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녁 식사 후엔 운동 삼아 짧은 밤 산책을 하고 목욕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었다.
오늘은 로냐와 루실에게 일찍 쉬라고 이르고는 혼자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비장하게 마음을 다진 것이 무색하게도, 색색의 등화가 밝혀진 아름다운 물의 정원에 혼자 들어서자마자 걱정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아, 보석 창고 열쇠가 문제가 아니었어.
여기도 뺏기는 거 아니야?
이스케가 언제 귀가할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이맘때쯤 나타나기도 했고 어떨 때는 내가 잘 준비를 할 무렵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꼬박꼬박 일찍 돌아오는 편이었다.
“후우…….”
오랜만에 토해서 그런지 속이 욱신욱신 따끔거렸다.
딱히 오랜만이라 하기도 뭣하지만 그래도 요즘엔 가급적 자제하려 애쓰는 편이었는데, 위한테 좀 미안해지는군.
이스케도 이스케지만 엘레니아도 걱정이었다.
이제부터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하녀장이 옳았다고 확신하리라.
기껏 좀 친해진 것 같아서 내심 기뻤는데, 짧고 아름다운 허상이었다.
게다가 엘레니아는 여태 알게 모르게 날 도와준 일이 많았기에 더더욱 서글펐다.
만일 엘레니아가 나를 죽은 공비와 같이 ‘이상해졌다’고 단정 짓는다면, 그리고 내 안 좋은 습관을 가족들에게 말해버린다면 그것도 암담하다.
막말로 안 좋게 떠난 망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나.
나는 바로 앞에 시원한 폭포 분수대의 모습이 잘 보이는 벤치로 다가가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담긴 유리통을 무릎에 놓고 앉았다.
이곳에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양껏 봐둬야겠다.
구슬프군, 여기서 엘레니아랑 뱃놀이할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에잇, 정신 차리자, 정신! 어떻게든 상황을 돌파할 생각을 해야지.
그나마 더는 쉬이 결혼 취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좋아, 곧 들어가서 깨끗이 목욕재계를 하고 남편 놈을 기다리는 거야.
나한테 올 때쯤이면 이미 아이반 경이나 엘레니아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은 뒤일 테지만, 먼저 자진해서 털어놓는 척해야겠지.
뭐라고 변명하면 되려나, 그냥 당신이랑 너무 친해 보여서 갑자기 질투가 나서 그랬다고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원작의 루드베키아 같은 낌새는 금기로 여겼으나, 맨날 같이 밤을 불태우는 요즘이라면 그런 유치한 이유가 기고만장해졌다 여겨지는 것보다는 되레 나을 것이었다.
일단 이유는 그놈 분위기 보고 정하자.
아까 거짓말했다고 더 혼날지언정…….
음, 갑자기 심장이 매서운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하는구나.
맞다, 그놈 거짓말 엄청 싫어한댔지.
내 무덤을 내가 팠다, 팠어.
하지만 이젠 어쩌랴.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혼나더라도 싹싹 빌고 오늘의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
그런 다음 엘레니아에게도 같은 해명과 함께 열심히 싹싹 빌고, 그러고 남매가 보는 앞에서 프레이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척하면 그럭저럭 무마되지 않을까.
물론 나도 자존심은 있기에 나를 또 한 번 이딴 상황에 몰아넣은 프레이야에게 사과는 무슨 입에 독 사과를 쑤셔 넣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자존심 따위에 휘둘려 여태 열심히 쌓아온 이미지를 망칠 순 없는 일이었다.
남편 때문에 질투 나서 심술을 부렸다는 유치한 이유는 잘 말하면 철부지 바보 공주님 이미지랑도 걸맞으니까.
문제는 이 계획대로 무사히 잘 넘어간다 해도 앞으로 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거라는 건데, 프레이야가 오늘 내게 털어놓은 야심 찬 경고를 가늠해 보면 앞으로도 또 나를 이렇게 곤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오늘같이 유치하고 사소한 일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리라.
