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북부 최고 장인들의 노고가 한땀 한땀 깃든 유리 온실은 거의 다 완공된 상태였다.
나도 시공 첫날 잠깐 본 이후 처음 와보는 거였다.
달빛에 물들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유리벽의 모습이 밤에 봐도 환상적이었다. 낮에 보면 더 굉장할 것 같다.
“우와…….”
“그럴싸한 분수대를 만든다고 용을 썼는데 로마냐의 것과 비슷할지는 모르겠다.”
사방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밤이라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화려한 계단형 폭포와 그 밖의 다양한 형상의 인공폭포, 수로와 연못 등이 우거진 화원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마치 설화 속에 나오는 물의 정원 같다.
“정말 너무 예뻐요.”
“낮에 보면 또 어떨지 모르지.”
“낮에 보면 더 멋질 거예요. 지금도 환상적인걸요. 진짜 공중 정원 같아요.”
“공중 정원은 또 뭐야?”
아차, 또 말실수했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여기 인간들이 알 턱이 없는데.
“그냥, 소설에서 나온 거요. 어떤 나라 왕이 향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서 만든 정원이에요.”
설명을 덧붙이고 나니 좀 머쓱해졌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왜 그렇게 로맨틱해서는. 괜히 비교되는 것 같잖아.
어쨌든 멋지긴 진짜 멋지구나. 진짜 공중 정원만큼은 아닐지라도.
내가 넋을 놓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이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온실을 만들기까지 보통 예산과 인력이 든 게 아니었을 텐데, 생색을 있는 대로 낼 만도 한데…….
나는 놈의 굵은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고는 매끄러운 볼에 입을 쪽 맞추었다.
반쯤 충동적으로 한 짓이었다. 물론 진도 생각도 있었지만.
동상마냥 조용하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번 신전에서 처음으로 뽀뽀했을 때와 꼭 비슷한 얼굴이었다. 엄청나게 놀란 표정 말이다.
“에헤헤, 너무 고마워서…….”
“…….”
뭐라 말 좀 해주련? 고작 뽀뽀에 매번 이런 반응이라니 민망하기 짝이 없잖니. 성을 쌓는 일이 시급하거늘.
커다랗게 벌어진 붉은 눈이 어설프게 웃는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또 갑자기 힘들어 보이는 것 같은 건지 모르겠다. 얘 진짜 이상해. 너 진짜 이상해.
왜 자꾸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마치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한참 만에 울린 음성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스케는 다시 원래의 도도한 낯짝으로 돌아와서는 근처에 놓인 벤치에 나를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주변에 달빛에 반짝거리는 장미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에 질식할 것 같다. 또다시 침묵이 내리는 게 싫어서 나는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엘렌은 백합이 가장 마음에 든다던데, 당신은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나요?”
“시스티나의 종달새.”
뭐요?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나를 칭하는 유명한 별명 중 하나였기에 새삼 놀랄 것도 없었으나, 이스케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마치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몸이 흠칫했다.
“왜 그들이 너를 시스티나의 종달새라고 부르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벤치에 걸터앉아 한 팔을 내 등 뒤로 걸치고 있는 이스케는 달빛 탓인지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옷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타락한 교황과 그 자식들을 처리하러 온 신의 암살자 그 자체 같잖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어렸을 때, 큰오빠의 생일날 노래를 부르고 나서부터……. 좀 웃긴 별명이긴 하죠.”
시스티나의 종달새건 천사건 그딴 별명들은 아버지의 정부들에게나 주라고 하지.
나는 그 망할 별명들이 참 싫었다. 원래의 루드베키아는 어찌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노래에도 소질이 있나 보네.”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하는 거죠. 남부에서는…….”
“남부에선 흔히 거북이를 무서워하나?”
이런. 내가 아까 그런 꼴을 보였으니 묻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만, 꼭 지금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 아니에요.”
“실물도 아닌 장식만으로 그리 놀랄 정도면 뭔가 계기가 있었을 법한데.”
계기라면야 있었다. 전생에.
전생의 나는 열두 살 생일날 선물 받은 관상어가 큰오빠의 애완용 거북이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본 이후부터 거북이를 무서워했다.
가족들은 내 공포증을 매우 한심하게 여겼지만.
그리고 여기서는……. 글쎄, 그걸 들킨 건 체시아레가 나한테 기념품으로 사다 준 그 황금 거북이 때문이었지.
그때 일을 떠올리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내색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런 겁먹은 눈 절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진짜 실물도 아닌데 그까짓 게 뭐라고.
“미리 말해줬다면 그렇게 놀라게 만들지 않았을 거야. 거북이 장식 식기는 이곳에서 꽤 흔한데 그동안 어떻게 참은 거지?”
뱀처럼 가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 힘들었으나 어설프게 피하면 안 될 것 같아 애써 꿋꿋이 눈을 부릅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까 그건 눈이 너무 진짜 같았던 데다 또 창피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너는 참는 게 버릇인 건가?”
“제가 인내심이 좀 강하긴 해요.”
그래서 너의 한결같은 재수 없는 도도함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란다. 호호.
능청스럽게 생글거리자 재수 없는 남편 놈은 할 말을 잃은 모양인지 말을 돌렸다.
“네 친정 식구들 말인데.”
나는 하마터면 웃다 말고 혀를 깨물 뻔했다. 잘 나가다 얘기가 왜 또 거기로 흘러가니?
“네 아버지와 오라비들. 어떤 사람들이야?”
“그건 갑자기 왜…….”
“남편이 처가에 대해 묻는 게 이상한가? 특히 네 첫째 오라비는 조만간 만나게 될 듯한데, 어떤 사람인지 알아둬야 나도 적절히 대처하지.”
처가란 말이지요. 하하. 신랑이랑 친정 얘기 해봤자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데.
물론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여태 한 번도 그런 걸 물은 적이 없었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체시아레 얘기는 꺼내기도 싫은 내 심정은 둘째 치고.
“알려진 것만큼 깐깐한 사람은 아니에요. 사교 모임에서 인기도 많고, 성직보다는 군대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죠.”
