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마녀와 공주님
맑은 햇살이 원형 유리 벽을 뚫고 쏟아지며 사방을 반짝거리게 만든다.
연두색으로 빛나는 잔디와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색색의 장미, 라일락과 백합, 달리아, 유채꽃, 루드베키아, 피튜니아,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알록달록한 꽃들, 무엇보다 시원한 소리로 물질하는 온갖 형태의 분수들.
로마냐로 되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내 친정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남부의 자연과 기후를 내심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빛으로 쏟아지는 태양 빛과 따스한 바람, 시에스타와 셔벗, 밝게 바랜 고수머리에 레이스 양산을 든 여인들과 피부를 구릿빛으로 그을린 남자들의 풍경.
내가 전생에 살았던 곳과 비슷한 느낌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뱃놀이를 해도 되겠군요.”
나를 따라 온실 정원에 입성한 엘레니아가 웅장한 폭포 분수와 수로를 보고 차분하게 던진 소감이었다.
딱 그녀다운 말이라 웃음이 나왔다.
“엘렌, 백합 좋아하지요? 제가 화환 만들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퍽 떨떠름한 대답이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언젠간 반드시 저 냉남매 머리에 화환이 얹어진 꼴을 보고야 말리라.
내가 그런 시커먼 간계를 꾸미며 백합과 다른 꽃들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동안 엘레니아는 장미목 벤치에 걸터앉아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누가 꽃이고 누가 사람인지 모르겠군.
“이게 남부식 정원이라는 거군요. 그곳에선 온실 형태가 아니겠지만, 많이 비슷합니까?”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많이 비슷해요. 마음에 드시나요?”
“네, 근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선 양식 자체가 다르니까요.”
바퀴벌레 뺨치는 번식력을 자랑하는 노움들이 심심하면 뜰에 땅굴을 파놓고 살림을 차리는 곳이니 다를 수밖에.
그 탓에 이 온실을 관리하는 전문 정원사는 신전 포도원 관리인 출신이란다.
어지간하면 이런 거 만드느라 예산과 인력을 낭비하는 대신 보안 증력에 쏟아부을 터였다.
“그나저나 벌써 초대장이 꽤 쌓였더군요. 전부 루비 앞으로 온 겁니다.”
“아……. 고마운 일이네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일일이 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무리는 금물이신 데다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으시니, 본격적인 사교 활동은 축제 시즌이 끝나고 나서 시작하셔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차차 안살림도 익히셔야 하고요.”
로마냐에서는 사교 활동이 일상이었다.
그곳에서의 내 신분과 입지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고, 내가 초대를 받아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주최하는 일이 더 잦았다.
사족으로 나보다는 아버지의 정부들이 주최하는 모임이 더 호화판이기도 했다.
품위에 신경 쓰는 몇몇 이는 경멸과 호기심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몰래 참석한다는 거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여태 참석한 변변한 사교 활동이라곤 하나같이 비극으로 끝난 승마 모임과 성 아그네스 축일 자선 행사가 전부였는데, 남편 놈이 연회를 한 번 열어주고 나니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마구 날아온다.
간단한 티타임 초대에서부터 온갖 사교 모임 초청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물론 비단 연회 건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식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탓도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마침내 도도한 남편 놈과 성을 쌓고 신전에서 약언식을 치른 것이다! 호호.
댕댕 울려대는 신전의 종소리가 어찌나 성스럽게 들리던지, 무표정한 듯 떨떠름한 대주교의 눈빛조차 따사롭게 보일 지경이었다.
“엘렌 말이 맞아요. 그렇지만, 저어, 제가 갑자기 이것저것 간섭하려 든다면 다들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이자 엘레니아의 음성이 대번에 서늘해졌다.
“엄연히 이 집안의 안주인이시거늘 누가 감히 간섭이라 여긴단 말입니까? 그런 불손한 자가 있다면 즉시 쫓아내고 말 일입니다.”
아이쿠,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살벌하기 그지없다.
고마운 말이긴 하나 그다지 현실성은 없었다.
오메르타 성의 가신들은 내게 어쨌느냐를 떠나서 하나같이 오래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고, 하녀장만 봐도 쫓겨나거나 할 가능성은 극히 미비했다.
분명 내가 갑자기 엘레니아 대신 안살림을 떠맡기 시작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터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약언까지 치른 판국에 언제까지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순 없는 노릇, 흉내만이라 한들 최대한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봐야지.