그녀의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내가 걸림돌이라는 건 너무도 명백했다.
거참, 나를 물리치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고향의 번영을 위해서라니 이 얼마나 숭고하기 짝이 없는가?
참으로 숭고하게 음흉한 년일세. 이젠 그 독살 기도 사건이 프레이야의 자작극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해결한 뒤…….
“마님.”
뜻밖의 목소리에 나는 멍하게 시선을 돌렸다.
뒤이어 장대처럼 꼿꼿하고 장엄한 체구의 사용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 뒤로 바짝 빗어 올린 머리카락과 돌덩이 같은 엄한 밤색 눈의 여인.
최근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던 하녀장이었다.
별안간 그녀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엘레니아가 나를 찾는 건가?
“여기 계셨군요, 마님.”
예의 그 한 점의 온기도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하녀장의 표정은 무감 그 자체였다.
문득 긴장이 밀려왔으나 나는 내색지 않으려 애쓰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서 마님이 식사를 다 끝마치셨는지 확인하라 하셔서 말입니다.”
그건 루실이나 로냐를 통해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려는 찰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아가씨께서 어린 소녀였을 시절부터 돌봐드려 온지라, 종종 남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도 제게만큼은 털어놓곤 하십니다.”
“…….”
“아가씨께선 아마 그럼으로써 제가 마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리라 여기신 듯합니다만……. 실은 저도 초반에 눈치채고 있었긴 합니다.”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바로 감이 왔다.
내 거식증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엘레니아가 그걸 하녀장에게 말했을 줄은 몰랐다.
말했다 해도 딱히 엘레니아를 탓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녀장은 엘레니아에게 있어 친모보다 더 가까운 유모이니까.
게다가 지금 하녀장이 하는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나쁜 의도로 털어놓은 것도 아닐 터였다.
단지 하녀장이 그 일을 엘레니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무슨 얘기를 뜻하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이 미천한 것이 마님의 개인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한다고 노여워하시겠지만요.”
정말로, 오늘이 날은 날인 모양이다. 다 같이 작당이라도 한 걸까?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자 하녀장은 잠시 기다렸다가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가씨께서 마님께 돌아가신 큰마님의 이야기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물론 그 시기에 아가씨께서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는 말 못 하셨겠지요.”
하녀장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목덜미에 사늘한 감각이 일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나는 그 당시 가신 중 오메르타 공비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봐왔을 하녀장이 공비에게 안타까운 감정을 품었으리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이제 보니 전혀 딴판인 것 같다.
신경질적인 미소에 묻어나오는 감정은 연민도 그리움도 아닌 비난에 가까웠다.
하긴, 그래. 하녀장은 엘레니아의 유모였지 공비의 유모가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대체 얼마나 제 아가씨를 끔찍이 여겨야 그럴 수가 있는 걸까.
충복으로선 정말 최고라고 해야 하나.
여기 인간들은 정말 하나같이 충심이 대단하구먼.
최고의 유모께선 이제 퍽 도전적으로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의 숨도 쉬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아가씨께서 또다시 그때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는 거 바라지 않습니다.”
“…….”
“비단 그러한 습관뿐만 아니라 이상행동으로 주변 분들과의 관계까지 망치는 것조차 어쩜 그리……. 이 성의 안주인들께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이거야 원 완전히 정신병자 취급이군.
티파티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날 찾아왔으리란 건 내심 짐작했지만…….
실로 무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하녀장은 되레 내가 제 따귀를 치기를 바라는 듯 몸을 내 쪽으로 수그리는 여유까지 부렸다.
내가 약이 올라 야단법석을 떨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하여 이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님. 부디 떠나시는 날까지 아가씨께…….”
“떠나? 내가 어디로 떠나?”
내 입도 오늘따라 아주 제멋대로다.
불쑥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내 귀로 듣기에도 기괴할 만큼 명랑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이리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밤색 눈동자가 비웃음으로 반짝였다.
