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36)

* * *

“마님, 계속 눈 감고 계세요. 브러시 이리 줘봐. 헤나 기름은 어디다 뒀어?”

“집게는 다 달궜어?”

“빨리빨리 움직여!”

아이쿠, 지난번 연회 준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신이 없다.

바야흐로 국제적 축제의 첫날, 꼭두새벽부터 붙들려 때 빼고 광내는 작업을 하고 있으려니 눈이 핑글핑글 돌 지경이었다.

“명반하고 코케닐 가루는?”

“진주 가루 좀 더 가져와.”

“마님, 이대로 손 가만히 두세요. 아직 멀었어?”

“손때 안 묻게 조심해!”

와글와글 바글바글.

로마냐에서도 이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치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과연 오메르타 공자비 노릇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온통 부산스럽고 정신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훅훅 흘러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숨을 돌리며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어떠세요, 마님?”

자부심과 흐뭇함으로 초롱초롱 빛나는 눈길들에 무어라 답해야 하는가.

하긴 자부심에 찰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공들여 화장한 덕인지 평소보다 훨씬 생기 넘치고 상큼하게 보인다.

입술도 손톱도 반짝반짝 윤기가 돌았으며, 거기에 모피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가슴을 빙 둘러 보석을 박아 넣은 장밋빛 드레스, 신발은 같은 색의 리본이 달린 빌로드 구두였고, 유색의 다이아몬드들이 목 언저리와 귀에 매달려 샹들리에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황금 숄처럼 구불구불 길게 늘어진 머리에는 루비와 사파이어가 별처럼 박힌 화려한 코로나가 얹혀 있었다.

“어쩜, 정말 요정 같으세요, 마님.”

“지금 이 모습 누구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으세요?”

아마 남편 놈? 앞다투어 쏟아지는 입에 발린 칭찬들이 싫지 않았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대단하긴 한걸.

수줍게 웃고 있는 거울 속의 여인은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건 비단 화장 때문만이, 호사스러운 드레스와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보석들 때문만이 아닐 것이었다.

“팔찌는 정말 그걸로 괜찮으세요?”

보석함을 닫던 루실이 슬그머니 던진 질문이었다.

온통 반짝거리게 걸쳐놨는데 팔찌만 따로 노는 듯한 것이 아쉽다는 눈빛이었다.

“응, 팔찌는 이걸로 됐어. 고마워, 다들 수고 많았어.”

나는 한 손을 들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눌렀다.

풍성하게 늘어진 소매 장식 덕에 투박한 팔찌가 눈에 띌 일은 적을 것이었다.

굳이 이걸 고집한 이유라면, 글쎄, 아마 그놈이 내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라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걸 차고 있으면 왠지 강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한동안 아주 강해져야 했다.

“루비.”

마차를 세워둔 곳에는 엘레니아가 앞서 기다리고 있었다.

옅은 레몬색과 크림색으로 짜인 우아한 레이스 드레스, 거기에 머리를 촘촘하게 땋아 사이사이 보석 핀을 박아 넣은 모습이 가히 환상적이었으나…… 아아, 어색하다 어색해.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어색한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영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티파티 사건 이후로 단둘이서 있는 건 지금이 처음이니.

휴, 빌어먹을 프레이야.

“정말 아름다워요, 엘렌.”

어색함을 누르려 애쓰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그제야 엘레니아가 나를 바로 보았다.

냉랭한 붉은 눈매에 얼핏 당혹감이 스친 것 같았다.

“루비도, 말이 안 나오게 아름다우십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잠깐 대화를 더 이어갈 듯 머뭇거렸으나, 이내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어색한 정적에 휩싸인 채 마차는 왕궁을 향해 달렸다.

* * *

엷고 창백한 햇볕과 안개가 어우러진 엘모스항에는 두 개의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메르타를 상징하는 면류관의 깃발과 롱기누스의 창이 그려진 깃발.

그 아래로는 푸른 망토를 두른 기사들과 더불어 에렌딜 신전의 성직자 몇몇이 신성한 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진열을 갖추고 있다.

마침내 선착장을 디딘 로마냐 수행단은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진홍색 수단을 걸친 교황청의 추기경들.

개중 가장 선두에 선 발렌티노 추기경만이 유일하게 수려한 연미복 차림이었는데, 복장은 둘째 치고 비현실에 가까운 용모 탓에 더더욱 눈에 띄는 모양새였다.

저 새파랗게 젊은 추기경이 바로 체시아레 데 보르히아인가.

교황의 장남, 발렌티노 추기경이자 사보아의 공작 및 로마냐의 지사.

환영단 사이로 소리 없는 술렁임이 퍼져갔다.

단숨에 이목을 끄는 용모라는 점은 같을지언정 오메르타의 공자비와 어느 한구석 닮은 조각이 없었다.

“예하.”

말에서 내린 에렌딜 신전의 대주교가 젊디젊은 추기경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체시아레는 제 아버지뻘의 대주교를 잠시 내려보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대주교는 그 손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추고서 일어나 성호를 그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감사를.”

황송하게 덧붙인 대주교가 물러서자마자 저벅저벅, 하는 느릿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체시아레는 반대편에서 말을 몰고 가까이 다가오는 은빛의 기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반지에 박힌 짙푸른 사파이어와 꼭 같은 눈동자가 서늘한 빛으로 너울거렸다.

그 눈을 마주 내려다보는 무감한 눈동자는 타오르는 듯한 루비색이었다.

가느다란 햇볕 한줄기가 두 남자 사이로 떨어졌다.

선착장에 모인 인원들이 일제히 원인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마른침을 넘기는 바로 그 순간에 매제 쪽이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예하.”

“고맙군.”

안도의 한숨이 파도처럼 퍼져갔다.

바야흐로 축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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