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36)

* * *

내심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티파티는 평탄하고 발랄하게 흘러갔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몇몇 영애에게 일전의 연회에서 선보인 춤 추는 법을 설명하기도 하고 무리 지어 소화도 시킬 겸 거대한 온실 정원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등 나름 무난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뜻밖의 방문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얘기다.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내 남편 놈만 봐도 요사이 너희가 얼마나 바쁜지 알겠는데, 너는 대체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어머나, 아이반 경 아니신가요?”

“방해라니요, 마침 슬슬 이야깃거리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는걸요.”

“오랜만에 뵈네요. 오메르타 저엔 어쩐 일이신가요?”

꼭 두 번째로 이 아기자기한 풍경 속에 발을 들이고 있는 시커먼 갑옷 차림의 기사는 바로 한 떨기 꽃 같은 아이반 경이었다.

대체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레아를 데리러 온 건가?

그건 유모랑 호위기사가 할 일이지 굳이 직접 발걸음할 이유는 못 되는데.

“오빠 여기서 뭐 해?”

아니나 다를까. 수줍고도 호들갑스러운 인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인형의 집 대문이 덜컹 열리더니 레아가 튀어나오며 귀여운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에 아이반 경은 매우 비슷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네가 요즘 툭하면 여기서 해질 때까지 폐를 끼치니까 내 친히 데리러 온 거 아니냐, 호박아. 어라, 안녕하십니까, 왕녀님. 왕녀께서도 와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레아의 뒤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던 아리엔이 재빨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레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나 폐 안 끼치는데. 그리고 왕녀님이랑 같이 놀기로 했단 말이야. 오빠는 아무 권한이 없어.”

아이반 경은 대꾸하는 대신 곤혹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엘레니아 쪽을 바라보았다.

엘레니아는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무표정이었으나 그럼에도 재치 있게 말했다.

“언제나 우애가 좋으시군요.”

“놀리지 말아주십시오.”

왜 갑자기 묘한 감이 이는 거지.

설마 아이반 경, 이거 여동생 데리러 온 건 그냥 핑계 아니야?

실은 엘레니아를 보고 싶어서 일을 땡땡이치고 슬쩍 들른 거라던가?

“저어, 나도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네에? 갑자기 왜요?”

“시간도 늦었고…… 경께서 너 데리러 오셨잖아.”

“아직 해도 안 졌는데요.”

“왕녀께서 돌아간다 하시니 넌 아무 권한이 없다, 동생아.”

아리엔조차 아이반 경의 역성을 드는 셈이 되는 바람에, 레아는 몹시 배신감 어린 얼굴이 되었으나 의외로 끈질기게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다음부터는 나 혼자 와서 공자비랑 놀 거예요. 그럼 아무도 훼방 못 놓을 거야.”

“너 매일 그렇게 부인 귀찮게 해드리면 내 인성 더러운 친구 놈이 훼방 놓을 거다.”

“오빠는 입이 더럽잖아.”

“뭐야?”

“부인,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폴짝폴짝 인형의 집 밖으로 뛰어나오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꼬꼬마들을 배웅하려는 참이었다.

엘레니아가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면서 다음과 같이 내뱉는 것이 아닌가.

“앉아 계세요, 루비. 제가 배웅 나가겠습니다.”

에, 엘렌 당신마저?

오늘 모임의 주최자는 우리 둘인 셈이라 둘 다 자리를 뜨긴 뭣하긴 하다만, 아리엔이랑 레아는 엄연히 내 손님이니 나간다면 내가 나가는 게 맞는데 어째서 굳이…….

“저도 잠시…….”

“저도…….”

“아이반 경, 이번 검투 대회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예전부터 여쭙고 싶던 게 있는데요, 혹시…….”

저기요, 그렇게 십 대 소녀팬들처럼 뛰쳐나가시깁니까?

자리 뜨기 뭣하다는 말 취소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군.

이거야 원, 나만 빼고 전부 우르르 쫓아 나가는 셈이 되어버렸네.

아이반 경도 인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하긴 명문 후작가 장남에 실력 뛰어난 팔라딘에 외모도 저리 고우니, 내가 여느 평범한 북부 여식이었어도 설렜을 법하다.

혹시라도 만약에 아이반 경과 엘레니아 사이에 그렇고 그런 불꽃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응원하리.