“그 누구보다도 마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기가 문제일 뿐이지 언제든 이 성을 떠나실 분이란 거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 경력이 좀 화려하긴 하지. 그래도 정식 부부가 된 건 처음인걸? 신성한 약언까지 맺은 마당에 내가 어디로 가겠어?”
“마님께선…….”
“걱정 마, 너희가 혀가 다 빠져나오도록 빌어도 내가 여길 떠날 일은 없으니까.”
무슨 주문이라도 걸린 듯,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멋대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내 얼굴을 아까의 프레이야와 비슷해 보이는 표정으로 응시하던 하녀장이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첫정이란 달콤한 꿈결 같은 법이지요. 도련님께서 요즘 보이시는 모습은 저조차 낯설 지경이니 마님께서 든든하실 법도 합니다.”
아! 이젠 이 여자마저 첫정 타령인가? 대체 이놈의 북부인들은 그놈의 첫정 타령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그래봤자 결국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찰나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특히 도련님 같은 분께는요. 마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결국에는 이 성의 안주인으로 누가 가장 적절한지 깨닫게 되실 겁니다.”
침묵이 흘렀다.
싸늘하고 뒤틀린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하녀장은 내 반응을 기다리며 유유자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내가 영 반응할 기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하녀장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발걸음이 실로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녀가 뜻하는 성의 안주인으로서 가장 적절한 이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에 비해 나는 이 고귀한 땅에 침입해 온 정신병자일 뿐일 터였다.
부패한 교황의 여식답게, 더럽고 추악한 가문의 일원답게 말이다.
그러니까 알고 있다고.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왜 다들 자꾸 나서서 일깨워 주려고 안달들이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일전에 벌어진 그 모든 일도 전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정말로 얌전히 지내려고 했는데.
왜 자꾸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내 친정 문제만으로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헛웃음이 나오면서 갈비뼈 안쪽이 세차게 울렁거렸다.
그래. 그래.
하나같이 안달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놈의 첫정 운운이라니 어지간히 불안하긴 한가 보다.
날 위해 하는 말이라는 변명도 그토록 자가당착적일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한 게 뭔지 자기들이 어찌 안다고.
정말로 그냥 쥐 죽은 듯 지내려고 했는데.
살 수 있다면 어찌 되어도 좋다고, 공자비 자리든 뭐든 전부 원하는 대로 넘겨주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고 납작 엎드려서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조용히 살려고 해도 이것들이 안 도와주네.
하긴, 어차피 내가 뭘 해도 꼬아서 보는 인간들 천지인데.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들 천지인데.
내가 아무리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입증해 보여도 마물들과 관련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하나같이 마음대로 단정 짓고 손가락질해댈 텐데.
남편이든 마수들이든 이유가 뭐가 됐든 내게 잘해 주는 것들 믿고 기고만장한 게 뭐가 대수겠나.
첫정이 그토록 무서운 거라고?
그 금욕주의자가 내게 동정을 바쳐서 잠깐 넋이 빠진 것뿐이라고?
그래, 너희가 이렇게 대놓고 불안해할 정도로 우리의 주인공께서 넋이 빠져 있을 정도라니 내가 출세하긴 했나 보구나.
그놈의 첫정 내가 영혼까지 털어서 이용해 주지.
어차피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 인간 아닌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이 아예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 자신을 벗어나 바깥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고통이 너무 크지만 않으면 잘해낼 수 있었다.
이러든 저러든 고통받을 육체이니 뭐.
그래도 그간 쌓아온 이미지가 아주 쓸모없을 것 같진 않구나.
“이봐.”
벤치에서 일어나며 명랑하게 부르자 몇 발자국 떨어진 참이던 하녀장이 멈칫 돌아보았다.
나는 지체 없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찰싹, 하고 울리는 파공음이 날카로웠다.
내 손끝이 다 얼얼한 느낌이다.
난데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하녀장은 일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크게 벌어진 밤색 눈동자의 모양새가 아주 볼만 했다.
