.
브리타냐 환영단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들어서는 로마냐 추기경단, 경건하고도 신성하게 느껴져야 할 등장에 때아닌 으스스한 긴장미와 위압감이 넘치는 이유는 가장 선두에 선 두 놈 탓일 터였다.
나의 오빠 놈과 남편 놈.
상석에 앉은 페아놀 왕과 그 옆에 선 오메르타 공작을 제외하고서 연회장의 남녀노소 모두가 반쯤 넋을 놓은 모양새로 그 둘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일순 모든 숨이 멎어버린 듯했다.
악마의 기운으로 반짝거리는 감청색 눈이 음울하고도 고독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몇 달 만에 보는 체시아레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사미르 차림이었다.
지금의 그는 내 열여덟 생일날 입었던 옷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모피 장식이 들어간 망토와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감색 공단 연미복.
검푸른 머리카락은 뒤로 단정히 쓸어넘겼고, 십자가와 목걸이와 반지를 장식한 사파이어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상의 빛처럼 반짝거렸다.
참으로 악마와 같은 미모이나 내 눈에는 그냥 악마의 재림이 따로 없다.
젠장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종 보스들 등판이군.
그리고 우리 남편 놈. 난 솔직히 이스케가 오늘도 그놈의 시커먼 갑옷 차림일 줄 알았다.
아니면 일전에 한번 본 그 시커먼 제복 차림이던가.
하지만 특유의 야유하는 듯한 냉소를 머금은 채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이는 이스케는 생판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멀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연미복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행사용 제복인 듯했다.
어깨에는 팔라딘의 푸른 망토 대신 하얀 모피 망토를 둘렀고, 화려한 견장과 금사 문양, 루비와 다이아몬드 브로치들 등을 덧댄 은빛 제복이 조각상 같은 장신과 어우러져 가히 예술적인 카리스마를 자아냈다.
인성과 미모를 맞바꾼 놈들이 나란히 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흑표범과 설표범의 조합 같군그래.
나머지 우리는 불쌍한 피식자에 불과하고 말이지.
아버님과 왕조차 한낱 이빨 빠진 사자로 느껴질 지경인데.
“신성 로마냐의 교황 성하께서 브리타냐의 페아놀 왕께 축복을 기원하십니다.”
“거룩하신 성하께 감사를. 다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이다.”
덤덤하게 인사를 건네는 국왕의 옆자리 상석은 텅 비어 있었다.
외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왕비도 함께하게 마련이었으나, 제아무리 사랑꾼 왕이라 해도 로마냐의 추기경단을 맞이하는 자리에 개종했다 한들 이교도국 무희 출신인 왕비를 떡하니 내보일 순 없었나 보다.
하긴 사소한 거라도 책잡힐 만한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는 게 낫겠지.
“몇몇 분이 뱃멀미로 고생하셨다 전해 들어 미리 궁의를 대기시켜 놓았소.”
“사려 깊은 환대에 감사하는 바이나 뱃멀미가 아니었습니다.”
추기경단 사이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그렇지. 뱃멀미는 무슨, 아마 숙취였으리라.
페아놀 왕은 대체 뭐가 웃긴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눈빛이었으나 그럼에도 기품 있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기우였을 뿐이라 다행이구려.”
“다시 한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이리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오메르타 공작.”
“잘 오셨습니다, 예하. 환영단이 조촐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소공작께서 친히 맞아주셔 안심이었습니다.”
체시아레와 아버님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왜 이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현실도피 심리인가?
저 자식, 엄청나게 깍듯하게 굴고 있잖아…….
“그럼 자세한 얘기는 차차 나누도록 하고, 모두 마음껏 연회를 즐기시길 바라오.”
국왕이 가볍게 손바닥을 짝 맞부딪힌 것을 신호로 연회장을 잠식하고 있던 어수선한 정적의 주문이 풀렸다.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와 궁중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 어릿광대와 마술사들이 묘기를 부리는 소리 등이 언제 멈췄냐는 듯 번져갔다.
“그럼, 또 뵙기를.”
나직하게 인사를 건넨 옛 정혼자께서 정말로 줄행랑을 쳤다.
정확히는 우아하게 멀어져 간 거지만.
