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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화창한 날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이른 아침의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고 건조했다.
어깨에 숄을 걸친 채로, 엘레니아는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발코니에 앉아서 동이 터오는 안뜰을 바라보았다.
얼음 조각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드물게 복잡한 빛이 어려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머리가 욱신거리며 두통이 일었으나 크게 신경 쓸 만한 건 못 되었다.
이런 꼭두새벽에 눈을 뜨는 일은 근래 들어 드물었기에 가라앉은 아침의 고요함이 새삼 낯설었다.
왜 잠을 설쳤는가. 전부 어제의 빌어먹을 티파티 탓이었다.
정확히는 막판에 벌어진 소동 탓에.
사건의 당사자 둘 중 하나인 프레이야의 말에 따르면, 루드베키아에게 어릴 때 이 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다 뭔가 오해가 불거진 것 같다 했다.
어느 부분에서 무슨 오해가 생겨난 건지는 신만 아실 일이었다.
그리고 루드베키아는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오직 그 말만 했다.
그 일을 다시 상기하자 불쾌하고도 당혹스러운 기분이 밀려왔다.
엘레니아는 이런 식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던 어린아이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프레이야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들이 도기 인형으로 채워진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던 시절부터 서로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속이 불편할까.
어째서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았던 루드베키아의 모습이 자꾸만 뇌리를 잠식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그토록 해쓱해 보였을까? 뭐가 그리 두려워서?
싸움이 일어났다 한들 화해하고 풀면 될 일 아닌가.
프레이야가 그런 일로 앙심을 품는 스타일도 아닌데 말이다.
두통이 다시 이는 느낌에 엘레니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중재자 노릇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여부를 떠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뭔가가 어긋난 느낌, 언젠가부터 고장 난 시계의 바늘을 억지로 돌려놓는 것 같은 위화감이 끈질기게 들러붙고 있었으나 원인을 알 길이 없어 갑갑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비록 엘레니아의 어머니와 루드베키아는 음식에 대한 강박증만 제외하면 판이한 부류였지만.
차라리 여러 면에서 많이 비슷했더라면 좀 더 둘을 이해하기 쉬웠을까.
어머니는 좀체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루드베키아는 아주 잘 울었다.
어머니는 정원에 주저앉아 화환을 만들거나 어린애들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실없는 노래 운율을 맞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많이 달랐다.
어머니와도 달랐고,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도 달랐고, 엘레니아가 여태 보고 겪어온 그 모든 이들과도 달랐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마음을 단단히 봉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갓 북부 땅을 밟은 올케와 대면했을 때만 해도 별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결혼이 아니었다면, 즉 이스케와 루드베키아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교황의 자식과 혼인해 낯선 이국땅에서 시댁 식구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을 이는 엘레니아 본인이 되었을 것이기에 약간의 안도와 연민이 뒤섞인 심정일 뿐이었다.
어쨌든 곧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와 외숙이 이른 대로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다른 누구보다도 당사자들이 원치 않았던 혼사이니 피차 적당한 시기에 끝날 거라고.
이제 와서 보면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리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는 생각이 이는 한편으론, 아버지와 외숙이 과연 이리될 줄 조금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일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왕인 외숙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 힘든 건 오빠였다.
엘레니아는 죽은 어머니를 납득하기 힘든 만큼 오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 비슷한 족속인 탓일지도 몰랐다.
손에 들린 잔 속 데운 포도주가 미지근하게 식었다.
엘레니아는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성가시게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사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예전이라면 당연했을 묵직한 정적이 새삼 낯설고 불편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왔다.
붉은 시선이 저만치 유리 온실이 자리한 뜰 쪽으로 향했다.
물의 정원.
남부의 화사하고 따스한 풍경을 일부 떼와서 옮겨 심은 듯한 장소.
게다가 저 안에는 정원 주인의 꼬마 친구들을 위한 대형 인형의 집까지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관심조차 없었던 천한 피가 섞인 사촌 왕녀가 이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도, 어린애들이 다 자란 여인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노는 것도,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깔깔대는 웃음과 거리낌 없는 눈물과 촐랑대는 발걸음이 성안을 메우는 것도…….
전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 모든 게 그리워질까.
아마 그럴 것이라고 엘레니아는 생각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 그럴 거라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남부의 햇볕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아가씨.”
조심스럽게 부르는 음성에 엘레니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침착한 듯 드물게 어수선한 낯빛의 집사장을 보았다.
“레틀러? 대체 무슨 일이지?”
“송구합니다, 아가씨. 다만 지금 도련님께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차분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레틀러였다.
개암나무색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동요에 기이한 기시감이 피어올랐다.
레틀러가 이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는 이스케가 나흘에 걸친 수색 끝에 의식 없는 루드베키아를 안아 들고 온 밤이었다.
가신들 여럿이 종적을 감추게 된 그 밤.
엘레니아는 곧장 일어나 집사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들 어찌나 어리석었던지, 남녀 간의 문제가 순순히 남들의 짐작대로 흘러갈 만큼 쉽다고 생각했다니, 진정한 짝이 따로 있는지 없는지를 멋대로 짚었다니…….
“오빠?”
이스케는 동일락 홀에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한숨도 자지 않은 것처럼 정갈한 모습으로 나와 있는 그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꼭두새벽부터 머리를 조아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하녀장을 보는 건 심히 드문 일이었다.
“마르타?”
마르타는 투박하리만치 기골이 장대한 여인이었다.
오래전 엘레니아의 유모로서 발을 들였을 때부터 하녀장이 된 지금까지, 어지간한 시종들은 물론이요, 까칠한 호위기사들까지 흠칫하게 할 만큼 강단 있는 아주머니였다.