“지금…….”
“왜? 내가 이러길 기대한 거 아니었니?”
“무, 무슨…….”
“나한테 맞고 싶어 했잖아. 계속 궁금했던 건데, 혹시 여자 좋아해?”
멍하게 나를 노려보던 하녀장이 이윽고 천천히 입꼬리를 당겼다.
오오, 참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무시무시한 미소였다.
“그리 가여운 척하시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아가씨께서 아신다면…….”
“원하는 걸 얻었으니 얼른 가서 일러바치렴. 일개 하녀장 따위가 감히 신성 로마냐의 딸인 내게 안주인의 자격 운운하다니, 혀를 잘라버려도 모자랄 걸 엘렌을 봐서 봐준 거란다.”
“아가씨께선…….”
“내가 진짜 네 혀를 자르겠다고 야단을 떨면 꽤 시끄러워질 텐데. 이제 보니 내 출신도 죄다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내가 설령 별 시답잖은 이유로 하녀장의 따귀를 후렸다 한들 엘레니아가 나를 질책할 권한은 없었다.
속으로야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체 언제부터 진실한 우정 같은 사치를 바랐나.
바보같이 조금 기대하긴 했었으나 이젠 그것도 끝이다.
게다가 애초에 여기 가신들이 내 편이 되어줄 거란 건 기대조차 안 했다.
물병 안에 몰래 모래 타 놓는 인간들에게 뭘 바라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엿같이 구니 엿같이 굴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야 마땅하리라.
하녀장은 무섭게 얼어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나 싶더니 이내 홱 돌아서서 후다닥 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나대로 발걸음을 돌려 폭포 분수대 가까이 다가섰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라 수로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하다.
일전에 저 인간 때문에 남편 놈 생일 연회에 그 창피 당했던 거 생각하면…… 젠장, 뭐, 가여운 척?
진짜 가여운 척이 뭔지 보여주지.
후, 갑자기 포포가 간절히 보고 싶어지네.
그리핀이랑 고약한 용 녀석도.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내가 하녀장을 때린 사실을 들으면 엘레니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이스케도.
하하, 틀림없이 아주 볼만하겠지.
“날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멋진 옷을 입고 서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자기야…….”
세차게 뛰는 가슴도 진정시킬 겸 덤불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란 루드베키아와 붉은 장미. 침대에 뿌려놓으면 참 볼만할 것 같은데…….
“루비?”
입구 쪽에서부터 불쑥 물소리를 찢고 들려오는 음성에, 열중해서 꽃다발을 엮던 참인 나는 하마터면 벌러덩 주저앉을 뻔했다.
아, 진짜, 여기 것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아무 기척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냐고!
기척을 냈다 한들 내가 너무 생각에 과몰입한 탓에 미처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설마 벌써 귀가했을 줄이야!
“여기 있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순식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덧 로즈마리와 라벤더 덤불이 우거진 산책로를 기어가다시피 뚫고 인형의 집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스케가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빠른 템포의 힙합처럼 쿵쿵 질주했다.
반딧불이 통까지 벤치에 고스란히 두고 온 마당에 내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숨어서 뭐 어쩌자고?
“……희한하네.”
희한하긴 네가 제일 희한하다, 이놈아!
미치겠네, 이제 와서 다시 나갈 수도 없고 어쩌면 좋지?
인형의 집 다락방에 앉은 퀴리 부인이 득의만면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저놈이 나갈 때까지 숨어 있다가 슬쩍 빠져나가서 잽싸게 내 침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나는 퀴리 부인과 눈싸움을 하며 최대한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기울였다.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근처를 스쳐 가나 싶더니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나간 걸까? 나갔을까?
“……꺅!”
그야말로 경고도 없이 머리 위에서 울린 덜컥, 하는 거친 소음에 나는 그만 화들짝 소스라쳤다.