힘내라, 아이반 경!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정원이 삽시간에 고요의 영토가 되었다.

나는 티테이블로 돌아가 앉아 있으려다 말고 인형의 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리엔이나 레아가 여기 와서 놀 때면 둘 중 하나는 꼭 뭔가를 흘리고 갔기 때문에 오늘도 혹시나 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머리핀을 흘리고 갔다.

아까 레아가 차고 있던 에메랄드 머리핀이었다.

뒤따라 나가서 전해줄까 하는 찰나…….

“정말 귀엽네요.”

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는 왜 안 나갔니?

“저도 어릴 때 비슷한 인형의 집으로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만큼 대단하진 않았지만.”

“아…….”

“이 정원도 참 대단해요. 오메르타 성에서 이런 걸 보게 될 줄 몰랐네요.”

찻잔을 쥔 채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프레이야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반대로 나는 몸이 절로 뻣뻣해졌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형의 집 뒤, 미로 덤불 안쪽에 자리한 작은 바위에 우아하게 걸터앉은 프레이야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이것으로 만족하시나요?”

이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람. 오늘따라 다들 갑자기 왜 이래?

“이것이라니요?”

“말 그대로예요. 지금 행복하세요?”

“네, 당연히…….”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군요.”

“아하하, 제가 부족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렇죠. 그러시겠죠. 굳이 이곳이, 상대가 누가 됐든, 부인 같은 분은 어디서든 이 정도만 되면 만족하시겠지요. 지금까지도 그랬을 거고.”

슬슬 아버님과 프레이야가 오늘 나란히 짜고 작당한 게 아닐까 싶어지는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곳을 떠나셔서 또 다른 분과 결혼하신다 해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잘 지내실 것 같아 안심이라는 말이에요.”

“전 지금이 최고로 행복한걸요. 여길 떠날 일도 없고요.”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내 순진하게 치켜뜬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 참, 정말로 못 알아듣는 건지 그런 척하는 건지 매번 헷갈리네요.”

헷갈려서 잘 됐구나. 아니, 헷갈리지도 말아줬으면 하는데.

“제게 뭔가 불만스러운 점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영애?”

“이스는 국왕께서 아끼는 조카이자 브리타냐의 가장 고귀한 혈통 둘을 전부 이어받은 뛰어난 기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교도 출신 피가 섞인 어린 왕녀보다는 그쪽이 브리타냐의 군주가 될 가망이 크죠. 이 정도는 이해하시겠지요.”

유리 천장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백금발을 반짝거리게 물들였다.

반면에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늘이 졌다.

“그리된다면 배우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북부의 미래가 갈리겠죠. 타락한 성도의 간섭에 끝없이 시달리며 옛 영광을 영영 잃을 것이냐, 따뜻하고 안전한 땅에서 사리사욕 채우기나 바쁜 성자들조차 숨을 죽이도록 부상할 것이냐. 막말로 그런 자들이 이 땅에 대해 뭘 아나요. 부인만 해도, 그저 신기한 생물들이 나타나는 흥미진진한 놀이터쯤으로 여기고 계시잖아요?”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뭐 이런 건가?

오늘 진짜 신기하네.

짜고 치는 게 아니라면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싶다.

네가 내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눈을 커다랗게 벌린 채 굳은 듯 가만히 있었다.

원하는 반응이었던 모양인지, 다시 내게 시선을 꽂는 프레이야의 입가가 여유롭게 휘었다.

“아마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저도 딱히 이해를 구하는 건 아니고…… 그저 부인처럼 해맑은 분의 원망을 사기는 싫어 미리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나중에 제가 아무런 경고도 해주지 않았다고 투덜대시기 없기예요?”

“경고요……?”

“첫정이란 무서운 법이죠. 게다가 부인께선 대책 없이 사랑스러우신 분이고. 승전기원용 오르골 속에 든 춤추는 예쁜 인형 그 자체이시라고 할까, 이스 같은 타입의 남자에게는 그 조합이 판단력을 흐리고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 법도 하죠. 비록 잠깐에 불과하더라도.”

이스케 같은 타입은 멍청한 백치한테 약하다 이 말인가?

그것보다 프레이야조차 첫정 타령이라니, 첫정이 그토록 위대한 거라면 세상 모든 남자는 서리 늑대 못지않은 순정꾼이었을 텐데.

