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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슬슬 듀라한이라도 나타나 줬으면 싶을 정도다.”
끔찍한 소리를 진심처럼 내뱉은 카뮤가 꽥꽥 악을 써대는 노움의 각다귀 같은 다리를 잡고 골짜기 아래로 홱 던졌다.
노움이 내지르는 최후의 단말마가 시끄럽게 메아리를 쳤다.
“전형적인 일 중독 증상이군.”
이스케가 읊조렸다.
천 조각으로 검날을 빡빡 문지르고 있는 그의 발치에는 끈적끈적한 슬라임 덩어리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고블린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요즘 마주치는 마물이라곤 죄다 이런 잡것들뿐이었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난 적어도 이런 여유를 즐길 줄은 알지.”
카뮤의 짜증스러운 일침에도 이스케는 마냥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요즘 들어 퍽 자주 보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적응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카뮤는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언제부터 그리 부인 생각에 싱글벙글했다고?
양심도 없는 새끼라고 욕하고 싶었으나 그래봤자 별 타격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원체 반성이라든가 자아성찰이라든가 하는 성숙한 요소와는 거리가 먼 놈이니까.
“젠장, 네 마누라가 그리 걱정되면 차라리 골치 아플 일 없게 전부 찾아내서 없애버리면 될 거 아니야. 어차피 그래봤자 마물들이라고.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없애려면 서리용까지 전부 없애야지. 자기들이 알아서 꼭꼭 숨어 자빠져 있는데 굳이 힘 뺄 필요가 있나.”
“네 덕분에 다른 어중이떠중이들만 신나서 휴가 즐기고 있잖아, 지금.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일 중독자 노인네처럼 잡무란 잡무는 죄다 떠맡는 바람에 능력 없는 새끼들만 신났지.”
카뮤는 평상시 자신이 소수정예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표출하곤 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종종 다른 동료들의 능력을 싸잡아 비하하는 방향으로 굴절되곤 했다.
애국심과 동료애를 최고 신조로 여기는 단장이 알면 불호령을 내릴 일이었다.
“동료 비하는 좋지 않다.”
“너 지금 혹시라도 다른 놈들이 그것들이랑 마주쳐서 죽일까 봐 이러는 거 아니야? 네 마누라 가출 친구들 안 죽게 하려고, 나 참, 네가 언제부터 마물들한테 그딴 눈물겨운 자비심을 품는 놈이었냐?”
자비심을 품으려면 차라리 인간한테 품든가.
카뮤는 서리숲에서 루드베키아를 찾아낸 그 날 즉결처분당했던 밀렵꾼 여인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브리타냐의 팔라딘은 국왕을 대신해 죄인을 즉결처분할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밀렵꾼은 중죄인이었다.
절차대로 체포해 데려갔다면 팔이 잘렸을 터였다.
하지만 이스케는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살려달라고 비는 여자의 팔을 자르지 않았다.
죽이지도 않았다.
산 채로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았다.
이유야 명백했지만, 의외로 섬세한 비위의 소유자인 카뮤는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속이 안 좋았다.
나아가 더더욱 저놈이 재수 없어졌다.
그런 잔악한 새끼인 주제에 부인한테 푹 빠져서 다정한 척 내숭 떠는 꼬락서니하고는.
“그렇게 불만스러우면 너도 휴가 쓰든가. 쫄쫄 따라다니면서 쫑알대지 말고.”
“하여간 정나미 떨어지는 새끼.”
조금 떨어진 나무 둥치 곁에 갈라르가 앉아 잎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스케는 진짜 곰처럼 웅크리고 있는 갈라르 옆으로 다가가 마찬가지로 잎담배를 꺼냈다.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흐트러졌다.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주절대는 것이었다.
“도마뱀 새끼가 잠적 중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그놈 생포하라고 우릴 갈아 넣고 있었을 텐데, 왜 검투 경기 종목에 넣으려고 말이야.”
긴 속눈썹까지 땀방울이 맺힌 붉은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윽고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카뮤와 갈라르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갈라르 또한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살다 살다 저 삭막한 미친놈이 휘파람 부는 꼴을 다 보게 될 줄이야, 이걸 다른 놈들이 못 봤다는 게 천추의 한일 따름이다.
“너 말 잘했다. 그래봤자 기어 나와서 습격이라도 하는 날엔 토벌을 피할 수 없을 텐데? 그리고 검투 대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가 참석하는 게 정말로 좋은 생각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거냐?”
“내가 또 우승할까 벌써 배가 아프나 봐.”
“지랄 마라. 마누라 가출 친구들 안 죽게 하겠다고 이 짓거리 하는 주제에 마물들이랑 싸우는 경기에 참석하겠다고? 대체 뭔 꿍꿍이야? 막말로 공자비가 관람하다 충격받아서 일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요즘 희한하게 잡소리가 늘었군.”
이스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잎담배 끝을 짓씹는 입매가 비웃듯이 미끄러졌다.