이윽고 아리따운 온실 정원의 유리 천장과 더불어 인형의 집 지붕을 들어 올린 채 물끄러미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편 놈의 낯짝이 보였다.
게슴츠레 뜬 붉은 눈에 절절한 황당함의 빛이 번졌다.
대관절 어떻게 내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바로 알아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공황에 빠져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스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해?”
“……숨바꼭질해요.”
“술래가 누군데?”
“바로 당신이지요.”
헤실 입꼬리를 당기는데 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아, 혀를 그냥 확 깨물어 버릴까?
오늘따라 내 주둥이가 재앙의 주둥아리로 변한 거 같아.
원목 지붕을 던지듯 수풀 위에 내려놓은 이스케가 이제 손을 털며 삐딱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설마 이대로 날 여기 쑤셔 박은 채 푸닥거리를…….
“그래서 보상은?”
“네?”
“내가 찾았잖아. 보상은?”
당혹감이 밀려왔다. 위대한 북부에선 숨바꼭질 놀이에서조차 보상을 따로 챙겨줘야 하는 법인가 보다.
하여간 탐욕스러운 종자들.
“그건…… 바로 제 진심이 담긴 입맞춤이랍니다.”
“고작?”
뭐? 고작? 고오작? 이 야박한 새끼가!
“실은 키스예요.”
“얼른 줘, 그럼.”
내 무덤을 자꾸만 내가 판다, 내가.
도살장에 제 발로 들어가는 병아리가 된 심정이었으나 부질없이 웅크린 몸을 슬며시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키스라니 참으로 낭만적이군.
내가 슬그머니 까치발을 들며 그의 우람한 어깨에 팔을 걸치는 동안 이스케는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신에게 키스하는 기분이란.
나의 사신은 검은 판금 갑옷을 걸치고 땀과 흙먼지에 절은 성기사였다.
가까스로 입술을 맞대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몸을 떨어뜨리는 찰나였다.
거만하게 제 보상을 쟁취하고 있던 남편 놈이 대뜸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내 어깨를 붙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겁했다.
“이게 뭐야?”
“보, 보상…….”
“진심이 담긴 키스라며?”
“진심 담긴 거 맞아요!”
“웃기지 마, 내가 평소에 너한테 이렇게 키스했나?”
이건 또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란 말인가?
그럴 상황이 심히 아님에도 불구하고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럼 당신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투박한 손이 내 머리를 붙들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온실 정원의 포근하고 향기로운 공기 속에서 내 입술을 아찔하게 내리누르는 입술에 숨이 막혀왔다.
“후우, 대체 왜 여기 숨은 건지 원.”
한참 만에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떨어뜨린 녀석이 이제 낮게 투덜거리면서 양팔을 뻗어왔다.
나는 그만 어리둥절했다.
얘 설마 아직 아무 얘기 못 들은 건가?
“제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오메르타 성의 비밀이다. 숨바꼭질할 장소가 따로 있지, 여기서 잠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아니면 날 시험하는 중인가?
먼저 자진해서 고해성사할 기회를 노리는 거?
젠장, 하여간 어려운 새끼.
“저어, 식사는 하셨어요?”
그가 머리를 흔들며 나를 안아 든 팔을 추슬렀다.
별 가루를 뿌린 듯한 은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대충, 너랑 같이 야참 들까 해서.”
“아…….”
“무게가 변함이 없어. 좀체 살이 오를 기미가 안 보이잖아, 제대로 먹고 있는 거 맞아?”
“하지만 당신 탓도 있는걸요.”
“뭐?”
루비색 눈이 실로 볼만하게 휘둥그레졌다.
나는 하마터면 혀를 질끈 깨물어 버릴 뻔했다.
아이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주둥이가 멋대로 노는 게야!
“방금 한 말 다시 해봐.”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닌데. 말했는데.”
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다 못해 검붉게 변하는 것 같다.
내가 미쳤지,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나?