물론 나도 남편 놈의 최근 행보가 매우 적응이 안 된다는 거, 가출 소동 이후 그리고 나와 마침내 성을 쌓은 그 날 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달라졌다는 거 인지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내가 모르면 되레 이상하지.

체시아레나 아버지도 어떨 때는 정말 내게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구는걸.

내 전생의 가족들도…….

그러니 그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알아, 나도 안다고. 아는데도…… 젠장, 쟤 입으로 들으니 새삼 불쾌하다.

나는 벌린 입을 살며시 다물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천진난만하게 보이게끔.

“제가 왜 투덜대겠어요? 근데 영애께선 보면 볼수록 제 남편에 대해 되게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어머, 제가 불쾌하게 해드렸나요?”

“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그냥 신기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스는 영애 얘기 한 번도 해준 적 없거든요.”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매가 살짝 굳었다.

여유롭게 반짝이던 보라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이내 재미있다는 빛이 떠올랐다.

귀하게 태어나고 귀하게 자란 사람은 좀체 여유를 잃는 법이 없다.

“부인께서 혹시라도 저를 연적으로 여기실까 봐 그런 것 아니겠어요. 오해 마세요, 난 그런 유치한 감정놀음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니까. 이스도 마찬가지이고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주 많은 공통점을 나눠왔죠. 그중 하나가 바로 북부에 대한 애정이고요. 지금이야 잠깐의 여흥에 빠져 있다 해도, 그게 우리 모두와 바꿀 정도는 아니랍니다.”

너희 모두 잘났다 그래. 내게 외부인으로서의 박탈감을 주고 싶은 거라면 허튼 수고이거늘.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신물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일었다.

프레이야는 다분히 객관적인 예로 들자면, 내 전생의 학창 시절 틴잡지 모델로 실린 유명한 여학생 같은 사람이었다.

평판 뛰어난 집안과 더불어 화목한 가족과 잘 나가는 친구들, 완벽한 외모와 넘치는 재능까지, 나와는 너무 다르다 못해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것 같아 감히 질투조차 느낄 수 없었던 그런 타입의 사람.

억압과 고독, 차별이나 폭력 따위 등은 상상도 못 하며 그런 일이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걸 결코 허용치 않을 태생의 인물.

무엇 하나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나와는 종류 자체가 다른 인간임에도, 그런 인간이 나와 어쩌다 길이 엇갈려 이렇게 마주 보고 본색의 조각을 조금이나마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나 어릴 때부터 긴 세월을 함께해 온 이들이 가장 소중하지 않나요. 그건 부인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프레이야가 다짜고짜 쏟아낸 경고인지 뭔지를 총 종합해 결론을 내리자면, 프레이야의 목표는 바로 브리타냐의 왕비 자리인 듯했다.

왕의 파트너, 킹메이커로서 함께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란다.

그거랑 날 엿 먹였던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타락한 교황 일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날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건 알겠지만, 그건 대부분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그렇게 유치하게 엿 먹이지 않았어도 됐는데.

굳이 이렇게 고상 떨지 않아도 됐는데.

그냥 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너희가 바랄 때 알아서 떨어져 나가 줄 텐데.

“말씀하시는 거 전부 이해가 잘…….”

“물론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요.”

“네, 근데 앞뒤가 좀 안 맞는 것 같긴 해요.”

“안 맞다니요?”

“처음에는 제가 굳이 이스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누구와도 행복할 사람이니 안심이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경고라든가, 연적 같은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걱정하시는 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나 또한,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말이었다.

아마 오전에 공작과 그 일이 없었더라면 속이 좀 덜 뒤틀렸을지도 몰랐다.

나 같은 부류를 평생 알아본 적도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이의 고상한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진 않았을지도.

속이 갑갑했다.

무엇 때문에 갑갑한지 알 길이 없어서 더 갑갑했다.

그래서 내색하는 대신 활짝 웃었다. 그리고 프레이야는 웃지 않았다.

웃음기가 완전히 꺼져버린 시선이 사늘했다.

물론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그리 해맑으시면서 당돌하기까지 하시면 어쩌자는 건가요.”

멍청한데 배짱까지 있으니 최악이라는 말이었다.

쩝, 약이 제대로 오른 모양이다.