서늘하게 풍겨오는 살기에 카뮤는 헛기침을 좀 하며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내 말은 네 부인이 실수라도 하면……. 젠장할, 현실적으로 그렇잖아. 나라도 혼란스러울 거라고.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의 돼지 구이가 말을 건다고 생각해 봐라! 그것들 울부짖는 소리 전부 알아듣는다면, 그것도 싸우고 있는 놈이 너라면 아무 동요 없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어디 그 문제뿐이냐? 만약 그것들이 관람석에 앉아 있는 네 아내를 보고 이상행동이라도 보인다면 어쩌려고?”
돼지 구이 어쩌고 하는 비유가 좀 비논리적이긴 했으나 어쨌든 갈라르 역시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그게 제일 염려스럽다, 이스케. 공자비께서 잘 대처하신다 한들 광분 상태의 마물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 아니냐. 관람석으로 덤벼드는 거야 불가능하다 쳐도 그쪽으로 돌진하려고 기를 쓴다든가 신호를 보내는 행위 같은 걸 한다면…….”
“신호라니?”
“가령, 그 뭐냐, 바디랭귀지 같은 거 있지 않냐.”
그런 상식적인 것도 생각 못 하냐는 투의 갈라르의 핀잔에 잠시 오묘한 침묵이 스쳐 갔다.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이스케가 마침내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누가 그걸 모르냐. 그래서 참석한다는 거다.”
“뭐?”
이스케는 멍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동료 놈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검투 경기의 종목으로 사용되는 광포한 마수들은 수개월에 걸쳐 더더욱 광포하게 길들인다.
굶주림과 온갖 고문, 신성 자극과 약물주입 등을 거치며 완벽한 악마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루드베키아를 감지한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현재로선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발렌티노 추기경이 위원회를 관할하러 오는 판국에 그녀를 관람석에서 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것들이 허튼수작 벌이기 전에 최대한 신속하게 고통 없이 죽여줄 수 있는 놈은 나밖에 없지.”
심각하게 재수 없는 주장이었으나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그 어떤 자부심도 오만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이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어조, 지극히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사실을 읊는 듯한 어조라 카뮤와 갈라르는 일순 반박할 기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근데 그러다 중간에 패배해 버리면 그땐 어쩌려고?”
“패배할 일 없어. 최종 승자는 나야, 이번 대회도.”
“지금 진심이냐?”
“진심과 열성을 다해 북부의 기상을 살리고 숙부님께 자부심을 안겨 드려야지. 그 정도는 해야 나중에 일이 들통나더라도 내 멋대로 할 명분이 있지 않겠나? 내 아내가 별난 재주 좀 가졌다고 호들갑 떨 인간도 줄어들 테고, 나 같은 놈이 남편이니.”
카뮤는 그만 몸을 돌리고 허리에 찬 주머니를 뒤적여 잎담배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갈라르는 자신의 잎담배를 홱 떨구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참석해야겠군.”
“우리라니……?”
“나와 너 말이다, 카뮤. 그리고 아마 아이반 녀석이랑…….”
“이 불곰 자식이 미쳤나, 왜 갑자기 나를 끌어들여? 그리고 파울 행위 금지인 거 모르냐?”
“누가 파울 행위를 한댔나? 도와줄 겸 새로운 모험을 해보자는 거지.”
“말은 참 쉽게 지껄이는데 말이야, 검투 경기가 무슨 애들 장난이냐고?”
“자신이 없는 거냐, 카뮤? 실망이군.”
“이게 진짜……!”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아래쪽에서부터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황당을 금치 못하는 낯짝이 된 카뮤도 머리를 실망스레 젓고 있던 갈라르도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이스케는 유유자적 석양을 바라보는 모양새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X발, 길 더럽게 X같네.”
“……뭐야, 아이반 너였냐? 어딜 쳐갔다 이제 나타나냐 성실치 못한 새끼야.”
“아가리 싸물어라, 말 엉덩이 대가리 새끼야. 안면 상실하고 싶냐?”
원래 항상 입이 더러운 놈이긴 하나 이런 식으로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카뮤는 뜻밖의 폭언에 발끈하기보다는 되레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이반은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자신을 멀거니 노려보는 카뮤와 갈라르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이스케에게 다가갔다.
“야 이스, 얘기 좀 하자.”
“넌 어딜 갔다 이제 나타나냐?”
“……너희 집 다녀왔다. 레아 때문에.”
똑같은 질문에 한결 다른 대답을 내놓는 아이반은 몹시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기압인 듯 복잡한 듯 뭔가를 초조하게 걱정하는 듯도 한, 한마디로 말해 뒤죽박죽 엉망인 낯짝이었다.
마냥 쾌활하던 이스케의 표정 또한 심각해졌다.
“네 여동생이 사고라도 쳤냐?”
“X발, 그런 거 아니거든? 예의 바르게 잘 놀고 있었거든?”
“그럼 뭐 때문에 새삼 친한 척인데. 아, 네가 갔을 때 티파티 중이었나?”
“……그래. 거의 막바지긴 했지만.”
“루비도 만났겠네, 그럼. 잘 놀고 있던?”
아이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이반.”
“엉?”
“조냐? 왜 대꾸가 없어. 내 마누라가 잘 놀고 있었느냐고.”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제기랄,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돼.
아이반은 문득 언젠가 루드베키아가 물은 대로 자신의 검에 자아가 있었으면 좀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검이 대신 말해줄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