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먹고 토해낸다고?”
“어쩔 수 없이 먹고 나면. 나나 오빠가 붙들고 억지로 먹이지 않았으면 그나마도 안 먹었을걸.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진 편이야.”
“우울해서 입맛이 없다거나 속이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는 얘기야?”
“그래, 내가 봤을 땐 정신적인 문제인 것 같아. 참다 참다 한 번씩 폭발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평소에는…….”
“전문가처럼 말하는데, 그게 다 우리 어머니 덕분인가?”
엘레니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스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스케는 의외로 제법 차분한 낯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 셈이지. 그때 어머니는…… 좀 이상했잖아, 오빠도 기억하다시피.”
“확실히 매사 기분이 오락가락하기야 하셨지. 젠장, 어머니가 갈수록 야위어간다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고. 난 그게 단지 우울증 탓이라고 생각했어.”
“맞게 봤어, 우울증은 우울증이었으니까. 그래도 그 정도로 격렬하게…… 섭식 자체를 거부했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넌 처음부터 알았다면서.”
“나야 그때 어머니가 종일 끼고 사셨으니, 나한테 굳이 감추려 들려고 하시지도 않았고. 이유야 모를 일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알아?”
“아버지가 뭘 아시고 뭘 모르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 그땐 어머니랑 사이가 좋지도 않아서 거의 얼굴 보지도…… 뭐 사이가 좋았다 해도 마음먹고 감춘다면 남편이라도 상상도 못 했을 거라는 건 알겠네, 바로 지금처럼.”
“하, 변명의 여지가 없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이스케가 팔짱을 끼며 카우치에 등을 기댔다.
홍옥 같은 눈동자가 골똘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엘레니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살피다 새침하게 덧붙였다.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루비는 오빠랑 만나기 전부터 그런 상태였던 거잖아. 어머니 일이 아니었으면 나도 전혀 몰랐을 텐데, 그냥 입이 좀 짧은 편이라고 생각했을걸.”
“그 정도로 능숙하다고?”
“어머니는 새 발의 피였어.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 같아.”
“참다 참다 폭발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무리 강한 이성으로 억눌러도 생존본능과 직결된 인간의 식욕이란 압도적인 법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종일 단식에 가까운 일주일을 보내다가도 늦은 주말 밤 갑작스레 식당으로 가 2인분의 만찬 풀코스를 모조리 해치우곤 했다.
엘레니아가 그 얘기를 털어놓자 이스케는 완전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또 토해내고? 환장하겠군, 죽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환장할 지경이긴 했지. 말 못 했던 건 미안해. 그때 오빠나 아버지한테 알리면 죽어버릴 거라고 하셔서 계속 감추다가 지금까지…….”
“그래서 계속 감췄는데 결국엔 돌아가셔 버렸군그래. 그때 네가 몇 살이었지?”
신랄한 어조에 엘레니아는 그만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녀는 아홉 살이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어머니를 제일 먼저 발견했던 이스케는 열세 살.
“그 꼴은 못 봤네, 오빠가 가려준 덕분에. 굳이 공평을 기하자면 말이지.”
침묵이 흘렀다.
바깥 풍경이 점점 더 환해지는 동안 남매는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스케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기둥 위까지 뒤덮은 프레스코화를 응시하는 사이 엘레니아는 초조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젠장할, 어쩐지 좀체 살이 안 붙더라니…….”
“루비한테 뭐라고 하지 마.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어쨌든 비밀이었다고. 난 오빠 부인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고 뭐에 씐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한참이나,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더니만 마침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좀 친해졌다고 말버릇까지 닮아가기냐?”
“질투 나?”
“조금. 그리고 비밀이었다면 어째서 하녀장이 알고 있는 거지?”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거 인정해. 그냥 루비한테 좀 사근사근해졌으면 했어,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어머니 일은 마르타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을 하는데 문득 불쾌함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엘레니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마르타는 어쩌다 루드베키아에게 그 얘길 꺼내게 된 걸까.
묻는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이유를 듣게 될 것이었다.
문제는 그 사실 때문에 더더욱 기분이 불쾌하다는 거였다.
덫에 걸린 듯한 기분, 어제의 소동 이후 내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정체 모를 불쾌함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네가 그 정도로 내 부인을 위하고 있었을 줄이야.”
“또 비아냥대는 거야?”
“욱할까 봐 자제하는 중이다. 고작 그런 일로 루비가 네 유모를 때렸다고? 네 말마따나 지난번 일도 있는데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거냐?”