“고마워요. 제가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요. 이미 세워져 있는 질서를 괜히 어지럽히고 싶지도 않고요.”
“편할 대로 하십시오. 다급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차근차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미묘한 어조로 말을 이은 엘레니아가 눈을 내리깔며 맞잡은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봤자 초반 몇 년은 하녀장이 다 한 셈이지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어머니께선 그때부터 상태가 도저히 제정신이라 볼 수 없었습니다. 비단 그 습관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루비와는 또 다르셨습니다.”
“아…….”
“그때도 말씀드렸듯 식사습관을 아는 건 저를 비롯한 소수 가신뿐이었지만, 다른 모든 행동 또한 정말 이상하셨거든요. 치장에 대한 과한 집착이라든가, 극도로 사치를 부리시는가 하면 또 갑자기 극도로 청빈을 고집하시며 온갖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기부에 쏟아붓는다든가, 하루는 극도로 활기차시다가 또 다음 날엔 종일 침소에 틀어박혀 우시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홍옥 같은 눈매에 씁쓸한 기운이 어렸다.
문득 안쓰러운 기분이 일었다. 내가 누굴 안쓰러워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우울증과 그에 기인한 식이장애의 조합이 얼마나 본인을 포함한 주변 이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내 전생의 언니도 그런 식으로 파국에 치달았으니까.
그 마음의 병을 알고 있던 이가 얼마 안 된다는 점 또한 죽은 공비와 비슷했다.
단 언니는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감추었을지언정 현대의학의 감정과 이해라도 받았으나, 공비는 이 세계관의 관점으론 이해도 정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인권이나 정신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시피 한 세계이니 원.
“어머님께선 왜…….”
“글쎄요, 그건 저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그리 불행하셨는지……. 오빠와 아버지 사이가 그렇게 된 것도 전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입니다.”
“아버님께서 뭔가 잘못하셨던 건가요?”
“부부 싸움이 잦으셨긴 한데 그땐 제가 어리기도 했던지라 알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오빠가 팔라딘이 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구울이 됐을 어머니를 만나려는 순진한 생각에서요.”
팔뚝에 소름이 약간 돋으면서 가슴 한구석이 알싸해 왔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이미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마물로 변했을 어머니를…….
“물론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이 얘기는 비밀입니다. 제가 루비한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노발대발할 겁니다.”
드물게 농담조의 말투였다. 나는 화환을 엮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아무튼 그때 엘렌도 엄청 힘드셨겠어요.”
“다들 그랬지요. 돌아가신 원인도 하필……. 오빠는 그때 장례식도 참석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프리가 겨우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안 갔을 겁니다.”
으윽, 잘 나가다 갑자기 프레이야라니. 과연 소꿉친구의 위엄이긴 하구나. 어릴 때부터 그만한 서사가 있으니 각별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둘만 있는 아리따운 온실 정원 속에 누군가가 침입해 온 것은 그때였다.
“마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집에서 호위 기사가 날 찾는 것도 드문 일이거늘 손님이라니, 나한테 올 손님이 누가 있지? 내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드는 찰나 엘레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라 하더냐?”
“그것이, 공자님께서 보내셨다 하셨습니다만…….”
“뭐?”
“롱기누스 소속분들입니다, 공녀님.”
이건 또 뭐람. 이 볕 좋은 대낮에 팔라딘 녀석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그것도 남편 놈이 보내서?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건 엘레니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슨 용건이라지?”
“그것이, 저도 잘…….”
나는 반쯤 완성된 화환을 쥐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왠지 아무래도 내 비밀이랑 연관이 있는 일 같은데.
“일단 오셨다니까, 아쉽지만 화환은 나중에 완성해 드릴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뭣하시면 제가 같이…….”
“아니에요, 엘렌도 오늘 약속 있다면서요. 어차피 이스가 보냈다니까 괜찮겠죠.”
“그럴 만한 인간들이 못 돼서 말입니다, 피차.”
내 말이 그 말이었다. 그러나 엘레니아는 이내 요즘 들어 이스케가 영 죽을 때가 다 된 것 같이 구니 뭐든 가능할 것 같다면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이쪽으로 모시라 하는 게 낫겠군요. 저도 슬슬 가볼 때가 돼서, 나가는 길에 여기로 차를 내오라 지시해 놓겠습니다.”
“고마워요, 엘렌.”
그렇게 잠시 후 아리따운 온실 정원에서 아리따운 시누이 대신 시커먼 팔라딘 놈들과 오붓하게 차를 드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오늘도 화환을 만들던 중이셨습니까? 꽃향기가 기가 막히는군요.”