요즘의 나 같은 밤을 보내는 인간이라면 매일 쿠키 반죽을 대접째로 들이켜도 살이 안 붙을 것이었다.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면, 내 남편이란 녀석은 첫정에 휘둘려 어쩔 줄 모르는 수줍은 풋내기 같은 타입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나조차 버거운 상대였다.
미친 듯이 야만적이며 동물적인 남성미를 자랑했고, 나를 압도하다시피 집어삼키는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큰일이네, 그럼. 오늘부터 손만 잡고 자야 하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면? 무슨 뜻인데? 난 우아한 남부식 화법에 익숙지 못해서 직설적으로 설명해 줘야 알아듣는다고.”
설령 그런 의미였다 해도 진짜 손만 잡고 잘 양반도 아니면서 잘도 떠든다.
나는 그만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파묻어 버렸다.
진짜 아무 얘기도 못 들은 걸까?
그러니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겠지?
“루비?”
짓궂게 이죽거리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
“무슨 일이야, 또 나 몰래 사고 쳤어?”
내가 애냐? 차라리 진짜 사고를 친 거라면 좋았을 텐데.
뭐 치긴 친 셈이구나, 엘레니아의 충복을 때렸으니.
“아뇨, 그냥…… 반가워서요.”
“반가워서 숨는 건 남부식 전통이고?”
“……제가 방금 창조했어요.”
“그렇군. 그래서 숨바꼭질 좋아하는 공주님은 오늘 하루가 어떠셨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등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달래듯이 살살, 마치 안심시키는 것처럼.
별안간 뒤틀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래, 그놈의 첫정인지 뭔지 무섭긴 무섭구나, 잘나신 주인공께서 악녀를 다그치는 대신 기분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다니, 확실히 넋이 제대로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다.
“그냥…….”
“그냥?”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뭐……?”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때처럼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맞닿은 몸이 일순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내 등을 쓸던 손길도 멈칫했다.
찰나의 순간 떨리는 숨결에서 기이한 당혹감이 묻어났다.
역시 아무 얘기도 못 듣고 온 게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왜…….
“루비.”
“어차피 안 믿으실 거 알아요. 그래도 전 거짓말 안 해요.”
“……루비, 고개 좀 들어봐.”
“실망시켜 드려 면목이 없어요. 창고 열쇠 돌려드릴게요.”
호흡이 가빠지면서 눈물의 댐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아까 하녀장을 친 손끝이 욱신거리면서 심장이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이젠 되돌릴 수 없다.
이대로 나를 바닥에 내던져버린다 해도 결국에는…….
결국에는 넌 내가 필요하잖아.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머리로든 몸으로든.
지금부터는 정말로 신중해져야 했다.
이런 감정, 이런 기류의 상대는 나도 처음이니까.
체시아레 같은 종류와, 내 모든 가족 같은 종류와는 성질 자체가 다른 상대였다.
네가 내게 바라는 게 그토록 단순했다면 모든 게 더 쉬웠을 텐데…….
내 몸을 감싼 팔이 느슨해지면서 발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
잽싸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이스케가 내 손을 그러쥐며 으르렁거렸다.
“나를 좀 보라니까.”
“안 돼요, 이제는…….”
“이젠 내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이건가?”
얘기가 왜 그렇게 튀니?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훌쩍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 차마 당신을 볼 면목이 없어요.”
“왜?”
“왜냐하면, 조용히 넘어갔으면 될 걸 쓸데없이 물의를 일으켰잖아요.”
“…….”
“다들 제가 기고만장해졌다 여기시겠죠. 하지만 결국 누가 제일 중요한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어차피 당신은 저따위 없어져도…….”
“뭐라고?”
서늘하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하도 섬뜩해서 나는 순간 뒤로 흠칫 물러날 뻔했다.
어차피 놈이 내 양손을 꼭 붙들고 있는 통에 글렀지만.
“대체…… 누가 감히 네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였지?”
그러게 말이구나?
나는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이스케의 손을 뿌리쳤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애썼다.
