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36)

Chapter 5 축제의 환상

주렁주렁 매달린 색색의 드레스들의 향연이 축제의 깃발들 같다.

빨간색, 녹색, 보라색, 크림색과 하늘색, 분홍색과 레몬색, 그리고 오건디, 레이스, 비로드, 공단, 시폰 등등 온갖 고급 피륙에 새겨진 섬세한 자수들과 알알이 박힌 보석들.

온통 눈이 부시고 화려한 풍경이었다.

“뭐가 가장 마음에 드세요, 마님?”

“글쎄. 로냐, 너는?”

“저, 저는, 감히 어떤 게 가장 예쁘다고 고를 수도 없겠는걸요.”

내가 놀라워하는 정도였다면, 로냐와 루실은 아예 넋을 놓고 황홀해하고 있었다.

새빨간 장미와 샛노란 루드베키아로 장식된 보석함 안에 든 찬연한 장신구들을 봤을 땐 거의 침을 뚝뚝 흘릴 지경이었다.

실은 나도 좀 그랬다. 그러니까, 누가 이걸 보고 감탄하지 않고 배기겠나?

“공자님께서 마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우리의 한 탐욕 하는 루실이 오색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채플릿에 눈을 떼지 못하며 표한 소감이었다.

맙소사, 사랑이라니! 그래도 좀 감동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그 삭막한 놈이 이런 호사스러운 선물들을 보내줄 줄이야.

검투 대회 축제 시즌이 마침내 개막했고, 체시아레 놈이 로마냐 사절단과 함께 엘모스 항에 도착하는 날 또한 코앞으로 다가왔다.

실로 암울한 현실이 아닐 수가 없겠으나 그럼에도 전에 비해 한결 희망찬 기분이었다.

암, 힘내자 힘. 실수하지 말고 잘 해내자고. 며칠만 견디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나는 다양한 빛깔의 다이아몬드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채플릿을 머리에 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모름지기 선물을 받았으면 감사 인사를 해야 도리 아닌가.

“그리 달리면 다칠 게요!”

굽이굽이 이어진 층계참을 내려가던 중 불쑥 들려온 엄중한 음성에 나는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엉거주춤 눈을 돌린 그곳에는 회랑 옆에 나란히 마주 서 있는 아버님과 집사장이 있었다.

나 안 달렸는데.

“아, 방정맞게 보였으면 죄송…….”

“참으로 멋진 채플릿이구려. 누구한테 자랑하려 그리 급히 가시는 게요?”

또 빈정대는 건가?

누가 그 아들에 그 아버지 아니랄까 봐.

짐짓 망설이는 나를 향해 집사장이 알 만하다는 눈빛을 지어 보였다.

“공자님께선 지금 서재에 계실 겁니다. 다이아몬드 장식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어머, 진짜요? 진짜 잘 어울리나요?”

활짝 웃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노련한 집사장과 산적 같은 아버님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가,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왜요. 뭐.

“오메르타령 로베스크에서 나는 다이아몬드는 빛깔이 영롱하기로 명성이 높습니다. 마님만큼 잘 어울리는 분이 또 있을까 싶군요. 안 그렇습니까 각하?”

“내가 언제 보석에 관심이나 두던가? 하여튼 어서 가보시오. 뛰지 마시고.”

어서 가던 나를 붙잡은 쪽이 누구셨더라?

하여간 다중인격 같은 성질머리는 이 집 부계 유전인 게 틀림없다.

빈말로라도 어울린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쪽은 도시경비대 관할이지, 우리가 거기까지 신경 쓸 건 없고.”

“틈나는 대로 재점검하라고 전해.”

“단장님은 여전히 네가 불참하길 바라시는 것 같던데. 꿈자리가 어쩌고…….”

“이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 미신 신봉자투성이냐.”

“근데 부탁이란 게 고작 보모 일이었냐? 나 참.”

“그럼 나머지 사절단 분담은 원탁 소속 놈들한테…….”

손님이 와 있다는 말은 왜 빼먹으셨나?

최대한 사뿐사뿐 걸어서 남편 놈의 서재 앞에 도착한 나는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그만 멈칫하게 되었다.

꽤 진지한 분위기인데, 그냥 나중에 다시 올까 하는 찰나였다.

“어차피 로마냐 측 수행단은 내가……. 루비?”

불현듯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스케가 곧장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서재 안의 모든 이들이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방해해서 죄송해요. 혼자 계신 줄…….”

