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36)

* * *

“……오빠?”

저택 안으로 되돌아와 처소로 향하는 길에 엘레니아와 마주쳤다. 비단 엘레니아뿐만 아니라 아버님도 함께였다.

막 서재를 나서다 말고 나란히 우리를 돌아보는 부녀의 모습에 멍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걸까? 내 얘기를 한 걸까?

언제나처럼 무표정하던 엘레니아의 낯에 이루 형언할 길이 없는 동요가 어렸다.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된 채 남편 놈에게 실려 오는 내 꼴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아버님 또한 경악한 표정을 애써 감추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밀려오는 수치심에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으며 남편 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오빠 대체 루비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질문의 요가 좀 이상하군.

힐끔 보니 이스케는 아주 가관인 표정이 되어 있었으나 그럼에도 성큼성큼 지나치며 한결같이 싹수 없이 대꾸했다.

“결혼했습니다만.”

“뭐……?”

대답의 요 또한 마찬가지로 이상하다.

하여간 이 가족도 참 묘하다니까.

그나저나 엘레니아는 내가 하녀장을 때린 걸 지금쯤 알았으려나.

후회하는 건 아니다만, 막상 얼굴을 보니 괜히 입맛이 쓰네.

이젠 돌이킬 수 없지만 말이야.

* * *

“어서 들어.”

달빛이 들이치는 발코니를 등지고 앉아 드는 야참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인가.

벽난로에서 탁탁 타오르는 녹색 성화는 금방이라도 무시무시한 늑대인간을 소환시킬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는 늑대인간 따위와 비교도 안 되는 괴수가 있었다.

거품이 인 따스한 코코아의 향기가 달콤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티스푼을 쥐고 동동 띄워진 마시멜로부터 골라내는 동안 이스케는 내 앞에 앉아 건틀렛과 경갑 끈을 풀고 대충 벗어 던졌다. 그렇게 막 팽개쳐놔도 되는 거니?

“당신 잔에 든 건 뭐예요?”

“그냥 당밀주야.”

그렇구먼. 나는 술을 음미한다기보다는 무슨 청량음료 들이켜듯 꿀꺽꿀꺽 당밀주를 넘기는 놈의 도드라진 목울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가, 불쑥 질문했다.

“저도 그거 마셔봐도 돼요?”

이스케는 잠시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군소리 없이 고블릿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별안간 무슨 충동이 일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언젠가 신전에서 마주한 프레이야의 모습이 떠오른 탓인 듯했다.

그리고 그때 이스케가 했던 말도.

맨날 자기 거 뺏어 마시려고 한다고 했었나…….

하, 뭐? 유치한 감정놀음엔 관심이 없으시다고?

어쨌든 그렇게 두툼한 유리잔 속에 찰랑대는 꿀색 액체를 보란 듯이 냅다 들이켠 나는 즉시 후회하고 말았다.

으으, 역시 난 술이랑은 안 맞는다.

게다가 뭐 이렇게 독해. 이런 걸 그렇게 잘도 들이켜다니 하여간 독한 놈일세.

“입맛에 안 맞는 모양이네.”

“잠깐 음미 중인 거예요. 저도 술 잘 마시거든요.”

“…….”

“…….”

어색하게 흐르는 정적 속에서 나는 그만 고블릿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고작 두어 모금 마셨는데 벌써 속이 타는 것 같다.

빈속이라서 그래, 빈속이라서…….

“향기만 붙이는 정도면 괜찮겠지.”

웬일로 이죽대는 대신 나직하게 중얼거린 남편 놈이 고블릿을 도로 가져가더니 내 코코아 잔 속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오호라, 이것도 나쁘지 않구나.

애초에 술 마시는 게 목적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술이 있으면 레틀러한테 말해둬. 준비시켜 놓게.”

“딱히 술 마시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그럼?”

“그냥, 당신이 마시는 게 궁금해서……. 오늘은 뭐 하셨어요?”

“글쎄, 고블린 몇 마리 잡은 거 말고는 한 일이 없네. 요즘은 따분할 만큼 평화로워서, 이럴 때 서리 늑대라도 또 몰려와 주면 다들 흥분해서 헐레벌떡 뛰쳐나갈걸.”

그럴듯하다. 고블린 몇 마리 잡은 건 일도 아니시구나.

당밀주의 알싸한 향이 도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자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퍼져갔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다.

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코코아를 마시면서 맞은편을 힐끔힐끔 쳐다보니, 이스케는 피곤한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는 낯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또 뭐가 궁금하실까.”