자신을 추기경으로 만든 것에 대해 체시아레는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엔죠와 사이가 나쁜 데에는 엔죠의 철부지 망나니 성격뿐만 아니라 질투도 한몫했을 것이었다.
체시아레는 언제나 기사만이 되고 싶어 했다. 수단을 걸치고 아버지를 보좌하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양아치 기사인 엔죠에 비하면 재능도 월등했고.
“남매간의 우애가 상당하다 들었는데. 보고 싶지는 않아?”
“그냥, 조금이요.”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고요한 시선이 불안불안하다.
“가족 얘기가 달갑지 않은가 보네.”
“그런 게 아니라…… 이제부터 여기가 제집이잖아요. 다들 그렇게 좋아하시는 화제도 아니고요.”
“다들이 누군데? 내가 다들인가?”
너희 북부인들 대다수가 그렇지 아니하니?
특히 너랑 네 동료들. 성기사 주제에 교황이라면 치를 떠니, 원. 뭐 로마냐 돌아가는 꼴 보면 무리도 아니다만.
짧게 숨을 고르며 다시 눈을 들었다. 이스케는 여전히 꼼짝도 안 하고 앉아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이.
친정 얘기를 하다가 신랑한테 멱살이 잡혀본 경험이 있는 신부가 얼마나 될까?
내 전 파혼자들은 대다수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체시아레와 나의 관계를 캐묻기 시작하면서 생판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던 이도 있었다.
누구한테 무슨 소릴 들었는지 그야말로 뜬금없이.
존중과 호의가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경멸과 혐오로 돌변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었지만, 나와 체시아레에 대한 그렇고 그런 역겨운 소문이 어딜 가나 따라붙는 데 다름 아닌 체시아레 본인이 수를 쓰는 것 같았다.
그놈의 광적인 사고대로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정략혼으로 보낼지언정 신랑과 사이좋은 꼴은 절대 못 보는 데다, 결과적으로 내가 돌아갈 곳이 자기밖에 없도록 하려고 말이다.
“아니요. 당연히 아니지요. 그런데 여긴 새장은 아직 안 들이셨네요?”
애써 쾌활하게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리자 남편 놈은 그런 내 노력을 가상히 여긴 건지 어쩐 건지 따라 눈길을 돌렸다.
정확히는 갑작스레 내 손목을 붙들고는 무언가를 채웠다. 어어?
“이게…….”
“선물. 새장 대신으로 쳐.”
다짜고짜 선물이라니 이 얼마나 뜻밖의 반전인가?
나는 내 팔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를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촘촘히 엮인 정체 모를 새까만 보석들이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더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흑요석은 아닌 것 같다. 이건 대체 무슨 보석이지?
“이건 무슨 보석인가요?”
“그냥 보석. 건강에 좋다나.”
아하. 설마 여기서도 건강 팔찌 어쩌구 하는 사기가 판을 치는 게냐? 티타늄은 아닌 것 같은데.
귀부인이 차고 다닐 장신구치고는 꽤 간소하고 투박한 디자인이었으나, 그것보다 이놈이 대관절 무슨 심보로 나한테 선물을 다 주는 건지 얼떨떨했다.
호들갑을 떨어줘야 마땅하거늘 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입을 벙싯대며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이스케는 무심하게 허공을 한 번 훑다 말고 멈칫하며 머리를 갸웃했다.
“표정이 이상하군. 역시 새장이 아니라서 아쉬운 건가?”
“……아니요.”
“아니면 다른 게 아쉬운 건가? 오늘은 아리엔이나 레아가 낄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애니? 내가 애야? 끙,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꼬마 친구들 안 불러줬다고 서운해하는 취급이라니.
“그냥 당신이 너무 좋아서요.”
“…….”
“에헤헤, 제가 재미있는 거 보여드릴까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폴짝 일어나 저만치 콩콩 뛰어갔다. 이스케가 곧장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뛰면…….”
“이젠 아프지도 않은걸요. 저 사실은 한 발로 움직일 수 있어요.”
“뭐?”
“이러고 춤도 출 수 있어요. 보세요.”
내가 이래 봬도 발레 스쿨을 다닌 전생의 소유자란 말이지.
그렇게 방긋 웃으며 다치지 않은 발을 꼿꼿이 세우고 빙그르르 푸에테를 돌았다.
이스케는 다가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떴다.
놀랍지? 이건 좀 놀랍지?
“그러다…….”
“걱정 마세요, 안 다칠게요.”
오랜만에 하려니까 신선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정작 발레 스쿨 다닐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간단한 동작들 계속해서 이어갔다. 앙트르샤, 플리에, 파세, 아라베스크. 음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리 벽을 뚫고 새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이 시야를 산산이 부서뜨렸다.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스친다.
내가 푸에테를 추는 동안 남편 놈은 그저 굳은 듯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또, 또. 지금 무슨 생각 해?
네가 원하는 게 단순했다면, 그 많은 사람과 똑같이 단순하고 명백했다면 모든 게 더 쉬웠을 텐데.
나는 그 무엇에라도 맞춘 듯 역할을 해줄 수 있는데, 새장 속의 마녀가 되길 바란다면, 너의 춤추는 인형이 되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그러할 수 있는데…….
“아……!”
역시 너무 오랜만이었나 보다. 게다가 다친 발가락들이 나를 배신했다. 사뿐히 를르베를 하려다가 그만 삐끗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이고, 내 흑역사 또 하나 추가다.
풀썩!
“괜찮아?”
빠른 속도로 다가온 남편 놈이 팔을 뻗어 축축한 수풀 위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커다랗게 경직된 눈동자에 엄청난 염려가 서려 있었다.
미남계 암살자여, 내 진짜 남편 놈 좀 돌려다오. 헷갈려 죽겠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에헤헤헤. 저 괜찮지 않았어요?”
어서 괜찮았다고 해줘, 어서! 하다못해 그냥 볼 만 했다고라도 해주란 말이야, 이 야박한 짠돌아!
열심히 속으로 주문을 외며 배시시 웃는 나를 이스케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달빛이 은빛 머리카락 가닥가닥 매달려 거미줄처럼 반짝거렸다.
“혹시 서리용한테도 이렇게 춤춰준 건가?”