“마침 잘 오셨습니다. 슬슬 이 새끼 험악한 낯짝 보는 거 질리던 참이었거든요. 그나저나 참 예쁜 장신구입니다, 저희한테 보여주러 오신 겁니까?”

다소 경박해 보이는 모양새로 책상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반 경이 냉큼 두 발로 서며 건넨 인사였다.

의외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난스러운 인사에 나 또한 어색함을 감추며 자연스레 마주 응하려는 찰나 이스케가 으르렁거렸다.

“마침 식사 시간이 다 됐군. 밥이나 처먹으러들 가라, 네놈들은.”

“이런 씨X…….”

새로 들여놓은 앙증맞은 노란색 카우치를 짓뭉개다시피 하며 앉아 있던 갈라르 경이 빠르게 나선 덕에, 우리 모두 정오부터 귀가 더럽혀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아이반 경은 그대로 갈라르 경의 우람한 손아귀에 입이 틀어막힌 채 퇴장했다.

그 뒤로 까칠한 카뮤 경이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곤 따라나섰다.

이어서 싱글거리는 인상의 안대를 찬 팔라딘과 복면을 쓴 팔라딘이…… 전부 그때의 소수정예들이네, 그러고 보니.

나는 사뿐사뿐 서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말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남편 놈이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또 왜 그렇게 신이 나셨나.”

“당신 때문인데요. 정확히는 당신이 보내준 선물들 때문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전부 너무 예뻐서 뭐부터 착용해야 할지 마음을 못 정할 지경인걸요.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잘 두르고 다니면 그게 보답이지.”

정말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쓴 채플릿을 툭툭 건드렸다.

“잘 어울리나요? 이거 쓰니까 진짜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인데.”

이스케가 팔짱을 풀고 다가와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눈보다 더 높이 들어 올려서 허공에 반 바퀴쯤 홱 돌린 뒤 책상머리에 앉혔다.

“진짜 공주님이시니 비만 도마뱀이 납치한 거겠지.”

이 무슨 돼먹지 못한 논리란 말인가? 맞닿은 코끝이 기분 좋게 간질거리나 싶더니 이어 입맞춤이 내렸다.

콧등에, 눈꺼풀에, 뺨과 입술에.

꿈결보다 더 달콤한 것을 다루듯이.

“이스.”

“왜, 매정한 공주님.”

“제가 왜 매정해요?”

“맨날 속 썩이니까 매정하지 그럼.”

“저 아무 사고 안 쳤는데요?”

진짜로 억울해서 항변하자 그가 내 볼을 꼬집고 쭉 당겼다.

아니, 이런 뒤끝 끝내주는 놈을 보았나.

“곧 네 친정 식구들 보겠네, 많이 반갑겠어.”

“그야……. 근데 엘모스 항으로 당신이 마중 가는 거예요?”

“명색이 매제인데 당연히 내가 직접 가야지. 왜, 너도 가고 싶나?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물론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단 체시아레를 선두로 한 수행단을 맞으러 가는 길에 내가 빠지고 이스케가 간다는 사실이 좀 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원작에서는 그 반대였으니까.

나아가 이스케가 자진해서 환영단을 맡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슨 생각인 걸까? 단지 내가 좋아져서, 내 오빠한테도 예를 다해 주겠다는 마음일 뿐일까?

“안전하게 모셔올 테니까 걱정 말고 궁전에서 기다리시라고. 연회장에서 인사 좀 나누고 있다 보면 우리가 와 있을 거야.”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으나 얌전히 머리를 끄덕였다.

둘이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을 놓쳐야 한다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원작에선 거의 대면하지도 않고 서로 소 닭 보듯 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스, 있잖아요.”

천천히 내 등허리를 쓰다듬던 그가 눈썹을 약간 들며 내 눈을 바로 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는 눈빛, 염려와 갈망과 내가 알 수 없는 그 모든 감정으로 다채롭게 변하는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시려왔다.

“……아니에요. 꽃단장하고 기다릴게요.”

세상만사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은 전부 말하고 싶어.

난 남들이 생각하는 시스티나의 공주님이 아니라고, 오빠가 무섭다고, 네가 변할까 두렵다고, 네가 대회에 참가하는 대신 계속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흔들리지 말자.

그가 검투장에서 싸우는 동안 나는 나만의 경기를 치러야 하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등허리를 훑던 손길이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리기까지 눈 한 번 깜빡할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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