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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꽃이네요. 저건 이름이 뭔가요?”
“순간 딴 세상에 온 줄 알았어요. 날이 다시 궂어져도 여기서라면 언제든 봄날이겠어요.”
“카이사르 분수대 맞지요? 로마냐에 여행 갔을 때 비슷한 걸 본 것 같아요.”
다들 연신 감탄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실 정원을 티파티 장소로 정하는 걸 두고 괜히 걱정했다 싶어졌다.
너무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그랬던 것이다.
엘레니아가 이런 건 일부로라도 자랑하는 법이라며 고집했던 것이 옳았다.
그래, 자랑한다고 욕먹는다 한들 새삼 어떠랴. 철부지 애 같은 공주님 역에 딱 어울리는데 뭐.
“왕녀께서 공자비를 잘 따르신다더니 사실이었군요. 평소에 저기서 자주 함께…… 놀아주시는 건가요?”
그럼에도 누군가가 불쑥 저리 질문했을 때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흑, 살아남기 힘들다.
우리가 둘러앉은 티테이블 너머, 데이지와 라벤더가 우거진 미로 덤불 옆에 거대한 인형의 집이 있었다.
파스텔톤 색을 칠한 원목으로 짠 인형의 집 안에서는 오늘의 또 다른 손님들인 레아와 아리엔 공주가 자기들만의 티타임을 열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차 따라 드릴게요.”
“오늘은 네가 공주님인데.”
……평소에 나도 저기에 종종 어쩔 수 없이 낀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하여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으며 차를 홀짝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정말 소문대로 호화로운 정원이군요. 우리 저택에 있는 온실은 댈 것도 아니네요. 소공작께서 부인을 정말 많이 생각하시나 봐요.”
눈을 반짝이며 화제를 다시 돌리는 영애는 바로 얼마 전에 열린 연회에서 나와 부둥켜안은 바 있는 영애였다.
왜 그 발코니 뒤쪽에서 내 뒷담을 늘어놓다 딱 걸렸던 영애 중 하나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리 참석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어지간히 하찮게 보이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내 옆자리에 앉아 기품 넘치는 몸짓으로 찻잔을 들던 엘레니아가 나붓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오빠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빅토리나 영애.”
“어머, 공녀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정말 두 분 사이가 각별하신가 봐요.”
“보는 쪽이 괴로울 정도이니 알 만하지요. 안 그래?”
“그러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걱정될 지경이네.”
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한 프레이야가 주변을 돌아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상쾌한 웃음.
넌 우리 같이 있는 거 별로 본 적 없잖니.
휴, 엘레니아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 건 정말 고마우나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프레이야가 빠질 수 없다는 사실이 영 그렇다.
엘레니아의 절친인 만큼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쟤가 있으면 불안하단 말이야.
차라리 콘솔라시온 영애 같은 부류가 속이 뻔하기도 하고 시비 거는 것도 어린애다운 수준이라 편하지.
한데 오늘은 안 보이네, 서운하게.
대화는 금방금방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북부와 남부의 사교 문화 얘기, 서리용의 기상에 대한 얘기, 패션 얘기, 곧 다가올 검투 경기 대회 또한 당연히 언급되었다.
“참, 이번 검투 대회에 이스케 경께서 참석하시는 거 맞나요? 다들 그럴 거라고 하던데.”
“저도 아직 확답은 못 들었지만 참석할 듯해요.”
“예전에 최종 우승하셨던 거 알고 계시지요? 게다가 역대 최연소였잖아요.”
“아아, 전 그때 그 모습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공녀님께 영광의 꽃을 바치시던 풍경이 참 부럽기도 하고 설레더라고요. 왜 우리 오빠는 그 모양 그 꼴인지 원…….”
“한데 올해는 특별히 더 경쟁이 치열할 것 같더군요. 듣자 하니 도리아스에서도 후보들을 보낸다던데…….”
예쁜 접시들에 맛깔스럽게 담긴 디저트가 참 많게 느껴진다.
요즘 들어 토하는 횟수가 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엘레니아 눈치를 봐서 초콜릿 푸딩을 최대한 맛있게 맛보는 척하고 있는데, 하필 그때 누가 도리아스 어쩌고 하는 바람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도리아스라면 가까운 미래에 자기네 왕자랑 엘레니아의 혼담을 제안할 그 나라 아닌가.
그 혼담 때문에 엘레니아가 내 친정에 의해…….
거참, 읽은 지 꽤 오래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것 때문에 체시아레가 무작정 엘레니아를 제거하려 든 게 참 캐릭터랑 안 맞는단 말이야.
안 그래도 적이 많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대놓고 북부를 건드리다니,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똑똑한 놈이 말이다.
거기서 나, 루드베키아는 결혼 취소 후 로마냐로 돌아가기 전날 엘레니아와 단둘이 차를 들었고, 엘레니아는 보름간 정체 모를 독에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다 숨을 거두었다.
그 죽음을 둘러싼 모든 정황이 너무도 명백했다.
어쨌든 내가 루드베키아가 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올겨울에 결혼 취소를 할 일도 없을 것이고 엘레니아에게 독을 먹일 일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도 없는 게, 상황이 변한 만큼 이후 이어질 일련의 과정들 또한 내가 기억하는 원작과는 다를 터였다.
내가 이스케와 초야를 치렀다는 사실을 지금쯤 친정에서도 알 텐데,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체시아레가 과연 내게 엘레니아의 암살을 맡길까.
그 미친놈은 아마 내가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이 결혼을 박살 내고 오메르타 가문에 엿을 주려 들 것이었다.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이번에 그놈이 오면 죽을 맛일지언정 열심히 딱 붙어서 꿍꿍이를 파악해야겠다.
에렌딜에 있는 그놈 하수들이 누군지, 앞으로 뭔 짓을 벌일지, 사소한 단서라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아이고, 벌써부터 괴롭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