나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아니 거기서 용 새끼는 또 갑자기 왜 나와, 이 쪼잔한 놈아!
“절대 아니…….”
“농담이다. 진짜 그랬다면 그 도마뱀이 그 안달을 떨어댔던 게 이해가 가지만.”
우리 용 새끼한테 도마뱀이 뭐니? 홱 하고 가볍게 나를 들쳐 안은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반쯤 풀어진 채 거의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간 어린 십 대 소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발레리나에게 반한 순수한 소년처럼.
“내 아내는 숨겨둔 재주가 많네. 알면 알수록.”
이 마법이 꺼져버리기 전에…… 어쩌면 마법에 홀린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뺨에 닿았다. 깨끗하게 면도한 피부가 아기 볼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시선이 서로에게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순 모든 소리가 멈춘 듯했다. 그리고…….
“공자님?”
와장창!
주문 깨지는 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듯하다.
신이시여, 이놈의 진도 방해하는 것들이 대체 왜 이리 많은 게야!
내가 황급히 손을 거둠과 동시에 남편 놈이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온실 입구에 나타난 방해꾼은 다름 아닌 이곳의 집사장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첫날 인사했을 때 빼고 거의 마주친 적이 없는데.
“방해드려 송구합니다만 지금 연회장에 좀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고한 집사장이 어째 묘한 눈빛으로 내 쪽을 힐긋거렸다.
왜 새삼 내 눈치를 보는 거요?
젠장, 설마 또 프레이야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오늘 내내 안색이 나쁘더니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곧장 연회장으로 향하겠거니 싶었는데, 이스케는 발걸음을 떼거나 집사장을 다그치는 대신 어째서인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저 최대한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박거려 보일 따름이었다.
난 계속 너랑 여기 있었잖니, 이놈아! 아무 짓도 안 했고 그럴 틈도 없었다고!
“마물들이 댄스홀에서 춤이라도 추고 있더냐?”
“예?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 문제가 아닌 이상 방해하지 마라. 지금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하오나 공자님…….”
“언제부터 그리 토를 달았나?”
살벌하다 살벌해. 칼날로 자르는 듯한 냉랭한 일갈에 집사장은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편 놈의 도도하기 그지없는 낯짝을 흘긋거렸다.
이런 예상 밖의 태도라니 매우 의외다.
역시 의외성으로 탑급인 주인공일세. 솔직히 이대로 나를 팽하고 가버릴 줄 알았는데.
“저어…….”
“내 이름은 저어가 아니야. 아니면 차라리 아까처럼 부르던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내가 아까 뭐라고 불렀…… 아, 맞다.
스멀스멀 되돌아오는 끔찍한 기억에 나는 잠시 치솟는 눈물을 삼켰다.
내가 미쳤지, 미쳤던 게야. 그렇게 격렬하게 자빠진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그 상황에서 여보라니!
“그럼 저도 이스라고 불러도 될까요?”
“안 될 건 또 뭐지?”
“하지만 당신도 제 이름을 불러주신 적이 없어서…….”
슬쩍 말꼬리를 늘이자 이스케는 할 말을 잃은 모양인지 애꿎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뻔뻔스레 말을 돌렸다.
“이것 봐, 흙이 잔뜩 묻었잖아.”
“흙이 아니라 꽃잎일 거…….”
“희망 사항인가?”
“…….”
“이만 가서 씻고 쉬는 게 낫겠다.”
이건 또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란 말인가. 집사장도 그냥 그렇게 보내놓은 주제에 이대로 찢어지자고?
네놈이 웬일로 휑 가버리지 않은 건지 마냥 좋아라 한 내가 바보였니? 아직 마법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 믿은 내가 바보였어?
“오늘은 더 놀고 싶어도 참아. 목욕을 준비하라 할 테니 발을…….”
“하지만 그러면 무서운걸요!”
놈의 목을 조를 기세로 꼭 매달리며 다급하게 외치자 잠시 침묵이 내렸다.
성큼성큼 온실을 나서던 남편 놈이 멀거니 나를 바라보았다.
“시중드는 것들이 널 무섭게 하나?”
“네? 아니요, 아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새로 들인 하녀는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그것들이 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해온 거지?”
순식간에 싸하게 얼어붙은 눈매가 포악한 용 새끼 저리 가라다.
우리 로냐는 아무 잘못 없어, 이 성질 급한 놈아!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라, 좀!
“그게 아니라 저 실은, 발 다친 것도 그렇고 혼자 있기 무섭단 말이에요. 바보 같다 여기시겠지만 누가 일부러 그런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계속 불안한데 하녀들은 왠지 제가 지켜줘야 할 것 같고 밤은 길고 다들 연회장에 모여 계시고…….”
“…….”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내 귀로 듣기에도 참 씨알도 안 먹힐 소리 같았으나 무작정 밀어붙이며 눈을 최대한 애절하게 빛냈다.
의외의 기현상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오늘 밤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서 다시 마법에 걸려라, 얍!
“대체 내가 뭘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건지 원…….”
시, 실패인가? 알 수 없는 탄식을 중얼거린 녀석이 나를 고쳐 안으며 다시 본관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도 거침이 없는 기세라 나는 차마 더는 조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씨이, 대체 뭐 어쩌자는 거야, 이 목석 자식. 도도하면 다냐?
“공자님, 뭐 필요하신…….”
“목욕 준비나 해라. 성수도 넣고.”
“알겠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곳 사용인들은 엘레니아나 아버님이 있을 때보다 이스케 놈 앞에서 훨씬 벌벌 떠는 것 같다.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시종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이스케의 어깨를 꼭 붙들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와보는 장소다.
“여기가 당신 방인가요?”
“누추하지만 그래.”
빈정대는 건가?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입성하게 된 남편 놈의 처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생각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정적인 멋이 있달까, 투박하면서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꾸며진 장소였다.
매끄러운 검은 대리석 바닥에 깔린 정체 모를 털가죽이 푹신해 보인다.
사각형으로 트인 발코니를 통해 저택과 도시의 풍경이 만화경처럼 한눈에 다 들어왔다.
저만치 엘모스 항에서 반짝이는 등대도 보였다.