“말해. 대체 누구야, 네 귀에 그런 소릴 속닥거린 게.”
“…….”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가야 하나?”
낮게 으르렁대는 이스케의 작태는 마누라 잃은 서리 늑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 탓인지 왠지 더 서러워졌다.
이 성질 급한 자식아!
난 네가 제일 미워!
네놈이 제일 밉다고 이 배배 꼬인 주인공 놈아!
“말하면 저 또 미워할 거잖아요!”
급기야 빽 대답함과 동시에 맞잡은 손의 힘이 풀렸다.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정신을 미처 차리기도 전에 몸이 세차게 뒤로 튕겼다.
바닥에 깔린 수풀이 푹신해서 망정이었다.
“루비……!”
일순 멀거니 얼어 있던 이스케가 빠르게 움직였다.
낑낑대는 내게 황급히 몸을 수그리는 그의 눈에 엄청난 염려가 서려 있었다.
“괜찮아?”
그럼, 괜찮고말고. 차마 아프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민망하다.
내가 이 바위 같은 놈의 가슴팍을 밀치려다 혼자 넘어진 거니까.
진정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군.
어째서 나는 매번 이놈 앞에서 이런 창피한 꼴만 보이는 거지.
수치심에 머리가 어질거리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흥건히 젖은 뺨에 부드러운 실크 손수건의 감촉이 와 닿았다.
씨이, 무슨 짓이야, 내가 한땀 한땀 수놓은 해바라기가 젖어버리잖아.
“하, 제기랄, 결국 또 이렇게…….”
낮게 뇌까린 남편 놈이 이를 악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뱀처럼 가는 눈매에 어둑한 그늘이 내렸다.
“너, 여태껏 내내 그런 걱정 하고 있던 거였어?”
난 걱정도 하면 안 되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노와 수치의 울음이 자꾸 나오려고 해서 손수건을 입에 물고 끙끙거렸다.
멍한 눈길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이스케가 더는 못 봐주겠다는 기세로 손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루비.”
“히끅! 제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꾸 분란을 일으키니까, 또 그러면 지난번처럼 돌려보내려고 하실까 봐…….”
너에게 지난날을 돌이키는 양심을 기대하는 건 딱히 아니다만.
그러니까 이 녀석에게 그러한 애틋한 양심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나저나 이놈의 딸꾹질은 왜 이놈 앞에선 유독 자제가 안 되는 거야.
내가 딸꾹질을 갈무리하려 애쓰는 동안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슬쩍 든 나는 이윽고 흠칫하고 말았다.
“그런…….”
내 앞에 수그리고 앉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이스케는 말 그대로 본 적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슨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괴상망측한 얼굴이었다.
매섭게 경직된 눈의 동공이 차마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속절없이 흔들린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하지만 아까 전엔 직설적으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더니.
하도 생소한 반응이라 무섭다기보다는 되레 신기한 기분마저 일어서, 나도 모르게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 막 제가 너무 싫고 짜증이 난다고 하셔서…….”
“…….”
“그래서 당신이 싫어하는 짓 안 하려고 노력했는데, 또, 또 이렇게…….”
메소드 연기력에 기반한 좌절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노력을 하면 무엇하느냔 말이다, 주변 인간들이 뭔 인어공주처럼 자꾸 물거품으로 만드는데!
에라, 나도 이제부터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거야!
일이 망해서 죽게 된다면 결코 혼자만 죽지 않을 거라고!
커다래진 붉은 눈에 뜻 모를 당혹감이 번지나 싶더니 눈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참으로 고약한 성질머리라고 내심 감탄하는 찰나였다.
“그때는…… 진심이 아니었어.”
어디서 갑자기 약을 파는 거냐. 매우 진심으로 보였던 그 모습 아직도 종종 꿈에 나올 지경이거든?
물론 진짜 완벽히 진심이었다면 이놈 성격에 바로 다음 날 날 보내버렸을 테지만…….
“그때 너한테 한 말들 전부 하나도…….”