“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만 있잖아.”

“그냥…… 참, 다들 말이 많던데 역시 이번 검투 대회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왜, 안 했으면 좋겠나?”

“아뇨, 아뇨, 단지 굉장히 위험하다고 들어서…….”

행여나 경기용 마물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황급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스케는 그런 나를 조금 묘한 눈으로 바라보나 싶더니 툭 내뱉었다.

“그런 데 나오는 것들은 네 가출 친구들 같은 종류랑은 좀 달라.”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서리숲에서 만난 녀석들이랑은 궤를 달리하는, 아직 본 적 없는 스타일의 마물들이라는 거 말이다.

예선에서 오우거와 트롤 등이 날뛰고 정신 공격과 환각계의 언데드들까지 동원됐던 장면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역시 상위 중의 최상위는 서리용일 것이었다.

그 녀석이 종적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더 걱정되는걸요. 물론 당신은 이미 한번 최종 우승까지 하셨…….”

“그렇다 해도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네?”

이스케는 다소 무심한 몸짓으로 술잔을 내려놓고는 새하얀 초콜릿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잡소리 그만하고 먹으라는 건가?

이거 먹고 얼른 본론이나 털어놓으라고?

“서리 늑대 눈빛만 보고도 무슨 일인지 눈치챘을 정도인데, 널 관중석에 앉히는 일을 막을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는 편이 낫겠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데 좀 걸렸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상대는 마물들이었다.

몇몇이 내 친구가 되었다 해도 전부 그렇진 않았다.

야생 동물 따위에 비할 수준도 아니라는 거, 순전히 일방적으로 사냥당하는 불쌍한 피조물들이 절대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았다.

야만적인 검투장에서 걱정해야 할 대상은 참가자들이지 울부짖는 마물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무엇보다 내가 이번 대회에서도 신기록을 세우고 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한들 누구도 감히 네게 허튼수작 부릴 엄두 못 낼 거라고 장담해.”

농담조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따라 웃을 뻔했다.

아아……. 이러지 마, 이놈아!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참가 이유가 고작 그거라니, 말이 안 되잖아.

고작 나 때문에, 마물로부터 북부인을 지키는 것이 목표인 최고의 성기사가 고작 그런 이유로…….

문득 그가 여태껏 왜 내가 다른 종류의 마물들과 접촉하는 걸 막았는지, 아이반 경 등이 나를 몰래 서리 늑대들에게 데려갔을 때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이해가 갔다.

비단 불분명한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포포가 고블린이었다면, 나는 조금 전 그가 고블린을 잡았다고 했을 때 내심 동요했을 것이었다.

북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속으로는 그랬을 것이었다.

내 원인도 한계도 불확실한 재주의 정의가 빌어먹게도 단순 통역이 아니라 교감인 이상, 마음이 조금 아픈 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이스케는 그걸 짐작하고서 최대한 나를…….

“이스.”

“음?”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내 심보도 참 고약하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원.

“퓨리아나 영애께서 제 분수를 알려주신다며 스스로 찻물을 끼얹은 거예요.”

“……뭐?”

“그리고 하녀장이 아까 비슷한 말을 해서, 저도 모르게 뺨을 때렸어요. 일을 크게 만들어서 면목이 없…….”

“잠깐, 잠깐만.”

다짜고짜 던져진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그가 미간을 좁히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는 목구멍에 낀 묵직한 덩어리를 애써 삼켰다.

처음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과연 정말로…….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봐. 걔들이 뭘 어쨌다고?”

서두르지 말아?

당혹감이 약간 밀려왔으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결코 그러려던 거 아니었는데, 제가 요즘 기고만장하게 보였나 봐요. 영애께서 저더러 과신은 금물이라고 하시면서 제대로 알려주신다고 들고 계셨던 찻잔을…….”

“루비.”

“네?”

“또 허겁지겁 결론부터 말하고 있잖아. 아까도 그러더니만.”

그럼 결론이 중요하지 미주알고주알 쫑알대서 좋을 게 뭐가 있나?

머뭇거리며 시선을 바로 했다.

이스케는 의외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다만 달빛 때문일까, 붉은 눈동자가 프리즘 조각처럼 다채로운 빛깔을 냈다.

그 복잡다단하고 알 수 없는 눈, 고문에라도 시달리고 있는 듯한 눈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시려 왔다.