“멋있기만 한걸요. 꼭 요새 같아요.”
“요새라면 요새지.”
벽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내심 돌아가신 공비의 초상화라도 걸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흔한 풍경화 한 점 없다.
심지어 테피스트리도 없었다.
아버님은 예술품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여러모로 딴판인가 보다.
“공자님, 다 되었습니다. 저어, 마님께선…….”
“로냐를 불러라.”
시종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넋을 놓고 방을 구경하다 말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스케는 열심히 눈치를 살피는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는 그대로 나를 안고서 욕실로 향했다.
나는 말 그대로 어리둥절했다.
“우와…….”
더운 수증기가 훅 끼치는 욕실에 입성하자마자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이게 바로 남편 놈의 개인 욕실이라 이거지요. 자식, 너 진짜 공자 맞구나? 무슨 욕실이 방보다 더 화려하니.
여긴 단순히 화려한 욕실이 아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퐁퐁 솟는 개인 노천탕이었다!
금박 장식을 두른 벽과 높은 대리석 욕조, 무엇보다 한쪽 벽에 달린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벽 한 면을 반이나 차지한 창문이었는데 짙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여기서 몸을 푹 담그고 창을 열어놓으면 풍경이 기가 막힐 것 같다.
“발 조심해.”
대관절 무슨 생각인 건지, 이스케는 욕조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 위에 나를 앉혀놓고 나갔다.
어쩌라는 거지? 여긴 안전하니 자기 욕실에서 안심하고 씻으라 뭐 이런 건가?
“마님, 괜찮으세요?”
역시 그런 건가 보다. 아니 왜 매번 이렇게 초점이 어긋나는 거야. 내 말의 요는 그게 아니었는데!
“세상에, 어떡해. 발을 다치신 건가요?”
“실수를 좀 했어. 이젠 괜찮아.”
초야가 물 건너 가버리긴 했지만. 어흑, 내 진도!
내가 쓰라린 눈물을 삼키는 동안 로냐는 내 발을 두고 호들갑을 떨며 부산스레 내 옷을 벗겨주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 속옷을 다 벗기까지 꽤 치밀한 섬세함을 필요로 했다.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붕대도 풀게요. 아저씨들 말로는 성수를 타서 상처 치유에 좋을 거래요.”
아저씨들? 아, 시종들 말이구나. 그 귀한 성수를 욕조에 부어버리다니 대단하네. 참으로 팔라딘이 쓸 만한 욕조로구나.
“다음부터는 다치시면 안 돼요, 마님. 예쁜 발이 흉 지면 아깝잖아요.”
“응, 조심할게. 고마워.”
“그럼 전 이만…….”
“응?”
너 내 목욕 시중들어 주러 온 거 아니었니?
어리둥절한 내 표정에 대고 로냐 또한 내 벗은 옷가지를 챙겨 들다 말고 똑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 나는 네가 여기 온 이유가…….”
“아아, 공자님께서 마님 옷 벗는 걸 도와주라 하셨어요. 그리고 바로 나오라고 하셨는데…….”
“아…….”
“무리도 아니지요. 공자님께서 손대셨으면 아마 다 망가졌을 거예요.”
그건 그래. 참으로 일리 있게 덧붙인 로냐가 마지막으로 빙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맨몸에 가운만 달랑 두르고 홀로 남은 나는 혼돈에 휩싸인 머리를 부여잡으며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마물들이랑 하하호호 노는 여자인 만큼 어리광 집어치우고 혼자 씩씩하게 잘 씻으라는 의미겠지? 그런 걸 거야.
설마, 설마 그 의외성 뛰어난 자식, 내가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을 씻겨 달라는 말로 해석한 건 아니겠지.
암,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내가 설령 그리 졸랐다 해도 그 야박한 목석이 고분고분히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재수 없는 자식. 야박한 자식. 도도한 자식! 나 그래도 귀부인인데!
씩씩 욕지기를 삼키며 앉아서 따스한 물에 다리를 살짝 담갔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퍼지는 노곤함이 나쁘지 않았다.
매일 이런 데서 목욕하면 로마 시대 황제라도 된 기분이겠군.
누가 커다란 놈 전용 아니랄까 봐 욕조가 참 크고 아름답다. 수영해도 되겠어.
“내 유일한 조건은, 날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콧노래를 흥얼흥얼하며 애꿎은 물에다 대고 철썩철썩 물장구를 쳤다.
아, 포포 보고 싶다. 그리핀이랑 용 새끼도. 걔들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런 내색 하면 안 되겠지만.
“날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멋진 옷을 입고 서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자기야…… 날 다시 보러 오겠다고 말해줘, 그게 그냥 너의 터무니없는 꿈속일지라도…….”
“내가 결혼을 한 건지 애를 들인 건지 진심으로 헷갈릴 때가 있어.”
“……꺄악!”
콧노래가 비명으로 변했다.
말 그대로 기겁을 하며 물장구를 멈추고 돌아보는 내 눈에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남편 놈이 보였다.
한 팔을 욕조 난간에 걸치고 서서 게슴츠레 바라보는 모습이 실로 오만하고 나른하게 보인다.
게다가 어째서 허연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는가?
그 헐벗은 암살자 복장은 어디다 팽개치고? 절대 아쉬워하는 건 아니다만.
“왜 그렇게 놀라? 그새 사고라도 쳤어?”
“아, 아니요. 당신이…….”
네가 가운만 걸치고 나타났다는 사실이, 나 또한 맨몸에 가운만 대충 두르고 네 바로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럼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니?
거기다 여기는 네 개인 욕실인데.
“발부터 좀 보자.”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보다.
멍하게 얼어 있는 나를 향해 쯧 하고 혀를 찬 녀석이 상체를 기울여 내 다리를 건져 올렸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은 점점 끔찍한 예감으로 들어찼다.
이 자식 아무래도 진짜 나를 씻겨줄 작정인 것 같아.
그래, 씻겨주는 거야 괜찮다. 그러나 씻겨주기만 하는 게 문제였다.
이놈이라면 왠지 진짜로 씻겨주기만 할 것 같잖아!
“좀 담그고 있는 편이 낫겠군. 잠깐만.”