시커먼 놈에서 아이반 경은 빼주자. 암, 한 떨기 꽃 같은 아이반 경이잖아.
“경들도 만들어 드릴까요?”
“예? 아, 뭐, 그야, 네, 영광입니다.”
이 따사롭고 화사한 물의 정원에서 그 아이반 경조차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같이 온…… 카뮤 경이라 했던가?
물빛 말총머리의 팔라딘께서는 지난번과 같은 까칠한 듯 시크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발밑의 꽃을 조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불곰 같은 갈라르 경은…… 음, 오늘은 한 마디도 없으시네. 머리에 나비 앉았어요, 기사님.
“큼, 실은 부인, 저희는 누가 보내서 이리 찾아뵌 게 아닙니다.”
오, 그렇군요. 누가 몰랐을까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실은 긴밀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혹여나 다른 분들이 수상쩍게 여기실까 하여 그리 둘러댄 것뿐입니다.”
그래서 둘러댄답시고 댄 이유가 고작 이스케가 보냈다는 거요? 무슨 팔라딘들이 이렇게 허술하담?
“어머, 무슨 부탁이요?”
잠시 침묵이 좀 흘렀다.
내가 순진한 척 찻잔을 쥐고 방긋거리는 가운데, 세 허술하기 그지없는 팔라딘들은 뜻 모를 시선 교환을 하나 싶더니 이내 나란히 헛기침하면서 상대방의 팔꿈치를 툭툭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이것들.
급기야 더는 못 견디겠다는 기세로 나선 이는 의외로 카뮤 경이었다.
카뮤 경은 뭔가 못마땅한 건지 원래 그런 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 서리늑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도감만 조금 본 수준이에요.”
“그렇군요. 그 도감…… 인지에도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좀체 숲 밖으로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마수치곤 머리가 꽤 좋은 편이라 먼저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요.”
그건 도감에도 나왔었다. 브리타냐의 서리숲과 위령숲 일대에 서식하는 서리늑대는 그 온갖 마물 중에서도 용과 더불어 꽤 독특한 취급이었다.
마수와 짐승 중간 정도라고 할까, 보통 마물들은 죽으면 마정석만 남기는데 서리늑대는 그냥 짐승처럼 시체를 남겼다. 용이 심장과 마정석을 남기듯이.
마정석을 얻으려면 시체의 배를 갈라야 한다던가.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 카뮤 경이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에 어깨 주변을 맴도는 나비들을 쫓으려 팔을 휘젓고 있던 아이반 경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대강 설명해 드리자면 자기들끼리 마굴에 모여 살면서 우리한테 거의 피해를 안 주는 새끼들입니다. 게다가 희년에 행사를 앞두고 서리늑대를 죽이면 재미없는 일이 생긴다는 말도 있는데, 뭐 미신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꺼림칙하긴 하지요. 아시겠지만 부인, 올해는 희년인 데다 곧 검투 경기라는 국제적 행사가 열리지 않습니까.”
“네. 그런 미신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토박이들만 아는 시답잖은 미신이긴 합니다. 아무튼 요는 지금 문제가, 그 얌전한 새끼들이 서리용이 일어났다고 자기들도 흥분했는지 아니면 밀렵꾼들이 흘리고 간 약이라도 주워 처먹었는지 갑자기 안 하던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 그 X발 부모 뒤진 것들. 하여간 밀렵꾼 새끼들은 보이는 족족 잡아 멱을 따야…….”
“아이반.”
“X발, 뭐…… 아, 이게 아니라, 아무튼 그 서리늑대들이 갑자기 떼로 민가에 몰려와 농성 중인 거 아니겠습니까. 사정을 듣자 하니 어젯밤부터 이 볕 좋은 대낮까지 내내 그러고 있었다는데, 다행히 아직까지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기세가 워낙 사나워 언제 떼로 덤벼들지 모를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희도 무작정 잡아 죽이기는 역시 걸려서 이리 찾아오게 된 겁니다.”
장황하게 설명을 끝마친 아이반 경이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카뮤 경과 갈라르 경은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좀체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는 서리늑대가 갑자기 떼로 몰려와 위협 중인데 미신이 마음에 걸려서 나한테 왔다?
“제가 무얼…….”
“그게, 부인께서라면 그 새끼들이 왜 그 지랄 중인지 이유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시다시피 말입니다.”
