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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공작님께서 잠시 찾으십니다.”
남편 놈을 배웅한 뒤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가려는 찰나 집사장이 나타나 아버님이 나를 좀 보자신다고 일렀다.
심술 맞은 아버님이 무슨 일로 오늘날 이 시점 나를 찾으시나?
그토록 내게 종용했던 의무 문제가 해결된 이후 여태까지도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는데.
“아, 부인.”
아들내미 못지않은 배배 꼬인 심보의 소유자인 오메르타 공작은 마구간에서 나를 맞이했다.
멋들어진 외출복 차림에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쪽도 막 외출하시려던 참인가 보다.
“찾으셨어요, 아버님?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궁중 회의가 있어서 말이오, 날도 좋고 해서 모처럼 말을 타고 갈까 싶소.”
그렇군요.
나는 마구간지기가 안장을 채우고 있는 회색 종마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검은색과 회색 털이 얼룩진 우람찬 근육질의 종마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망할 것들.
“멋진 말이네요.”
“승마를 좋아하시오? 하긴 로마냐에서 사냥제도 자주 참석하셨을 테니, 어지간한 실력으론 견줄 바가 아니겠구려.”
“꼭 그렇지도 않아요. 사냥제라 해봤자 진짜 사냥에 참석하는 것도 아닌걸요.”
그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작이 무심한 듯 달관한 듯한 낯짝으로 가죽 장갑 소매를 갈무리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처럼 순진하게 웃는 낯짝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뭐야, 하고픈 말이 뭐냐고……!
“아들놈이 부인에게 보석 창고 열쇠를 넘겼다 들었소.”
아, 역시 그건가. 하긴 공작 입장에선 못 미더울 법도 하지.
그래도 반납하라고 하면 좀 곤란한데.
난 이 부자 싸움에 끼어서 등 터지고 싶지 않은걸.
“그래, 그놈이 그걸 주면서 뭐라고 하더이까?”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고로, 나는 다른 말을 생각해 내야 했다.
“믿고 맡길 테니 잘 관리해 보라고…….”
“흠. 그다지 그놈답게 들리지는 않는구먼.”
그놈다운 건 또 뭡니까? 쌍으로 배배 꼬인 부자 같으니라고.
공작은 마구간지기를 비롯한 시종들을 물린 뒤 마침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로 응시했다.
자식들과 꼭 같은 붉은 눈동자에 어딘가 복잡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역시나 그 팔찌는 부인에게 갔구려.”
“네?”
“연회가 열린 밤에 그놈이 주지 않았소? 멋대로 뺏어가길래 대체 어디다 쓰려나 궁금했는데, 굳이 왜 그걸 극구 고집한 건지 원.”
“뺏다니요? 저는 이게…….”
“내 조부께서 암굴용의 심장으로 만든 거요. 딱히 가보라 치기도 뭣하지만.”
나는 눈을 깜박이며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 보석의 정체가 용의 심장이었다고?
좀 독특하다 싶긴 했는데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가보라니.
그럼 그때 아버님이 그리 못마땅해 뵈는 모습으로 연회장에 나타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으려나? 하고 의문을 품는 찰나 내 속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아버님이 빠르게 헛기침을 했다.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던 건 미안하게 됐소. 그런 자리는 본래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겠다 싶어 갔더니만 아들놈 옷 주워입은 꼴이 가관이라.”
아하, 진짜로 아들내미 옷 걸친 꼬락서니 보고 화나신 거였단 말인가?
영 의심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활짝 웃었다.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그것보다 전 이 팔찌가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장신구라고만 생각했는데…….”
“돌려달라 안 할 테니 염려하실 것 없소이다, 약언까지 끝낸 마당에 이제부터 엄연한 이곳의 안주인이시니.”
“아…….”
“그나저나 지금 생활에 퍽 만족하고 계시는 모양이오. 이 척박하고 무료한 땅이 마음에 드시나 보오.”
묘하게 냉소적인 말투였다. 귓가가 따끔거리면서 땀이 솟았다.
이런, 또 뭐를 요구하려고…….
“무료하다 느낀 적은 없어요. 오히려 어떤 면에선 로마냐보다 더 흥미로운걸요.”
“그렇소?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하실 줄 알았소만, 부인은 언제나 의외의 모습만 보이시는구려.”
“의외의 모습이라니요?”
“오해 마시오. 부인 같은 사람이라면 아무런 연줄도 없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신전과 연을 다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소. 에렌딜의 신전은 언제든 부인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말이오. 북부에 적응하는 것부터 모든 사소한 문제까지. 난 솔직히 일전에 부인이 그러한…… 가출 소동을 일으켰을 때, 실은 신전에서 보호 중이면서 비밀에 부치고 있는 걸 거라고 짐작했었소.”
아하. 즉, 내가 원작의 루드베키아처럼 신전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며 성직자들이랑 어울리지 않아서 수상하다 이건가?
해도 안 해도 수상하다 여길 거면 대체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거야?