“마르타는 내가 다시 확실히…….”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면서 싸고돌았잖아. 얘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이스케가 으르렁거렸다.
가늘게 좁힌 눈 아래 어수선한 분노가 맹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엘레니아는 지난 밤 거의 탈진 상태였던 루드베키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확실히 자신만 아니었다면 마르타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날이 밝기도 전에 매질을 당하고 내쫓겼을 것이었다.
아니, 매질만 당하면 다행이리라.
그녀의 오빠는 손끝에 자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마르타가 그녀의 유모가 아니었다면, 둘 사이가 그리 끈끈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타가 쫓겨난 뒤 그녀가 그걸로 루드베키아를 원망하리란 여지가 없었더라면…….
거기까지 헤아리고 참을 줄도 알고 참 대단한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발전이 오직 단 한 사람과 관련된 요소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이번이 마지막이야, 오빠. 마르타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게 해줘. 나도 나름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허투루 덧붙인 소리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내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쾌한 의혹 탓에 엘레니아 또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어째서 마르타가 이스케의 분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그녀를 이용해먹은 것 같은 느낌인 걸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의혹이 아연 재촉을 해대고 있었다.
이스케는 잠시 알 수 없는 눈길을 그녀에게 던지더니 이윽고 비틀린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좋아. 나도 루비가 멍청한 하녀 하나 때문에 너랑 나 사이에서 주눅 드는 거 바라지 않으니까. 단 이번이 마지막이야. 당분간 얘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확실히 해.”
“나도 그런 거 바라지 않으니까, 걱정 마.”
“눈물겹군. 그럼 다른 얘기도 좀 해봐라. 티파티 일은 대체 뭐야?”
“루비는 오빠한테 뭐라고 얘기했는데?”
“너한테 했을 얘기랑 똑같은 얘기.”
“그게 뭐…….”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맞다, 그랬었다.
엘레니아는 잠깐 망설이며 숨을 골랐다가, 쏘아붙이듯 반문했다.
“그걸 온전히 믿는다면 굳이 이런 질문 할 필요 없잖아.”
동생의 속이 빤히 보인다는 듯, 이스케가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비아냥대는 미소였다.
“엄한 데 화풀이할 생각 집어치우시지? 네 기분을 나한테 덮어씌우려 들지 말라고. 난 단지 프레이야가 너한테 뭐라고 떠들었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거든.”
“…….”
“뭐 정 말하고 싶지 않다면야 됐고.”
꼭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기분.
다시금 두통이 이는 느낌에 엘레니아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직접 물어보지 그래. 오빠 친구이기도 하잖아.”
“네 친구지, 내 친구가 아니라. 이 어린것들이 자꾸 맞먹으려 드네.”
혀를 쯧 차며 누이동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밀치는 이스케였다.
엘레니아는 그만 그를 샐쭉하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초고속으로 달려왔어? 신전 축일 날.”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마곡석 들이켜고 각혈한 인간이 걔가 아니라 다른 작자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거든? 그때 내가 걱정에 눈 돌아간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그게 누구였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엘레니아는 그 누구보다도 제 오빠란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래서 이토록 기괴한 불안감이 이는 걸까.
이스케는 참으로 제멋대로인 성정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는,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리 죽기 전까지는 제법 서글서글했던 것 같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는 얼음 폭풍처럼 거칠게 돌변했다.
가족들에게 무뚝뚝한 정도라면 다른 이들에게는 마수 같았다.
검을 잡는 일 외엔 아무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타인의 사정이나 속내를 헤아리기는커녕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고 비웃는 성정이었다.
그토록 무관심한 주제에 예민하기는 또 괴팍할 정도로 예민해서 누가 심기를 거스르거나 하면 굶주린 마수처럼 난폭해졌다.
그런 인간께서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애착을, 분명 성가시다 여겼던 남부 여자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보일 정도의 집착을 드러내놓고 보이며 서글서글하니 푹 빠져 있는 꼬락서니가 엘레니아가 보기에는 썩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만큼은 특별하다 생각해 왔을 다른 사람들. 가령…….
“아무튼, 내가 조금 전에 한 얘기는 루비한테 내색하지 마. 요즘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는데, 오빠가 다그치면 아마 견디지 못할 거라고.”
“어이가 없군. 날 대체 뭘로 보는 거냐?”
짜증스럽게 투덜대는 이스케는 퍽 복잡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엘레니아는 어이가 없어졌다.
양심이 있기나 한 걸까?
갈수록 생판 다른 인간처럼 구는 것이 좀체 적응하기 힘들다.