“왜 이렇게…… 아, 그래요. 맞아요. 요즘 부인을 싸고도는 건 이스뿐만이 아니었죠. 엘렌이 내게 말하길 부인이 자꾸 눈에 밟힌다나 어쩐다나. 좀 놀랍긴 하더군요, 의지도 생각도 없는 예쁘장한 바보들에게 질색하는 건 엘렌 역시 나 못지않은데 말이에요. 하지만 부인, 도를 넘는 과신은 칼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랍니다. 이 기회에 미리 제대로 알려드려야겠네요.”

무슨 인생의 대단한 지혜를 알려주려나 싶어서 나름 귀를 기울이는 척을 하려는데, 우리의 야심가께서는 놀랍게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행동으로 선보였다.

촤악.

공들여 말아 넘긴 백금발이, 고혹적인 화장이, 감색 레이스 드레스 앞섬이 끼얹어진 찻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찻잔은 잔디 위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자기 자신에게 찻물을 끼얹는 여인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확실히 처음 본다.

마요네즈를 끼얹은 못돼먹은 꼬맹이는 봤어도.

프레이야는 그 꼴로 곧장 일어나, 일순 얼이 빠져 있는 나를 우아하게 지나쳐 미로 덤불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입구 쪽에서부터 아까 이곳을 떴던 목소리들이 울렸다.

“대체 얼마나 요란하게 놀았길래 머리핀을 다 흘리냐? 그것도 어머니가 주신 건데…….”

“시끄러워! 공자비께서 찾아주실 거거든.”

“뭐야? 대체 그동안 얼마나 흘리고 다녔으면 그런 말이……. 퓨리아나 영애?”

“프리? 맙소사,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한 손에 쥔 머리핀의 감촉이 까슬했다.

하필 아이반 경과 레아까지 같이 되돌아오다니, 신이시여, 당신 저 진짜 싫어하죠?

저도 수치심이란 게 있다고요!

“세상에 영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대체 어쩌다 이런 거야?”

“별일 아니야, 그냥 좀…….”

누가 누구더러 유치하다는 게야!

젠장, 실로 유치하고도 확실한 수단이긴 하구나.

내 무덤을 내가 팠다, 내가. 그냥 입 닥치고 듣기만 할걸.

쓰디쓴 회한의 눈물을 삼키며 머리핀을 꾹 쥐고 덤불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참으로 자연스럽게도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아연실색한 얼굴의 아이반 경과 엘레니아, 그리고 다른 모든 티파티 손님들과 처참한 꼴의 프레이야까지.

프레이야는 나를 한번 힐끔 돌아보겠다는 듯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등을 홱 돌렸다. 그러면서 탄식하듯 말했다.

“부인께서 내 말을 좀 오해하신 모양이야. 별일 아니었으니 다들 부디 진정…….”

“뭐라구?”

“네? 공자비께서 영애를 이리…….”

“어머, 세상에…….”

“설마…….”

크게 벌어진 여러 쌍의 눈동자에 일제히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는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문득 성 아그네스 축일 행사 날 벌어진 소동이 겹친 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웅성거리는 술렁임이 벌떼 소리처럼 귓가에 윙윙 맴돈다.

갑자기 토하고 싶어지네.

프레이야의 떨리는 어깨를 굳은 듯 바라보던 엘레니아가 다시 내 쪽을 쳐다보았다.

커다랗게 경직된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매우 무섭게 느껴진다.

“루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내가 여기서 프레이야가 혼자 제 면상에 찻물을 끼얹었다고 말하면 다들 어떻게 반응할까?

시종들이 오가고 있었다 한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장소였던데다 설령 진짜 전말을 봤다 해도…….

“루비.”

“……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여쭈었습니다만. 제가 지금 상황이 잘 파악이 가지 않습니다.”

혀가 따끔거리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왜 자꾸 이런 불필요한 짓을, 이딴 식으로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되는데.

“후으…… 으, 으아아앙!”

그때였다.

급작스레 흉흉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저 머리핀을 찾고 싶었던 레아가 멍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다 말고 불쑥 울음을 터뜨렸다.

지레 겁이 난 모양이었다.

나도 같이 따라 울고 싶구나.

그러나 여기서 운다면 마이너스 요소만 될 뿐이겠지.

난 무해한 철부지 이미지를 원한 거지 뻔뻔한 얼간이 이미지를 바란 게 아니니까.

