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6)

* * *

‘정말 내가 그런 거 아니…….’

‘이런, 진정 좀 해. 내가 지금 그 문제 따지러 온 것 같아?’

달래듯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다.

애지중지 귀애하는 보물을 어루만지듯 상냥하고 애틋한 느낌마저 드는 손길이었다.

반면에 내 머리채를 꽉 움켜쥐고 있는 손은 한 몸에 달렸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무자비하고 야만적이었다.

‘분위기가 다 엉망이 됐다며. 그렇게 소란 피울 필요 없이 적당히 넘어갔으면 좋았잖아, 그런 다음 나한테 왔으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 봐.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런…….’

‘가만히 생각할수록 희한하네. 요즘 왜 이렇게 기가 살았을까?’

짙푸른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너울거렸다.

내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깜박거렸다.

몸이 병든 개처럼 벌벌 떨렸다.

‘……아, 역시 그놈 때문인가? 요즘 꽤나 사이 좋아 보이시던데, 그 자식이 너한테 뭐 약속하기라도 했나?’

바짝 얼어붙은 혀를 놀리는 대신 고개를 흔들려 했다.

그러나 머리채를 움켜쥔 억센 손아귀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날 선 음산한 속삭임이 등골에 전율을 흘려보냈다.

‘네가 누구 덕분에 이 집안에 붙어 있는 건지 깜박한 모양이구나.’

“……꺄악!”

내 잠꼬대에 내가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또렷이 떠올리기까지 좀 걸렸다.

무릎에서 흘러내린 수틀이 발치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안락의자 앉은 채로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이 몇 시지?

“마님, 괜찮으세요?”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로냐가 나타났다.

드물게 잔뜩 울상인 얼굴이었다.

내가 그저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훌쩍훌쩍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트레이 카트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왔어요, 마님. 공녀님께서 말씀하시길…… 훌쩍, 죄송합니다.”

“로냐, 왜 우는 거니?”

“죄송해요. 그렇지만 마님이, 마님께서……. 마님의 티파티가…….”

보아하니 오늘 티파티에서 벌어진 소동이 사용인들 사이에도 쫙 퍼진 모양이었다.

내 전담 하녀인 로냐가 어떤 식으로 전해 들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속이 상한 듯했다.

“꼭 내 티파티라고 할 수도 없는걸. 울지 마, 별일 아니니까.”

“네, 하지만…… 우흑……!”

우리의 순진한 로냐는 좀체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써 담담하게 말했으나 울고 싶은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말 그대로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을 지경이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젠장,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입 닥치고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단 덜 심각했을 텐데.

기껏 공들여 이제 막 뼈대를 갖추고 있던 탑이 이렇게 와르르 무너지는 것인가?

이번 건은 일전의 승마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랑은 또 달랐다.

겨우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엘레니아도 아이반 경도 나에 대해 오히려 예전만 못하게 여기게 되겠지.

그리고 이스케 놈은…….

뒤따라 들어온 루실이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훌쩍대는 로냐를 향해 득달같이 핀잔을 던졌다.

“너 그만 칭얼대지 못하니? 마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야?”

“그, 그렇지만 마님께서…….”

“하여간 어린애들은 이래서 피곤하다니까.”

끌끌 혀를 차대며 잽싸게 나서서 내 식사를 차리기 시작하는 루실이었다.

보란 듯 팔을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매우 전문적으로 느껴졌다.

좀 흥이 실린 것 같기도 하다.

루실의 머릿속이 빤히 보이는 듯했다.

내게서 다시 뇌물을 타갈 기회가 왔다고 여기는 것이리라.

로냐는 아직 이 성 내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내가 예전처럼 냉대받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존재가 필요할 거라고 말이지.

하여간 다들 한결같기는.

“어서 드세요, 마님.”

뭉근한 양파 수프와 얇게 저민 연어를 올린 크림치즈, 고기 샐러드의 향기가 몹시 자극적이었으나 전혀 식욕이 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인간들이 한 방에 훅 가버리게 생겼는데 입맛이 돈다면 되레 우습겠지만.

엘레니아는 내 거식증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내게 부러 식사를 가져다주라 지시한 이유가 뭔지 몰라도 일단은 비워야 할 터였다.

그러고 안 들키게 조심히 토해내야지.

너무 암울해서 그런지 프레이야를 원망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욕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녀가 말했듯이 이곳에서 그녀와 나는 비교 선상조차 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들 그녀를 선택하리란 거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놈의 소꿉친구의 위엄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는 진리를 고구했을 때, 이 동서고금의 클리셰란 클리셰는 죄다 때려 박은 판타지 펄프 픽션 세계관에서 내가 프레이야를 이길 가능성은 한없는 제로에 수렴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입안이 쓸까.

내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엘레니아와 진짜로 친해졌다고, 아이반 경과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그래도 여기 와서 진심으로 괜찮은 사람들 몇몇을 만났다고, 남편 놈이 나를…….

단지 그렇고 그런 이유 때문에 잘해 주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보석 창고 열쇠까지 준 날에…….

망할, 하루 만에 도로 뺏기게 생겼네.

아까 그 자리에서 모두가 지어 보였던 눈빛을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바보 같다, 나.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면서. 대체 무슨 주제넘은 기대를 품었던 거야.

내가 깨작대며 식사를 드는 사이 겨우 눈물을 그친 로냐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님, 오늘은 어디에 목욕 준비를 할까요?”

빈 잔에 우유를 채우던 루실이 눈치를 주듯 로냐의 어깨를 툭 쳤다.

질문할 걸 질문하라는 몸짓이었다.

최근 내 욕실 대신 남편 놈의 호화로운 욕실을 자주 이용했던 탓이었다.

오늘 같은 밤에는 염치 있게 내 욕실에서 얌전히 씻는 편이 지당하겠으나…….

“평소대로. 준비만 해줘, 오늘은 내가 알아서 할게.”

두 하녀가 나란히 시선을 교환했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내 귀에도 꽤 배짱 좋게 들리긴 하구나.

그럼에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괴로운 일은 한시라도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낫잖아.

어차피 겪어야 할 시련이라면 심장 졸여가며 마냥 기다리는 청승 짓 하느니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는 게 낫지.

오늘 아침 아버님은 내게 아들놈의 첫정 어쩌고 하는 기괴한 말을 했다.

프레이야 역시 요지는 좀 달랐으나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쉽게 말해 내가 이스케의 첫 상대라서, 그가 내게 동정을 바치는 바람에 잠깐 특별히 여기고 있는 거라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원작에선 나오지 않은 전개이니까.

단 그 두 사람 눈에조차 이스케가 영 딴사람처럼 보일 정도라면 이유가 뭐든 정말로 내게 무르게 굴고 있긴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최대한 자진해서 반성하는 것처럼 굴면 조금은 봐주지 않을까.

그래도 요즘은 날 약간은 좋아해 주고 있으니까 뭐든 자진해서 고분고분히 받아들인다면 오늘의 날벼락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길을 찾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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