“전 워낙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솔직히 이젠 성가만 들어도 졸음이 쏟아지거든요. 물론 대주교님도 그렇고 다들 엄청 친절하시지만요. 제가 좀 더 신앙생활에 신경 쓰길 바라시는 건가요?”
꿋꿋하게 철부지 연기에 매진하자 아버님은 잠시 말없이 턱을 긁적였다.
“그런 건 아니오. 다만 성하께서 우리가 부인을 꼼짝 못 하게 한다고 오해하실까 싶었을 뿐이오.”
“아하하, 그러시진 않을 거예요. 제가 진심으로 이곳을 좋아한다는 거 아실 테니까요.”
“이곳이 좋은 거요, 내 아들이 좋은 거요?”
시, 시험인가? 나의 열성팬 연기를 얕보지 말아요, 아저씨!
“당연히 제 남편이 좋은 거지요.”
“그 무뚝뚝한 놈 어디가 그리 좋으신지 모르겠소. 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오자마자 부인을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오빠가 들볶는다 해도 저는 절대 안 따라갈 거예요.”
초야까지 끝낸 마당이니 체시아레가 멋대로 나를 데리고 갈 요량도 없다.
대체 아버님은 내게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이제 와서 나중에 이혼시킬 문제로 골치가 아파진 걸까?
내가 순순히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아서?
“조금 놀랍구려. 그놈이 그리 속을 썩였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더 많이 썩였는걸요, 뭐.”
“내 아들놈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시오?”
“음, 일단 첫눈에 반했달까요.”
“‘첫눈에 반했다’라. 운명적인 사랑 뭐 그런 거요?”
“어머, 낭만적이시네요.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들며 손을 양 뺨에 갖다 대면서 눈을 초롱초롱 떴다.
오메르타 공작은 그러한 내 발악을 좀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나 싶더니, 이윽고 불쑥 내뱉었다.
“사실이 아니지 않소.”
“네……?”
“진심이 아니지 않소.”
이건 또 뭐람.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랗게 열린 내 눈을 마주 보는 공작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요. 그렇다고 그리 겁먹으실 것 없소, 이 자리에서 따지고자 하는 게 아니니.”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거야 이 아저씨는?
“아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피처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거야 비일비재한 일이지. 나 또한 그런 사람을 겪은지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소이다.”
그런 사람을 겪어?
당신 아내 말하는 거야? 불같이 시작했다가 파국으로 치달은 당신들의 결혼 얘기?
그런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는데.
뻣뻣이 얼어붙은 나를 향해 공작이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쓰라리고 뒤틀린 느낌의 미소였다.
“브리타냐의 왕녀가 타국의 모후 자리도 모조리 거절하고 당시 견제 대상이던 오메르타를 택한 이유는 단지 에렌딜을 떠나기 싫어서였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소? 나는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지나치게 스스로를 과신했던 게지.”
그러니까 안 궁금하다고요.
왜 갑자기 묻지도 않은 얘길 멋대로 떠드는 거야? 그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평생 검만 들고 방황하다 어디 가서 객사나 하지 않을까 싶던 아들놈이 요즘 들어 생판 딴 놈처럼 굴고 있는데,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인지 새삼 걱정이 다 이는 거 아니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소?”
“…….”
“내가 괜히 부인을 부채질했나 싶기까지 하더이다. 첫정이란 게 그리 무서운 것일 줄은……. 아니, 나 또한 그랬으나 내 아들놈만은 다를 줄 알았소. 워낙 인간미라곤 없는 놈이니 예외일 거라고. 한데 내 감은 또 그게 단순한 첫정의 열정만은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구려.”
그래서…….
“나는 부인이 살아온 내막을 알지 못하오. 따라서 부인이 원하는 게 그저 도피처인지, 혹은 무슨 다른 정치적 수인지 알 길이 없소. 단지 보면 볼수록 죽기 살기로 발버둥 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
“…….”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우습기 그지없겠지만……. 가망이 있는 거요? 내 아들한테.”
그래서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데?
애초에 당신이 우리 혼사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이유는 아들내미 버릇 고치고 싶어서였잖아.
나는 연습용으로 들인 것뿐이잖아.
염두에 둔 진짜 며느릿감은 따로 있잖아.
그놈의 의무 타령해댄 것도 나중에 나랑 이혼시킬 때 뭐라도 더 얻어내려고 그런 거였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내 진심 여부를 따지고 드는 거람?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데?
내 진짜 감정이 대체 뭐가 중요한데?
아들내미가 나한테 첫정이 들어버려서 나중에 떼어놓기 어렵겠다 싶어진 거라면 오히려 이런 소리 늘어놓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알 만큼 아실 양반이 왜 갑자기 이상한 수작질이지?
당신 아내가 그렇게 된 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귀밑이 따끔거리면서 짜증이 치솟았으나 얼른 떨쳐냈다.
아냐, 말장난에 휘말리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뻣뻣하게 굳었던 안면 근육을 풀었다.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제가 뭔가 언짢게 해드렸나요?”
정적이 스쳐 갔다.
공작이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팽팽하게 곤두섰던 기류가 다시 느슨하게 풀렸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군.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