모여드는 사람들을 홍해를 가르듯 뚫고서 다가오는 존재들이 느껴진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돔 천장을 뒤덮은 ‘심판의 날’ 프레스코화.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으려나?
“루비?”
내가 시선을 바로 하기도 전에 그들 쪽에서 먼저 나를 보았다.
두 쌍의 빛깔 다른 눈동자가 똑같이 크게 벌어지는 모양새가 참 볼만하다.
나는 최대한 기쁜 듯 활짝 웃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몸을 숙였다.
“하마터면 늦는 줄 알았답니다.”
이스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에 그렇게 넋이 빠져서 못 박힌 듯 보기만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오늘 좀 예쁘긴 하다만, 에헴. 전부 네가 새로 준 것들이잖니.
남편 놈과 별반 다를 거 없는 꼬락서니로 나를 물끄러미 훑던 체시아레가 이내 근엄한 표정을 풀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남들 눈에는 마냥 한없이 다정하고 수려하게 보일, 환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맙소사, 그 딱딱한 인사는 대체 뭐야?”
“오빠…….”
“이리 와. 험한 뱃길 타고 온 오빠한테 포옹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팔을 살짝 벌리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다정한 오라비가 따로 없다.
이 사이코 녀석의 본색을 알 턱이 없는 에렌딜의 영양들은 마냥 넋이 나간 눈길을 이쪽으로 던지며 뺨을 붉히고 있었다.
“자, 어서.”
반가운 척, 반가운 척. 나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조르르 다가가 그의 팔에 냅다 안겼다.
익숙한 사향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이미 생생한 현실감을 무자비하게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팔이 나를 꽉 끌어안고는 한번 번쩍 들었다 내려놓았다.
“좀 살찐 것 같은데, 우리 공자비. 신혼이 좋긴 좋은가 보다.”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오빠 놈의 짙푸른 눈동자는 순전한 반가움과 기쁨으로 반짝거릴 뿐, 예상했던 어둑한 분노의 기미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소 띤 얼굴로 이스케를 돌아보는 모습 또한 겸허와 정중 그 자체였다.
드물게 완벽한 가면을 쓴 모습에 나는 이제까지보다 더한 긴장감에 등골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어, 이렇게 나오다니……. 일단 장단이나 맞추자. 애초에 그것 말고 다른 수도 없지만.
“오랜만에 보는 자리에서 또 놀리기나 하기야?”
“이런, 실수. 남편 앞에서 놀려서 화났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자 뒤따라온 추기경들 사이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로 익숙한 풍경, 익숙한 반응들이었다.
“강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오랜만이에요, 리사리오 추기경님.”
흐뭇하게 인사하는 추기경들에게 발랄하게 화답한 뒤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이스케에게 돌아섰다.
휴, 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꾸며 가지고는.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짐짓 태연하게 찬사를 건네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군.”
어머, 정말로?
……가 아니라! 그냥 예쁘다고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넌 사람이 어쩜 그리 한결같이 야박하니?
“당신도 몰라볼 정도로 예뻐요.”
“……칭찬인가?”
“칭찬이죠, 그럼.”
빈정기를 한껏 담아 생글거리자 야박한 남편 놈은 잠시 두 눈을 의심스럽게 좁히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짧고도 가볍게, 기사답게 정중하게.
“영광이네, 공주님.”
이 자식 보게. 그게 궁중 연회장에서 할 소리냐?
저기 앉아 계신 네 외숙께서 들으면 어찌 반응하실지 모르겠구나.
“오빠를 무사히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거참, 누가 들으면 내가 전쟁 포로라도 돼서 매제가 구해온 줄 알겠어.”
“예하께선 포로가 되실 인물로는 안 보입니다만.”
“그거 고맙군. 매제도 마찬가지네.”
입술에 침들은 발랐냐?
사이좋게 주고받는 두 놈의 행각에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체시아레도 체시아레다만 도도한 성격 파탄자 이스케조차 생판 딴사람처럼 정중하게 구는 모양새가 영 적응되지 않는다.
직접 환영단을 끌고 간 것부터도 놀라웠지만…….
문득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모든 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이기만 한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아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오빠와 사랑하는 남편이 기꺼이 서로 환대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겠지.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닌 연극일 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배역을 맡은 배우답게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이.
“정말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