“아까 아이반 놈한테 대충 전해 듣긴 했다만, 이러든 저러든 내겐 너 말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으니 떠오르는 대로 말해봐.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 성질 급한 놈이 취하기라도 한 걸까? 황당하기 짝이 없었으나 야생마처럼 날뛰던 가슴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 버릇의 문제인 걸까?

단순히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힘들다.

중간에 다그치거나 화를 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좀 더 제대로 처신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왜 그리 멍청하게 굴었냐고 질책당할까 봐 최대한 생략하는 게 평생 버릇이 되어버린 듯해.

“이스, 진짜 저 말고 아무것도 안 중요해요?”

“……그래. 진짜.”

“그럼 제 소원도 들어주실 수 있어요?”

이스케는 자꾸만 딴소리를 해대는 나를 다그치는 대신에, 고개를 약간 갸웃하더니 이내 픽 미소를 지었다.

얼핏 장난스럽게 연기하듯이.

“못 할 이유가 없지.”

“뭐든지요?”

“뭐든지 말만 하셔, 의심 많은 공주님.”

“그럼, 저한테 질리지 말아주세요.”

“무슨 소원이 그 모양이람.”

나긋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난다는 듯한 어조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이게 찰나에 불과하다고, 당신이 잠깐 눈이 먼 것뿐이지 언젠가는 제게 질리고 말 거라고…….”

“프레이야가 네게 한 말이 그런 헛소리였나?”

“…….”

“걔가 정말로 그런…… 가만 보자, 조금 전에 하녀장이 비슷한 소릴 지껄여서 뺨을 쳤다고 했었지.”

“물론 제가 확대해석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날 고문하고 사지를 찢는구나, 아주.”

낮게 흘러나오는 으르렁거림에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이유가 순전한 공포 탓인지 그가 앞으로 할 행동 탓인지 모르겠다.

의혹과 분노로 지옥의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이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사신의 그것 같았다.

“대체 왜 그따위 망발을……. 그리고 너는 그 헛소리가 제법 그럴싸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황급히 머리를 필사적으로 흔들자 활활 작열하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아이고, 내 심장아.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소원이랍시고 그런…….”

“다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당신을 옛날부터 오래 알았던 사람들이니까, 전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보니까, 그만 저 자신에 대해 확신이 안 섰어요.”

“확신……?”

게슴츠레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사린 야수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풍경.

어어, 이거 위험한데…….

“확신이라.”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의 숨도 내쉬지 않았다.

그가 표범 같은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는 동안 머릿속에 빨간 경고 불이 깜빡거렸다.

“뭘 어떻게 해줘야 확신이 서려나.”

“…….”

“네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들마다 잡아서 두 번 다시 나불대지 못하게 혀를 뽑아버리면 되려나?”

얘가 지금 무슨 무시무시한 소릴 하는 거야.

주인공 놈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허튼소리로 안 들린다.

정신 차려, 이놈아! 그것들은 네 오랜 친지들이라고!

슬프게도 말이다.

“그런 짓 하시면 큰일 나요.”

“큰일? 무슨 큰일?”

머리 위에서 울리는 비죽한 웃음기가 밴 음성이 여느 때보다 더 섬뜩했다.

차라리 고함을 치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저 때문에 당신이 싸우시는 거 바라지…….”

“남편이 아내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건 장려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면 가문끼리도 사이가 나빠지고 자칫 내전이…….”

“내전 일어나라고 해. 전부 가루나 되라고 하지 뭐.”

“이스…….”

“브리타냐고 로마냐고 죄다 잿더미로 만들고 나면 네가 조금이라도 덜 불안해할까.”

“…….”

“음? 말해봐. 어떻게 하면 네가 더는 숨어서 우는 짓 안 할지?”

숨어서 울어?

나는 등받이를 움켜쥔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올려다본 이스케의 눈은 잔뜩 일그러져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이 못 견딜 정도로 괴롭다는 듯이.

또 힘들어? 또 뭐가 그렇게 힘든 거야.

손을 뻗어 그의 눈가에 가져다대 보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제가 문제인 거예요.”

“…….”

“제가 이 모양이라서……. 뭐든 자신이 없어요. 당신 덕분에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언제 꿈이 깨질까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가을 오후를 물들이는 붉은 황혼처럼 따스하게 나를 안아줄 이는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살로 낳은 부모조차 버린 존재니까.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단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저주받은 영혼이니까.

내가 그토록 죽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이미 한 번 겪은 고통 때문만이, 프로펠러로 빨려들어 가던 순간의 기억 때문만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너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꿋꿋이 일러주는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보이고 싶었다.