통역을 부탁한다 이건가?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포포네랑 관련된 일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게다가 죽이는 걸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농성 이유를 좀 알아달라니, 얼마나 양호하기 짝이 없는 부탁인가?
“저야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지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 거기서 서리늑대랑 만나 본 적은 없거든요. 전부 저랑 소통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기도 어렵고요.”
“저희 또한 그런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단지 혹시나 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무엇보다 절대 위험에 처하실 일 없도록 철저히 방어할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 남편도 거기 있나요?”
그 질문을 하자마자 즉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적이 내렸다.
으윽, 역시 몰래 온 거구나.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반 경 대신 까칠한 카뮤 경이 비아냥대듯 대꾸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이리 부인을 찾아온 걸 알면 아마 그 자리에서 목을 따 서리늑대 밥으로 던져주려 들 겁니다.”
“야, 너는…….”
“왜, 사실이잖냐.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부인. 딱히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쿠당!
티 테이블이 지진을 일으켰다. 내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카뮤 경과 아이반 경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싸우자.”
“……넌 또 갑자기 왜 이래? 미쳤냐?”
“검을 뽑아라, 카뮤.”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야, 검 안 쑤셔 넣냐! 여긴 실내라고 미친놈아!”
잠깐의 실랑이 끝에 속 모를 갈라르 경은 뽑았던 검을 집어넣고 도로 얌전히 앉았다.
아이반 경이 차마 들어주기도 뭣한 욕설을 퍼붓는 동안 카뮤 경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진땀을 닦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것들을 보고만 있었다.
“큼, 말투가 불손하게 들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여튼 한시가 급한데…….”
“할게요.”
“예?”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볼게요.”
이들은 그날 서리숲에서 내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들이었고, 이스케랑 어떤 작당을 했든 간에 일단 침묵을 지켜주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일종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만큼 무리한 부탁도 아니니 들어주는 게 마땅했다. 아니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이스케의 동료들이자 오래된 친우들이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 보면 조금씩이나마 나쁜 의혹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또 언젠가는 포포나 다른 애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그럼, 약소하지만…….”
자기들이 부탁하러 온 주제에 참으로 의외라는 듯 멍하니 나를 응시하던 놈들이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뭐지, 돈주머니라도 챙겨왔나?
“부인께서 초콜릿을 매우 좋아하신다 들었기에 이리…….”
대체 어느 놈이 그딴 유언비어를 퍼뜨리디? 내가 애냐, 이 새끼들아!
“승마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시군요.”
초콜릿을 대금이랍시고 주는 망할 놈들과 함께 말을 타고 도착한 장소는 대장간과 무기상이 밀집해 있는 으슥한 외곽이었다.
숲과 가까워서 그런지 날이 화창한데도 유독 축축하고 어두운 느낌이다. 나는 머리에 두른 후드를 꼭꼭 여미며 아이반 경을 향해 생긋 웃었다.
“경들만 할까요.”
“저보다 더 뛰어나신 듯한데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기분이군요.”
고작 말 타는 것 가지고 놀랍기까지야. 주변을 둘러보니 일대는 온통 텅 비어 있었다.
보초를 서는 도시경비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든 것 같은 분위기.
누가 나를 알아보면 여러모로 곤란하니 미리 봉쇄해 놨다던데 과연 그런 듯했다.
“저쪽입니다, 부인. 도무지 꿈쩍할 생각도 안 해요.”
뿌옇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둑 주변으로부터 으스스한 기운이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길 거부하는 말들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갈수록 성마른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카뮤 경이 검을 들고 앞장서는 동안 아이반 경과 갈라르 경은 내 양옆에 붙어 있었다.
살기가 충만한 으르렁거림. 안개 너머로 수 쌍의 적색 안광이 난폭하게 번득인다.
용 새끼만 일반적인 마물들이랑 다른 건 줄 알았는데, 쟤들도 눈이 형광 녹색이 아니구나.
“크르르르르…….”
우리는 서리늑대 떼로부터 2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섰다. 잠시 침묵이 좀 흘렀다.
“부인?”
“네, 카뮤 경?”
“아, 뭔가 들리시는 거라도…….”
까칠하게 생긴 양반이 왜 이렇게 어벙하게 구는 거요?
난 마물들 언어를 통역할 줄 아는 게 아니라 걔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 것뿐이라고!
한 손에는 검을 쥔 채, 다른 손으론 묵묵히 내 초콜릿을 꺼내 잡수던 갈라르 경이 입을 열었다. 곰이 꿀단지 먹는 풍경이 연상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듯하다.”