“오빠 성질대로라면 무슨 짓을 벌일까 걱정되니까 그렇지. 기껏 차려놨는데 다 토해버렸느냐고 성질이라도 부리면…….”
“내가 왜 걔한테 성질을 부리냐? 너야말로 어설프게 눈치 주지 마시지 그래.”
“내가 무슨 눈치를 준다고 그래? 나야말로 걱정돼서 이러는 거거든? 어제 일만 해도, 루비가 제대로 말해줬다면 나는 들었을 거라고. 그냥 아무 짓 안 했다고만 하는데 거기서 더 어쩌란 거야?”
일리가 있는 주장이긴 했다. 무엇보다 엘레니아는 그만큼 루드베키아의 숨겨진 면모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스케는 북부 토박이들에게 둘러싸여 겁에 질렸을 루드베키아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기벽이라니.
어쩐지 깡마른 몸에 영 변화가 없다 싶었다.
처음 봤을 때보단 약간은 낫긴 했지만, 그간 계속해서 몰래 그래왔던 걸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래왔단 말인가.
모르는 척해야 하나, 붙들고 얘기해 봐야 하나.
그 주제를 꺼내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골이 지끈거리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모를 일이었다.
머리가 온통 복잡했다. 복잡하고도 더러운 기분.
최근의 루드베키아는 예전처럼 기묘한 공포가 어른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지 않았다.
툭하면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살피지도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마음의 짐을 하나 던 것처럼 생기가 깃든 미소도, 먼저 조르르 다가와 안기는 것도, 밤마다 그의 배 위에서 세상 모르는 얼굴로 잠드는 것도 좋았다.
심지어 간밤처럼 골부림을 내며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때리는 것조차…….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라 여겼는데, 이래서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가.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치는 것도 일이었으나 주변 인간들 문제도 일이었다.
이번에 그녀를 울게 만든 것들은 하나같이 오랜 세월 동안 믿을 수 있다 여겨왔던 이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도리어 마물들 쪽이 더 믿음직스러울 지경이다.
하녀장과 프레이야.
프레이야와 로렌초…….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엘레니아의 타박에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프레이야 생각을 떠올리자 머리 한쪽이 싸해졌다.
원래 그리 양면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가?
승마 모임에서의 사건과 더불어 로렌초에 대한 일이 지난밤부터 끈덕지게 뇌리를 잠식하며 싸늘한 감 같은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의 종자 앤디미온은 여간해서 시비에 휘말리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얼마 전에 로렌초와 거하게 싸움을 일으켰다.
왜 싸웠느냐고 다그쳐도 가타부타 해명이 없었다.
나중에 슬쩍 한다는 말이라곤 로렌초가 공자비에게 그릇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으니 유념해 두시라는 시건방진 소리뿐이었다.
그 그릇된 감정이란 게 십 대 소년의 경거망동한 풋사랑을 뜻하는 건 아닐 터였다.
종자 놈만 해도 그렇고, 하나같이 주둥이 가벼운 동료 놈들이 그 문제에는 갑자기 천금의 주둥이로 돌변한다.
설상가상으로 로렌초는 무슨 언질을 얻어들은 건지 최근 그의 주변에 얼씬도 안 하고 있었다.
“오빠?”
“……그 와중에 루비는 어쨌든 제 정원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소동이 벌어졌으니 먼저 사과하고 싶다고 조르더군. 심지어 네게도 미안하다 전해달라던데.”
“나한테는 왜?”
“네 유모를 때렸으니까. 제기랄, 다들 반만이라도 좀 닮으면 싶다.”
부부는 닮는다던데 왜 오빠나 좀 닮지 않고.
밭은 한숨을 삼키며 엘레니아는 양손을 꼭 쥐었다. 하여간 착한 사람 같으니.
“나도 루비랑 어색하게 지내는 거 싫어.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질색이라고.”
“그거 안심이네, 내 마침 너한테 부탁할 게 있거든.”
“부탁이라니?”
“곧 우리의 신성하신 사돈께서 이 누추한 동네를 방문하실 텐데 말이야.”
비아냥대듯 말을 잇는 이스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 인간이 먼저 뭔가를 청해온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기에 엘레니아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난 경기 참석하느라 살필 겨를이 부족해질 테니, 네가 나 대신 눈을 떼지 말아줬으면 한다.”
“누구한테서?”
“내 아내와 그 친정 인사들한테서. 눈 떼지 말고 잘 지켜봐, 특히 발렌티노 추기경이랑 있을 때.”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2권
냥이와향신료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