이 기회를 그리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암, 내가 언제 저놈이랑 같이 욕실에 단둘이 있어 보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돌아서서 한쪽에 놓인 쟁반 위의 옥합들을 건드리는 놈의 등짝을 골똘히 노려보았다.
그냥 확 벗고 덮……. 아냐, 그랬다간 오늘로 유명을 달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단 저놈이 나를 씻겨주는 동안 나도 같이 씻겨주겠다고 해볼까?
“향유를 따로 가져오라는 말을 깜빡했어. 당분간 머리에서 내 냄새가 나도 좀 참으라고.”
“전 당신 냄새가 좋기만 한걸요.”
향유야 다 거기서 거기지. 안 그러니?
오늘 밤 성을 쌓을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에서 남자 냄새가 나도 상관없단다. 호호.
“뭐든 싫으실까.”
“진짜예요.”
“그래, 그러시겠지. 가운 벗어.”
왜, 왜 갑자기 내가 선공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무심한 낯으로 제 가운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던 이스케가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뭐 해? 가운 벗고 들어가라고.”
“……갑자기 이러시면 소녀는 부끄러운걸요.”
차마 말로 표현하기도 뭣한 싸한 정적이 내렸다.
으아, 위험하다.
나는 잽싸게 눈을 내리깔고 주섬주섬 가운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 제가 좀 많이 깐족거렸죠?
당신은 언제든 절 찢어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주인공인데 말이지요. 훌쩍.
등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흉터를 보는 걸까.
얼른 가리려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홱홱 넘기며 다리만 잠겨 있던 몸을 물속에 밀어 넣었다.
젠장, 이 문제를 깜박했네. 이게 또 방해물이 되면 안 되는데.
그나마 지난번엔 등 위쪽만 봤지…….
“머리부터 감기는 게 맞나? 여자들은 보통 순서를 어떻게 하지?”
“전 대개 머리부터 해요.”
투박한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속을 파고 들어왔다.
두피를 얕게 훑는 감촉이 기묘하다. 아니 진짜 감겨주려고?
“이렇게 보니까 엄청 기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공포가 밀려오는군.
매끄럽고 완만한 직선이었던 전생과는 달리, 지금의 내 머리카락은 꾸불거릴 뿐만 아니라 몹시 가늘고 숱도 많아서 상당히 조심히 감아야 했다.
마구잡이로 문질러댔다간 엉켜서 영영 풀지 못할 터였다.
하나 그런 섬세한 작업을 이 무지막지한 기사 놈한테 요구하는 건 심히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냥 제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다음으로 들리는 으스스한 음성에 혀가 또르르 말려들어 갔다.
“왜, 갑자기 안 무서워졌나?”
“아니요! 제가 알려드린다고요. 끝에서부터 거품을 묻혀서 손가락으로 살살 빗겨 주시면 돼요.”
나는 인형이다. 심심한 암살자의 무자비한 손아귀에 붙들린 인형인 게야.
불쌍한 내 머리카락을 애도하며 정수리에 쏟아지는 물벼락에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지금 폭포 속에서 세례를 받는 고행자다.
“읏……!”
“미안. 아파?”
“괘, 괜찮아요.”
끝에 엉킨 부분이 놈의 손가락에 확 걸리는 바람에 두피가 따끔했다.
거품부터 묻히고 빗으라고 이놈아! 이러다 머리숱이 반쯤 주는 거 아닐까 걱정된다.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몰래 살짝 뒤를 흘겨보니, 남편 놈은 양 손바닥에 비누 가루를 푼 향유를 묻히고 마찰시키며 거품을 내고 있었다.
굵은 팔뚝에 핏줄이 불끈거리는 모양새가 실로 간담이 쫄깃하다.
“내가 이런 일은 익숙지가 않아.”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네 녀석이 언제 누구 씻겨줄 일이 있었겠니?
하다못해 강아지 씻겨본 경험도 없을 놈인데, 첫 실험 대상자가 나라는 사실이 그저 영광스럽도록 슬프구나.
“알았지? 조금 서툴러도 참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낯설고 생소하기 짝이 없는 그런 기분.
흠뻑 젖은 내 머리카락을 모아쥐는 손길은 투박하고 서툴렀지만 조심스럽고 상냥했다.
상냥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몸을 씻는 것조차 남의 도움을 받는 건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로마냐에서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명이 따라붙곤 했다.
내 모든 일상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보고되고 알려진다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일생을 그런 일에 종사해 온 사용인들은 놀라울 만큼 능숙하고 섬세했다.
그럼에도 이런 기분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에잇, 정신 차려. 조심해야 돼…….
착각은 금물이야. 상냥함이 난폭함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란 거 알잖아.
“힘들지 않으세요?”
“별로 힘 드는 일도 아니잖아. 그보다 무슨 머리카락이 이렇게 가는지 모르겠군. 거미줄도 아니고.”
힘이 든다는 거냐 안 든다는 거냐? 하여간 배배 꼬인 놈이라니까.
“제 머리가 좀 골칫덩어리긴 해요.”
“정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서는…….”
타박을 주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투였다.
조금 머쓱했으나 나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근데 아까 동료분들이랑 무슨 얘기 하고 계셨어요?”
“서리용 토벌 작전.”
“…….”
“농담이니까 목에 힘 빼. 그놈도 염치가 있으면 당분간 조용히 지내겠지.”
용한테 염치를 요구하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씨이, 갑자기 안 어울리는 농담 하고는. 순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가출 친구들이 어지간히 걱정되나 보네.”
“아, 아니에요.”
“왜 아니겠어, 퍽 재미있게 논 기색이던데. 눈 감아.”
재미있게 놀았던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군.
눈을 꼭 감자 바가지로 퍼 올린 물이 머리에 쏟아졌다. 어푸푸.
“기껏 데리러 갔더니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다고 끙끙 울기까지 했으면서 말이야.”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땐 그냥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게 무서운 아가씨가 포포리가 꼬신다고 냉큼 따라가?”
얼핏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정수리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생소하기 짝이 없다. 마치 놀리는 것 같은…… 너 대체 누구니?
“겨우 찾아냈더니만 면상에 버섯을 다 던지질 않나.”