“그런가?”
한 5미터쯤 더 나아가자 바로 코앞에 성난 늑대 무리가 나타났다.
강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하얀 털의 마수들은 형형한 눈만 제외하면 정말 그냥 평범한 늑대처럼 보였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나보다는 너희가 더 긴장하고 있는 듯한데 말이지.
내게로 쏟아지는 조마조마한 시선들을 느끼며 나는 카뮤 경을 제치고 앞으로 살짝 나아갔다.
무리의 선두에 서서 이쪽을 꼼짝 않고 노려보는 서리늑대가 눈에 띄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유독 더 몸집이 큰 녀석이었다. 쟤가 우두머리인가?
서리숲에서 온갖 마물을 본 데다 용 새끼한테 쫓기는 경험까지 치른 덕에 간이 커지기라도 했는지, 별로 무섭다거나 위협적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크릉…….”
피가 고인 듯한 눈동자가 광포하게 번득거렸다. 이 나라 마수들은 전부 눈알에 형광 불이라도 박은 걸까.
나는 마른침을 좀 삼키고는 우두머리 녀석을 향해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안녕.”
“…….”
“너 참 잘생겼구나? 왠지 누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한데.”
알파 서리늑대는 대꾸가 없으셨다. 과묵하기도 하셔라. 너도 도도과니?
“부인?”
등 뒤에서 아이반 경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꼼짝 않고 서서 나를 꼼짝 않고 노려보는 도도한 늑대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슬퍼 보여.
왜인지 모르겠지만 슬퍼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이성을 잃고 폭발 일보 직전임에도 무언가가 걸려 애써 초조하게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끄응…….”
“응?”
“끄응, 끄응…….”
발치에 뭔가가 홱 하고 날아옴과 동시에 누가 내 어깨를 빠르게 잡아챘다.
“부인, 이쯤에서 그냥…….”
“잠깐만요.”
나는 습기로 젖은 눈을 문지르며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자세히 바라보려 애썼다. 그러고는 이내 기겁했다. 하마터면 비명이 나오려는 걸 애써 틀어막았다.
“바, 발……!”
“예? 발이 갑자기 아프신 겁니까?”
“아, 아니요, 발이……!”
기겁하며 매달리는 나를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던 카뮤 경이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으엑 기겁하며 도로 떨어뜨렸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니?
“뭐야, 이거?”
알파 서리늑대께서 내게 뱉은 건 다름 아닌 잘려나간 발이었던 것이다.
거의 내 손바닥만 한 크기에 거대한 발톱과 축축한 털로 뒤덮인 맹수의 발이었다.
“크르르르르…….”
우리가 호들갑 떠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인지, 잘린 발 공격을 펼친 서리늑대는 목덜미 털을 뻣뻣이 부풀리며 무시무시하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이에 다른 녀석들도 똑같이 따라 크고 아름다운 이를 드러내면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살벌하다 살벌해.
“저거 대체 뭐냐?”
“쟤들 발 뜯긴 거 아니냐?”
“절름발이로 보이는 놈은 하나도 없는데.”
영 영양가 없는 놈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흙바닥을 굴러가는 발을 머뭇머뭇 주워들었다. 대기가 진동하는 듯하던 으르렁거림이 뚝 멈췄다.
“끄응…….”
잠시 손안의 발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불현듯 엔죠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언젠가 그가 보여주었던 회중시계가.
이국적인 양각이 들어간 덮개에 붙어 있던 정체 모를 검붉은 보석이.
행운을 불러오는 보석이랬던가.
다시 늑대들 쪽을 돌아보니, 슬픈 알파 서리늑대는 이제 아까보다 더 아슬아슬해 뵈는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대로 일대를 도륙 내기 시작할 것 같은 그런…….
왠지 알 것 같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부인?”
“뭣 좀 알아내신 겁니까?”
“혹시 발이 말을 했습니까?”
이것들은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치미는 한숨을 삼키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미신 말인데요, 누가 그냥 무시한 것 같아요.”
“예?”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지? 나는 서리늑대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웠으나 지금 저 녀석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내게도 생생하게 와닿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이 발 주인을 찾으러 온 것 같아요.”
“발 주인이라면, 동족 말씀이십니까?”
“이 근처에 있나 봐요.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위협만 하는 것 같아요.”
우르릉, 쾅! 아이쿠, 아이코!