온 세상이 죽어 나가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또 죽는다면, 그땐 또 다른 세계에서 또 같은 운명과 굴레가 씌워져 살게 되겠지.

그런데 너랑 있으면 그런 기분이 안 들어.

너랑 있으면 내가 그런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 것 같아.

너랑 있으면 내가 진짜 공주라도 된 것 같아.

고귀하고 사랑받는 공주가 된 것 같아.

비록 언젠가 네가 내 정체를 알고 더는 나를 원하지 않게 된다 해도, 더는 나를 그런 꿈결 같은 눈빛으로 봐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부모님들과 다른 모든 부모님과 똑같이 어긋난다 해도…….

“제 말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침묵이 내렸다. 사납게 요동치며 내 눈을 응시하는 붉은 눈은 언젠가 서리숲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았다.

왜 이런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알던 냉담하기로 작심한, 금욕적이고 무자비한 주인공은 어디로 갔는지, 내 눈을 이토록 간절하게 들여다보는 이 낯선 남자는 누구인지, 새삼 비현실적인 기분이 피어올랐다.

이스케가 굳은살 박인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 그 순간에 되돌아온 현실 감각이 나를 아프게 찔러왔다.

“나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고작 그런 소원이라니 너무하지 않나.”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바보같이 이런저런 걱정이 들어서 그만…….”

“그래, 진짜 바보가 따로 없군. 나는 언제나 네 편인데 말이야.”

언뜻 절박하게 느껴질 만큼 단호한 어투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일 정도였다.

마치 내가 아주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픈 마음에 부러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이죠? 제가 엄청나게 잘못해도 제 편 하시기예요?”

“……부부는 일심동체라지. 난 원래 항상 적반하장이고.”

강퍅하게 경직된 눈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농담하는 건가?

나는 머뭇머뭇 웃으며 내 뺨에 댄 남편 놈의 손을 잡았다.

그의 머리가 천천히 내려와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었다.

“근데 그러다 제 버릇이 나빠지면 어떡해요?”

“희한한 걱정이 많네. 공주님께서 버릇 좀 나쁜 게 대수인가.”

“하지만 전 진짜 공주도 아닌걸요.”

“너 진짜 공주 맞잖아.”

“그건 그냥 로마냐에서, 거기서도 공식적으론 그냥…….”

아무리 대우받아도 결국은 그냥 교황의 사생아일 뿐.

그건 나도 엔죠도 체시아레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태생의 낙인만큼은 우리 셋 다 공평했다.

게다가 나는 교황의 친딸이 아닐 거라는 의혹도 있으니, 원.

“너만 한 크기의 여자애가 비만 도마뱀이랑 외도하는 소설 제목이 <가출한 공주> 아니었나.”

“……<납치당한 공주>거든요? 용이 공주를 납치한 내용이라고요.”

“그런가? 안 읽어봐서.”

네놈이 그런 동화를 읽어봤다면 그것대로 신기할 노릇이겠다.

그놈의 외도 타령은 아주 그냥 입에 붙었나 보구나.

뭐, 나도 소원이랍시고 열 받게 했으니 할 말 없지만.

무슨 생각인지, 이스케는 내가 털어놓은 일에 대해 더는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고 있었으며 따라서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이대로 족한 걸까?

오랜 친구가, 충직한 가신이 어쩌다 나와 그런 불미스러운 소동을 일으켰는지 앞뒤 정황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걸까?

그러다 이내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까지 내게 한 말들과,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한 달콤한 간질임에 사로잡혀서 내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비록 찰나의 꿈결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긴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두피를 훑는 야릇한 감각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이스, 우리 그만 씻을까요? 저 머리 감겨 주실래요?”

그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휘었다.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

“아까는 나 때문에 살 붙을 틈이 없다더니.”

“얘, 얘기가 왜 또 그렇게 흘러가요?”

남편 놈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나는 샐쭉해졌다.

맙소사, 까칠한 금욕주의자께서 이런 혈기왕성한 색마로 변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동안 대체 어떻게 그리 꿋꿋이 순결주의를 지향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나아가 그의 변화가 단순히 첫 상대라 그런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상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또 그런 소원이나 빌면 다음부터는 안 씻겨줄 거야.”

환상에 빠진 눈으로 변했을까.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줄리엣을 만난 로미오처럼, 술람미 여인을 찾은 솔로몬처럼 이렇게,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눈이 되었을까.

나는 몸을 바로 하고서 발꿈치를 세우고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되돌려주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내 뺨을 쥐고 혀와 혀를 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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