“자, 잘못했…….”
“뭐 무사했으니 그걸로 됐지. 머리는 대충 다 된 것 같군.”
역시 내가 그때 버섯을 던진 일을 결코 잊지 않은 거였다.
스쳐 지나가는 방종의 나날들을 그리며 나는 슬쩍 몸을 돌려 욕조 난간에 매달렸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이스케가 두툼한 스펀지를 쥐어짜며 다른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창을 좀 열어야겠다.”
“제가…….”
“그대로 있어.”
넵.
이내 훅 하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온통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와, 진짜 끝내준다.
“매일 여기서 목욕하면 진짜 공주님이 된 기분일 거예요.”
“너 공주 맞잖아.”
음, 교황의 딸이니 로마냐의 공주라 할 수는 있었다. 내 말의 요는 그게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로마냐에서도 이렇게 예쁜 욕실은 본 적 없는걸요.”
“화려함으론 신성하신 성좌를 따라갈 수 없을 텐데.”
교황의 욕조가 신성한 성좌라니 참으로 적절한 비유로군.
아버지 개인 욕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그냥 화려한 거랑 예쁜 거랑은 다르잖아요. 여긴 진짜 멋져요.”
“마음에 들면 내키는 대로 와서 놀든지.”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야.”
“진짜요?”
“그놈의 진짜는…….”
쯧, 하고 야박하게 혀를 찬 녀석이 다가와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
“네?”
“팔을 줘야 닦을 거 아닌가.”
그렇군요. 내가 무슨 주문에 홀린 것처럼 멍하게 팔을 들자, 이스케는 한 손으로 내 팔목을 붙들고는 거품이 인 스펀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목을 지나 팔꿈치 안쪽까지, 그리고 그 밑으로…….
“아프면 말해. 힘 조절이 어려워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핏줄이 움찔거리는 육중한 팔뚝이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반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의 단단한 잔근육들 또한 장단에 맞춰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그것들과 놈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은빛 머리칼이 흐트러진 이마와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목덜미에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쪽도.”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아무리 수증기가 열일한다 해도 나는 맨몸으로 욕조 속에 앉아 있고, 너는 그런 내 몸을 아슬아슬하게 씻기고 있는데…….
“왜 그렇게 쳐다봐?”
“네……?”
“다리 들고 여기에 걸쳐. 안 다친 쪽으로.”
나는 고분고분히 양팔을 내리고 왼쪽 다리를 들어 발목을 난간에 걸쳤다.
솥뚜껑 같은 손아귀에 발이 쏙 들어갔다.
문득 암울한 생각이 닥쳐왔다.
이 자식, 역시 알고 봤더니 내가 지독하게도 취향이 아닌 거 아니야? 그때 중간에 때려치운 것도 설마 그런 이유에서?
“저어, 이스?”
“왜? 또 무슨 장난 치려고.”
이것들이 진짜, 자꾸 애 취급이냐! 분노가 치솟았으나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진도, 진도가 중요하다.
“그냥 당신도 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저도 같이 당신 씻겨드릴게요.”
잠시 침묵이 좀 흘렀다.
손길을 멈춘 채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이스케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맙소사, 실수한 건가?
“넌 내가 뭘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돌덩어리?”
“네? 그런 게 아니라 미안해져서…….”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데 발목을 쥔 손이 풀렸다.
이스케는 스펀지를 물속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나머지는 네가 하는 게 낫겠다.”
“자, 잠깐만요!”
이 야박한 자식은 다중인격이 틀림없어. 또 왜 갑자기 살벌해지려는 거야!
무작정 놈의 팔뚝을 꽉 붙들고 매달리자 곧바로 당황한 음성이 울렸다.
“지금 뭐 하는…….”
“가지 마세요! 귀찮게 안 할게요! 전 그냥 당신이랑 같이…….”
“안 갈 거니까 이거부터 놓고…….”
거짓말쟁이! 그러고 또 홱 가버릴 거잖아 나쁜 놈아!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팔뚝에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찰나였다.
첨벙!
무게가 중심을 잃으며 이쪽으로 홱 쏠리나 싶더니 이내 장엄한 물보라가 일었다.
성수가 섞인 신성하신 물결이 요동을 치며 욕조 밖으로 흘러넘쳤다.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콜록, 콜록!”
물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으으, 귀에 물 들어간 것 같아. 방금 대체 어떻게 된…….
“너…….”
“히끅.”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아,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어.
설마 설마 하며 슬며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푹 젖은 은빛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운까지 흠뻑 젖은 채 서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이스케는 괴기 목욕탕에 강림한 전설의 괴수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괴수의 우람한 어깨에 휼륭한 저녁 식사처럼 걸쳐져 있었다.
실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괘, 괜찮으세요?”
무시무시한 괴수는 대꾸가 없었다. 내가 다시 입을 벌리려는 찰나 놈이 몸을 움직였다.
첨벙첨벙.
그대로 나를 짊어진 채 계단을 밟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욕실 밖으로 직행했다.
“젠장할…….”
발바닥이 푹신한 가죽 털 러그에 닿았다.
발가락은 더는 아프지 않았다. 대신에 심장이 여우 앞의 토끼처럼 쿵쾅거렸다.
물기를 뚝뚝 흘리며 엉거주춤 서서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머릿속에 오만 상상이 스쳐 갔다.
젖은 머리카락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서늘한 공기가 와 닿으며 열 오른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또 망쳐버렸어.
조금 잘해줬다고 너무 긴장을 풀었나 보다.
내 가출 얘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무슨 암시였던 걸지도 모르는데, 눈치 없이 굴다가 물에 빠뜨리기까지 해버렸으니…….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 자락이, 카우치 쪽으로 다가가는 커다란 발이 보였다.
“이리 와.”
무릎이 초조하게 딸깍거렸다. 어떡하지? 차라리 아까 신발로 맞을 걸 그랬나? 목숨만은 제발.
“뒤 좀 돌아봐.”
펄럭.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시야가 가려졌다. 머리를 꾹꾹 문지르는 손길이 참으로 괴악하다.
으아아, 신종 고문이냐!