설상가상으로 그놈의 망할 독살 기도 사건이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지 않은가.

아이반 경으로 말하자면 이 예기치 못한 뜻밖의 소동에 잠깐 완연히 넋이 빠져버린 듯 보였다.

그리고 레아가 울기 시작하자마자 부동 주문이 풀렸다.

이 상황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만 했다면, 나는 아이반 경의 의외의 남매애에 깊이 감복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이게 대체…… 레아, 레아. 야, 너는 왜 갑자기 울고 그래?”

“후으으으, 내, 내 머리핀, 머리핀 때문에, 나 때문에, 흐아아앙!”

가엾은 레아는 아무래도 나와 프레이야가 제 예쁜 머리핀 때문에 싸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나도 좀 좋겠다.

엘레니아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황색 머릿결을 곤혹스럽게 쓸어넘기던 아이반 경 또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나 참……. 부인,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낮디낮은 음성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의 쌍욕 퍼붓는 과격한 모습만 봐와서 그런가, 이렇게 차분하게 정색하는 걸 보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부인?”

연이은 묵묵부답에 아이반 경은 짜증이 나는지 눈매를 약간 일그러뜨리며 다그쳐 왔다.

소녀처럼 곱상한 얼굴로 저러니 그냥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서워 보인다.

심장이 여우 앞의 토끼처럼 세차게 뛰면서 새하얀 공황이 머릿속을 내리눌렀다.

프레이야가 내게 알려주려는 건 바로 이런 거였다.

애초에 이런 수고를 들여 알려주려 들 필요조차 없었지만.

내가 아무리 별개의 관계를 쌓는다 한들 결국에는…….

젠장, 난 그냥 살고 싶은 것뿐인데.

죽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왜 자꾸 나를 시험의 쳇바퀴에 넣으시나이까.

“루비,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겁니까?”

“그만해, 엘렌. 이 이상 소동이 커지는 거 바라지 않아. 부인도 많이 놀라신 것 같고……. 경께서도 어서 가보셔야지요. 꼬마 영애가 겁을 잔뜩 먹으셨네요.”

나긋하게 끼어들며 엘레니아의 어깨에 손을 얹는 프레이야의 눈길이 빠르게 나를 훑고 갔다.

우습게도 책망하는 시선이었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느냐는 듯이.

“흐으우우……. 오빠 바보 멍청아!”

“어억!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쪼끄만 게 진짜!”

흑흑 눈물을 훔치다 말고 불쑥 제 오빠의 손목을 앙 하고 깨문 레아가 이제 식식거리며 작은 손을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몸을 숙여 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아이반 경은 투덜투덜하면서도 순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뭐 하는 걸까?

레아가 아이반 경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동안 다들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대관절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이윽고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다시 바로 세운 아이반 경이 성큼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불안하게…….

“큼, 부인. 부인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분 아니라는 거 압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아까 하시려던 말 계속해 주시겠습니까?”

어린애를 어르듯 부드럽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아까 하려던 말이라니, 난 아무런 운도 뗀 적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끼어들 만한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만, 부인께서 곤란을 겪는 일이 없게끔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 내가 또 가출이라도 할까 봐 우려된다는 뜻인가?

그렇게 무슨 짓이라도 벌일까 봐?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예……?”

“아무 짓도 안 했고 아무 짓도 안 할 거예요.”

입술이 달싹거리면서 얼어붙었던 혀가 멋대로 굴러갔다.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몸이 흠칫 떨려왔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아이반 경이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은 엘레니아의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부인?”

“방금 아무 짓도 안 하셨다고…….”

“아니, 그럼 퓨리아나 영애께서 뭐 꾸며내기라도 하셨다는 건가요?”

다시금 술렁임이 이는 가운데 프레이야가 미소를 머금었다. 여유롭게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요, 우리 그냥 그렇게 넘어가요.”

“……일단 프리, 네 옷부터 어떻게 하자. 오늘 모임은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다들 이해하시겠지요.”

엘레니아가 마침내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움직임과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고조된 분위기가 확 사그라들었다.

어색하고도 떨떠름한 인사말들이 쏟아지는 동안 나는 숨 막히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뻣뻣이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수리에 꽂힌 시선들이 따끔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언젠가 한 번쯤은 일어날 일이었어. 한 번쯤은 이렇게…….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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