타이밍 한번 끝내준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천둥소리에 이어 서리늑대들이 드라마틱한 하울링을 시작했다.
하필 이럴 때 소낙비라니, 쓸데없이 극적이군.
쿵쿵 다가온 갈라르 경이 내 머리 위로 손바닥을 펼치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대장장이 놈들을 족쳐봐야겠군.”
“……이 X발 개 호로 잡놈의 밀렵꾼 새끼들이 뒤질라고 환장을 했나.”
그렇게 결론이 난 듯했다.
대로한 삼총사가 신성한 미신을 깬 인간을 잡으러 일대를 뒤집는 동안 나는 말들과 함께 근처의 움막에서 비를 피할 겸 쉬고 있었다.
강둑 주변의 서리늑대들은 여전히 꼼짝 않고 아까 모습 그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
저대로 괜찮은 걸까. 엄청나게 화난 것처럼 보였는데, 만약 잘린 발의 주인이 이미 죽었다면…….
“춥지 않으십니까? 제 망토라도 덮고 계시지요.”
“아, 고맙…….”
내 목소리가 아련하게 부서져 흩어졌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얼이 빠져버린 내 눈에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앤디미온의 낯짝이 보였다.
네가 왜 갑자기 여기서 나오니?
“앗, 놀라게 해드리려는 작정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부인께서 숨어 계시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거참 한결같구나, 너도. 형을 찾아온 건가? 지금 일할 시간 아닌가? 앤디미온이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즉…….
“어억!”
퍽 하는 장엄한 타격음과 함께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와 땅바닥과 거창하게 포옹했다.
꾸벅꾸벅 졸다 벼락을 맞은 말들이 짜증을 내며 푸릉거린다.
나도 앤디미온도 새하얗게 질려서 일제히 돌아본 그곳에는 다름 아닌 사지를 뻗고 드러누운 까칠한 카뮤 경이 있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사람 말 좀 들…… 야! 야! 잠깐만!”
“진정해라, 이스케! 이곳은 민가다!”
정신 사나운 아우성이 귀를 찔러오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카뮤 경이 우리를 암울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아아, 내 심장이 이렇게 뛰어대는 건 꼭 반가워서만이 아닐 것이야.
나는 조용히 후드를 내리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런 다음 아까 약간 맞아서 빗물을 머금은 레이스 소매와 밤색 치맛자락을 손으로 탈탈 털고, 움막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에 신발의 진흙도 탈탈 털었다.
내가 그 모든 과정을 마치는 동안 앤디미온과 카뮤 경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부인, 부인!”
죽어가는 병사가 어머니를 부르듯 애타게 찾는 소리에 나는 결국 어쩔 도리 없이 슬그머니 움막 밖으로 나섰다.
추적추적 소낙비가 내리는 한복판, 공포스러운 악마의 현신과도 같은 모습을 한 남편 놈과 그를 앞뒤로 격하게 포옹하는 중인 두 팔라딘이 보였다.
너희 남의 남편한테 뭐 하니?
잠시 정적이 좀 맴돌았다.
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얼빠진 낯빛의 도시경비대원들이 입을 벌리고 뜻밖의 동족상잔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게 됐다. 아이반 경이 나를 찾은 순간 이미 텄으니.
“안녕, 여보.”
“…….”
“에헤헤, 제가 서리늑대 구경하고 싶다고 졸라서 이분들이 들어주셨어요.”
나의 처절한 철부지 연기에 찬사를.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비대원들은 내게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서로 뜨겁게 매달려 있는 팔라딘 놈들을 뭐 보듯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처절하게 방긋거리는 나를 시커먼 투구 너머로 응시하는 듯하던 이스케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 팔의 끝에는 우리의 아이반 경이 목덜미를 잡힌 채 쩔쩔매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이스케를 껴안고 있던 갈라르 경 또한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와, 저 둘이 달라붙어도 쩔쩔맬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 괴수인 거야. 새삼 두려움이 몰려오는군.
털썩, 하고 투구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길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퍽!
“……개새끼야, 친 데 또 치기냐!”
괜히 걷어차인 카뮤 경이 사납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스케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으며 내 쪽으로 팔을 뻗어왔다. 몸이 대번에 홱 들렸다.
아이고, 또 병아리 됐어.
“겨, 경…….”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던 앤디미온이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는 얌전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쌍욕을 퍼붓는 아이반 경과 카뮤 경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 갈라르 경이 따랐다.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던 경비대원들은 마침내 시선을 돌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