보드라운 플러싱 수건이 내 젖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목덜미와 어깨를 닦았다.
수건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비로소 앞이 보였다.
고풍스러운 방의 풍경.
힐끔 돌아보니, 카우치에 걸터앉아 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고 있는 이스케는 놀라우리만치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난 게 아닌 건가?
“저기…….”
“왜.”
“화나셨어요?”
“아니. 팔 들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톤이다. 나는 순순히 입을 다물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앉아서 내 몸을 닦는 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왜 너는…….
등허리를 지나며 물기를 제거하던 손길이 뚝 멈추더니 보송보송한 수건의 감촉이 홱 떨어져 나간 것은 그때였다.
야릇함 같은 종류와는 판이한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얼이 빠졌는지 파악하기까지 좀 걸렸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허벅지에 와 닿음과 동시에 현실 감각이 뒤늦게 치고 올라왔다.
안 돼, 보지 마!
내가 등을 홱 돌림과 동시에 남편 놈이 수그린 고개를 바로 들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확 낚아챘다.
침묵. 허둥지둥 수건을 몸에 두르는 동안 망할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미치겠네, 정말. 욕조 속에서 성을 쌓는 데 성공했다면 이런 거 보일 일도 없었을 것을!
“에헤헤, 부끄러워져서…….”
“…….”
“제가 어릴 때 좀 심한 말괄량이였어서……. 지금도 좀 그렇지만요.”
어흑, 차마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구나.
멍청하게 웃으며 그의 발만 쳐다보는 내 꼴이 어찌 보일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그냥 대충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젠장, 뭐가 가장 적절할까? 대체 어떤 일이었길래 그리 알차게 써먹을 여식 몸에 오래도록 남을 흠집을 새길 정도였느냐고? 자결 소동이라도 벌였다고 할까? 그게 제일 나을 것 같다.
화려하게 치장된 내 본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내가 정말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알고 나면…….
연민이나 동정심 같은 건 일시적인 것일 뿐, 자진해서 약점을 내주는 꼴일 뿐이라는 거 알고 있었다. 결국 똑같이 변하리란 거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로마냐의 공주, 시스티나의 종달새자 교황의 귀애하는 여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얼마나 못마땅한 존재이든 그 사실 덕분에 최소한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화려한 포장을 벗겨버리고 비참한 알맹이가 드러나는 순간 다들 속았다 여기겠지.
제 가족들에게도 그런 취급을 받는 하자품인 주제에 어디서 무슨 대우를 받길 바라냐고.
그것이 내가 진실을 이용해 이스케의 동정을 구하려는 생각을 꿈도 꿀 수가 없는 이유였다.
내가 실은 교황의 친딸도 아니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재잘거릴 뿐인 종달새라는 걸 말한다면, 수틀릴 때마다 무슨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 전부 말한다면 앞으로 나를 어떤 눈빛으로 볼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걸 상상할 때마다 두통이 일 정도로 비참했다. 게다가 신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리라.
마물들과 관련한 재주까지 밝혀진 판국에, 차후 일어날 엘레니아의 독살에 대해 털어놓는다면 도리어 내가 음흉한 꿍꿍이로 친정과 시가를 이간질한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아니, 그전에 이래저래 이런 걸 북부에 두기도 싫고 속았다면서 내 친정과 합의해 결혼을 취소할지도 몰랐다.
이 얼마나 끔찍한 결말인가? 그렇게 되면 또 포포랑 다른 애들은…….
“장인어른께서 의외로 엄격하시나 보군. 지랄 맞게 우습네, 새삼 놀라는 나도.”
마침내 입을 연 이스케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싸늘한 비아냥이 벤 음성에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평소엔 안 그러시는데, 제가 좀 심하게 사고를 친 적이 있어서요. 창피한 얘기지만…….”
“왜 울어?”
“네, 네?”
“왜 우느냐고.”
자꾸 빈정대기냐? 우는 거 아니거든? 단지 네놈이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솟는 거라고 이 야박한 괴수 놈아!
“우, 우는 거 아니…… 미안해요, 전 당신이, 저한테 실망하셨을까 봐…….”
황급히 주먹으로 눈가를 문지르려는 찰나 그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이스케는 내 손을 맞잡아 모은 채 거기에 수그린 이마를 대고 있었다. 아주 한참이나,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푹 젖어 흐트러진 은빛 머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또 내가 싫다고 하려나 싶어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는데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며 중얼거린 말은 기껏 이거였다.
“누가 보면 내가 이렇게 만든 줄 알겠다.”
“…….”
“도마뱀 자식이 쫓아와도 할 말이 없겠어.”
드래곤 슬레이어 꿈나무 주제에 뭐라는 거야 이놈? 멀거니 눈을 끔벅이는 내 뺨에 까칠한 손바닥이 와 닿았다.
“나는 여자애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 그리고…….”
“…….”
“네가 이럴 때마다 나는…….”
이를 꽉 악무는 그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요동쳤다.
화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해 보이기도 하는, 완전히 뒤죽박죽인 눈빛.
나까지 혼란스러워지면서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다 이는 그런 표정이었다.
“네 남편이 나보다 더 현명한 놈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젖은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굳은살이 거칠게 박인 투박한 손이었으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배려와 회피 사이에서 헤매는 짓거리도 때려치워야겠고…….”
“…….”
“네가 여길 떠날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야. 그러니 원하는 걸 말해 봐. 나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어.”
머릿속이 쨍 하고 울렸다. 지난번에도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선택하고 나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그토록 노리던 기회가 마침내 다시 찾아왔다는 건 알겠다.
별안간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몰라도 절대 놓칠 순 없지.
“신중하게 대답해. 나중에 후회해도 그때는 아무 소용 없을 테니까.”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몇 번이나 선택의 여지를 줬다는 걸,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이 문을 열고 나면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라는 거, 상상도 못 해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 말이다.
어차피 애초에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걸. 내 저주받은 굴레의 간수를 고를 기회가 생겼다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는 이미 분명했다.
나는 팔을 꾸물꾸물 움직여 남편 놈의 목에 감았다. 신중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입이 벌어지면서 뭐에 홀린 것처럼 혀가 멋대로 돌아갔다.