때론 공작조차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오메르타 공작이 고작 하녀장에게 한 수 접어주는 이유는 온전히 엘레니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르타의 모양새는 단지 겁에 질린 땅딸막한 중년의 하녀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상대가 상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5센티의 키에 어깨너비가 60센티에 이르는 기사라는 점은 둘째치고 공작조차 버거워하는 존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를 푹 조아리고 있던 마르타가 고개를 슬쩍 들고 엘레니아를 바라보았다.
도움을 간청하는 듯한 눈빛.
반면에 이스케는 누이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쌀쌀하고 푸르스름한 아침 공기 속 윤곽이 서늘했다.
면도날 같은 눈매에 뜻 모를 냉소가 번들거렸다.
“직접 고하겠나?”
매끄럽고도 무감한 목소리에 마르타가 움찔했다.
엘레니아는 그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아이반 경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민하고 난폭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런 만큼 차라리 드러내놓고 노발대발하는 편이 깔끔했다.
이렇게 유들유들하게 구는 건 썩 좋지 못한 신호였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이 미천한 것이 그만 분수도 모르고 마님께…….”
아, 역시나 루드베키아와 관련한 일이었나.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빠르게 다그치는 자신을 발견하는 엘레니아였다.
“루비한테 뭘 어쨌는데?”
“쇤네는 단지 염려하는 마음에, 마님께선 아직 이곳 물정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주제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이제 명실공히 오메르타 성의 안주인이신 만큼…….”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린 마르타가 불쑥 수그린 어깨를 바로 펴며 엘레니아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관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갑작스레 자신감을 찾은 듯한 태도였다.
이 뜻밖의 변색에 엘레니아가 저도 모르게 이스케의 팔목을 붙들려는 찰나였다.
“……보는 눈도 많으니 안 좋은 습관은 차차 줄여가시는 게 낫지 않으실까,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마님께서 노여워하시며 쇤네의 뺨을 치셨습니다.”
자신을 향해 더없이 송구해하는 눈빛을 보내는 마르타를 보며 엘레니아는 두통이 다시 이는 것을 느꼈다.
이거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폭탄이었다.
게다가 뺨을 쳤다니, 엘레니아가 봐온 루드베키아는 누구한테 찻잔을 끼얹거나 뺨을 치는 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어제 하루 동안 그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는 것이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쇤네가 분수를 잊고 주제넘게 나서는 바람에…….”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마르타는 진정으로 난감하고 송구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희한한 현상이라고 할까, 엘레니아는 뜻밖에도 일전에 마르타가 그녀에게조차 거짓을 고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스케의 생일 연회날 벌어진 그 작은 소동의 내막이.
그때 마르타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엘레니아는 마르타를 감쌌다.
비단 마르타뿐만 아니라 가신들 대다수가 새 마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주의를 주고 나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가출 소동 때 그 난리를 한바탕 겪은 뒤였다.
따라서 그런 경거망동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굳이 마르타에게 루드베키아의 비밀을, 죽은 어머니와의 공통점을 털어놓은 것도 그런 이유 탓이었다.
연민이라도 좋으니 둘이 잘 지내게 됐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 엘레니아는 자신의 유모와 올케가 잘 지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순진한 바람이었을까.
어제부터 종일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위화감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이 덫에 걸린 듯한 불쾌한 위화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이거야 원 뜻밖인데.”
묵묵히 마르타를 응시하던 이스케가 엘레니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수상쩍은 분위기를 간파한 듯했다.
“헛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래서야 다들 작당한 것 같잖아.”
난처하기 짝이 없다.
엘레니아는 이런 난처한 입장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초한 꼴이 되어버렸다. 결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섣불리 말할 수 있는 일이…….”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일이라 저것이 입을 놀리다 뺨을 얻어맞았나.”
“…….”
“무엇보다 지금 모처럼 곤히 자고 있는데 그딴 걸 묻자고 깨우고 싶지 않네.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실수할까 걱정도 되고.”
기분이 더러울 법도 했다.
이스케는 루드베키아에 관한 일이라면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야생마 같았다.
무엇보다 이스케가 루드베키아에게 직접 캐묻는다면 난처한 건 엘레니아 쪽이었다.
비밀로 해주기로 했었는데. 어쩌다 이리 대차게 꼬여버렸다.
마르타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애초에 마르타에게 그걸 털어놓은 이는 엘레니아 본인이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이스케가 그걸 어찌 받아들일까.
엘레니아는 아버지만큼이나 근래의 오빠의 변화가 영 적응하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루드베키아와 사이가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그랬다.
그녀 자신조차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 문제를 제대로 논하려면 어머니 얘기까지 꺼내야 할 판이었다.
그게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일단, 자리를 좀 옮기고…….”
“왜? 난 여기가 좋은데. 저것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난폭함이 어수선하게 깔린 이죽거림이 새삼 낯설었다.
엘레니아는 그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장과 호위기사들은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쓱한 낯으로 그녀를 열렬히 바라볼 뿐이었다.
“……멋대로 오해하지 좀 마. 내가 루비랑 약속한 문제라고. 그걸 아랫것들 앞에서 떠들 수 있을 것 같아?”
“그거 놀랍네, 이미 떠든 줄 알았는데.”
“그건……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오빠 루비한테도 맨날 이렇게 비아냥대는 건 아니지?”
급기야 그녀는 짜증스럽게 톡 쏘아붙이며 무작정 오래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새삼 양심이 찔리기라도 한 건지 어쩐 건지, 다행히 이스케는 더는 무뢰배처럼 굴지 않고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