“후읍,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착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오해하고 있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그게! 아니, 이게 아니라, 미안해.”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도도한 주인공께서 방금 자진해서 사과의 말을 했어? 이건 다시 들어봐야 해.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멀거니 굳어 있던 남편 놈이 경고도 없이 아주 천천히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겨 안는 바람에, 애써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튀어나오려고 했다.
바위처럼 너른 어깨에 얼굴이 폭 파묻히자 당혹감이 밀려왔다.
“처음부터 그리 갈팡질팡하지 않았더라면 이리되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에는…….”
팔이 나를 꽉 끌어안는 동안에 그의 목소리에 착잡함이 실렸다.
속삭임에 가까울 만큼 낮게 잠긴 목소리.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나는 그저 멍했다. 완전히 멍한 기분이었다.
얘가 대체 뭔 소릴 한 거지?
이쯤에서 뭔가 적절한 대꾸를 해줘야 했다.
그러나 머리와는 달리 입은 자꾸만 제멋대로 따로 놀았다.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알아.”
“진짜 제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알아.”
가슴 한구석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무언가가 균열이 일며 세차게 팍 하고 터지는 느낌이 일었다.
원인 모를 격정의 파도가 이성을 집어삼켜 버린 듯했다.
“진짜 내가 그런 거 아닌데,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다 자꾸 나한테만……!”
세차게 발버둥 치는 내 몸을 그의 팔이 단단히 꽉 끌어안았다.
나는 끙끙 오열하며 나를 가둔 놈의 어깨를 사정없이 팡팡 때렸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조금도 자각이 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스케는 꼼짝하지 않고 묵묵히 나를 붙들고 있었다.
차라리 네가 다른 사람 같았다면, 내 저주받은 영혼의 간수였던 그 모든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면 모든 게 훨씬 편했을 텐데.
네가 밤마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않았더라면, 진짜 공주님이라도 품에 안은 것처럼 황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언제 잃게 될까 하는 바보 같은 두려움 따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살 수만 있다면 네가 푸른 수염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자꾸만 주제넘은 욕심을 품게 만드는 거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더는 못 견디겠다고 판단한 건지 어쩐 건지 퍽퍽 쳐대는 내 손을 놈의 손이 잡았다.
물론 아파서는 아닐 터였다.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건 판금 쇄갑 위를 실컷 때린 내 손 쪽이었다.
“루비, 그만. 그만해. 손이 다 망가지겠어.”
“후으윽, 싫어요……!”
“알았다. 그럼 차라리 내 따귀를 치든지.”
그런 짓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집 나간 이성이 약간 되돌아왔다.
내가 훌쩍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사이 이스케는 밭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얼얼한 손을 붙들고 들여다보았다.
“이거야 원, 서리버섯이라도 미리 심어둘 걸 그랬군.”
“……그건 갑자기 왜요?”
“그랬으면 네가 그걸 나한테 던졌을 거 아냐, 이러는 대신.”
침묵이 내렸다.
할 말을 잃고 얼이 빠진 나를 한번 힐긋 쳐다본 그가 이제 내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가볍게 홱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아, 하여간 뒤끝 장난 아닌 녀석일세…….
이런 녀석한테 내가 방금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지?
“저기, 이스…….?”
“음.”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세게 때렸…….”
“아홉 살 먹은 꼬맹이처럼 때리던데, 뭐 견딜 만해. 그보다 멍이 들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군.”
한 손으로 내 손을 계속 만지작대다 거기에 입을 맞추는 남편 놈이었다.
짧고 간소한 동작.
그걸 멍하니 지켜보는데 가슴 한쪽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려왔다.
동시에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 의아해졌다.
아무튼 결국 때린 나만 아픈 거로군.
다행이긴 한데, 왜 슬금슬금 약이 오르는 기분일까?
역시 아까 따귀를 치라고 했을 때 냅다 쳤어야 했어!
모처럼 온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다니, 내가 바보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