“친구들이랑 같이 당신 옆에서 살고 싶어요.”
뱀처럼 가는 눈이 빨간 경고 불처럼 깜박였다. 한번, 두 번. 무언가 부드럽고도 맹렬한 표정…… 내가 방금 뭔 소릴 내뱉은 건지 되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앗!”
몸이 홱 들리면서 대충 두르고 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다 하다 이제는 털 뽑힌 병아리 신세라니!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대던 것도 잠시, 등이 푹신한 시트에 파묻혔다.
“이스?”
커다란 깃털 침대에는 두터운 양모와 고운 면 이불이 덮여 있었다.
이스케는 나를 그 위에 내려놓고는 아까 욕조에 빠진 바람에 흠뻑 젖은 가운을 벗었다.
물기를 머금은 천이 흘러내리면서 예의 그 관능적인 조각상 같은 육체가 드러났다.
이상하게도 지난번처럼 공포스럽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게 그거란 말이지…….”
뜨겁다. 발등에 와 닿는 입술이 뜨거웠다. 아까 다친 그쪽 발이었다.
그랬다, 그는 내 발을 쥐고 거기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도도한 놈이 내 발등에 입을 맞추는 날이 오다니, 축포를 쏘아도 모자라거늘,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까?
이윽고 온통 거친 근육뿐인 몸이 꿈틀거리며 위로 올라왔다.
날짐승에게 덮쳐지는 듯한 느낌이다.
넓은 어깨와 가슴, 그 밑으로 이어지는 허리선은 표범처럼 매끈하고 관능적이었다.
문득 엉뚱한 의문이 일었다.
이스케만큼 야만적이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또 있을까?
“긴장 풀어, 루비.”
그의 목소리로 처음 듣는 내 애칭에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불붙은 듯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니, 이거 갑자기 너무 속전속행 아니시오? 그동안 철벽 치던 건 대체 뭐야?
말캉한 혀가 입술을 열고 치열을 훑으며 비집고 들어왔다.
숨이 막혀오면서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거칠게, 쿵쿵 하고.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이스…….”
따스한 숨결이 목으로 옮겨가나 싶더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길이 다정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내 위로 붉은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은빛 그늘이 진 깊고 깊은 눈. 너무 깊어서 빠질 것만 같은 눈이었다.
“젠장, 계속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타박하는 거니 빈정대는 거니?
멀거니 눈을 깜박이는데 눈가에 입술이 내렸다.
눈꺼풀에, 콧잔등에, 다시 입술과 목덜미에 입맞춤이 쏟아졌다.
내가 그의 볼에 장난하듯 입을 맞춘 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행위였다.
거의 정열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귓가에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내 유일한 조건은, 날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쇄골을 지나 밑으로 내려갔다.
갈비뼈 위를 어루만지는 느낌에 몸이 흠칫 떨렸다. 얌전히 있으려고 했으나 사지가 자꾸만 멋대로 움찔거렸다.
“아!”
긴 손가락이 명치와 배를 스치고 지나가 복부 밑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움츠린 다리에 전율이 일면서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긴장 풀고 힘 빼.”
“그, 그렇지만…….”
“부끄러워할 거 없어. 나도 너만큼 서투르니까.”
정말? 난 왜 나보다 네가 더 능숙해 보이는 걸까? 이것도 주인공 버프인가?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머뭇머뭇 꽉 붙인 힘을 뺐다. 벌어진 틈으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몸이 자꾸만 바르작거렸다. 마침내 상체를 바로 세우는 그의 손가락 끝에 투명한 실이 휘감겨 반짝였다.
“손. 아까처럼.”
그가 나직하게 내뱉으며 제 어깨 언저리를 툭툭 쳤다.
나는 아까와 같이 팔을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요?”
이스케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내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밀착해 왔다. 들이받는 건 순식간이었지만.
“자, 잠깐만!”
강철 같은 팔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발버둥 치며 쇳덩이 같은 어깨를 팡팡 때려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대로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거 아닐까 싶어졌다. 아파, 아프다고 남편 놈아!
“힘 풀어. 안 그러면 더 아파.”
“후으으…….”
그건 나도 아는데, 너는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니? 왜 이렇게 긴장을 풀기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몸을 옥죈 힘이 약간 풀리나 싶더니 낑낑 칭얼대는 내 눈앞에 불쑥 굵은 팔목이 들이밀어졌다.
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냅다 깨물어 버렸다. 깨물라고 준 거 아니겠는가?
나만 아프면 좀 불공평하잖아. 에라잇, 피멍이나 들어라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놈아!
내가 좀 지나치게 패기로웠던 모양이다. 거의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들려왔다.
“진짜로 깨무냐. 도륙 낼 기세네.”
“앗, 미, 미안…….”
“미치겠다, 진짜.”
키득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어리둥절했다. 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내 머리에 입을 맞추는 동안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서서히 반복되는 충만함과 상실감에 아픔과 희열이 뒤섞이며 몸서리가 쳐졌다.
“이, 이스…….”
“왜.”
“나, 기분이 이상…….”
“알아. 나도 그래.”
문득 마주친 시선은 왜 그토록 혼란스럽게 보였을까?
마치 함정에 빠진 쪽은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마냥, 미끼임을 뻔히 알면서도 덫에 걸려버린 맹수처럼…….
두 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걸 막 깨달아버린 표정이라고 할까?
이런, 내가 그 안에 무엇을 키워버린 건지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이 밤이 축복도, 저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비단 나 하나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걸 무슨 수로 알았겠느냐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이 정신을 뒤흔듬과 동시에 열에 들뜬 뺨에 입술이 와 닿았다.
얼굴에 내리는 입맞춤이 달콤했다. 너무 달콤해서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예뻐. 진짜로.”
진짜로?
내 손이 올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너도 그렇단다.
그러니 날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빛나는 갑옷을 입고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하필 오늘 그 노래를 떠올렸던 것이 실수였을까. 축포를 올려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린 건지 모르겠어.
우린 밤새도록 함께 얽혀 있었지.
언젠가 네가 나를 떠난 후에도, 이 기억만은 너를 쫓아다니리라 확신해.
그게 단지 너의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속에서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