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6)

* * *

“다음에 저도 한번 가르쳐 주세요.”

“발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실은 올겨울에 로마냐로 여행 갈 예정인데, 가서 망신당할까 걱정이네요. 남부 사교계가 대단하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어요.”

아름답게 꾸민 여인들이 모인 연회장 한쪽에는 내 또래의 영애들과 일찍 결혼한 귀부인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프레이야의 존재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긴 했으나 내심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분위기는 꽤 평온하고 아기자기하게 흘러갔다.

“전 그것보다 이스케 경께서 춤을 추신 게 더 놀라웠어요. 정말 한 번도 그러신 적 없거든요.”

“맞아요, 역시 이래서 남자는 결혼하고 나면 바뀐다나 봐요.”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요. 다들 그렇다고들 하는데 제 남편은 왜 변함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한탄하듯 농담한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동지애의 눈물이 치솟는다.

어흑, 그러한 심정 저 또한 다를 바 없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저쪽에서 앤디미온의 머리통이 보이는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사실 아까 두 분이서 등장하셨을 때 너무 두근거려서 가슴이 터질 뻔했어요.”

“저도요, 이미 공녀님과 아이반 경 때문에 잔뜩 설레고 있었는데, 부인께선 정말 깜찍하신 데다…… 게다가 그런 야성적인 모습이라니……!”

얼씨구. 인기 많긴 하구나, 우리 남편 놈. 헐벗고 있어도 야성적이라고 해주니.

하기야 그놈의 금욕주의 성향만 아니었다면 1등 신랑감이었겠지.

다들 귀여우니 나도 열성 팬으로서 동참 좀 해볼까.

“실은 저도 두근거려 죽는 줄 알았는걸요. 하마터면 실수할까 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역시 그렇지요? 부인께서도 솔직히 엄청 설레셨지요?”

“아이, 당연한 말씀을…….”

“어머 어쩜 좋아!”

남편아, 내 아무래도 오늘 네 팬클럽을 차리게 될 것 같구나.

팬덤장은 바로 나란다. 호호.

“참, 부인, 이번 축제에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오시는 거 맞지요?”

“저희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마침 제 사촌이…….”

아니 잘 나가다가 얘기가 왜 거기로 샙니까. 그 자식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잊고 있었다.

체시아레 놈은 안 됩니다, 아가씨들! 그놈은 미남의 탈을 쓴 변태 사이코라고요!

“남부식 억양은 언제 들어도 신선하네요. 부인께선 남편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듯한데, 어쩌다 그런 소동이 벌어졌던 건가요?”

좋은 분위기에 꼭 초를 치는 인간이 있다.

가령 콘솔라시온 영애라든가 콘솔라시온 영애라든가.

너도 참 끈질기다, 얘. 나는 잔뜩 걱정스러운 척 회색 눈을 조롱조로 빛내고 있는 콘솔라시온 영애를 향해 방긋 웃었다.

“제가 좀 철이 없긴 하죠.”

“……로마냐는 오히려 북부보다 그런 방면에서 더 엄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인가 봐요.”

“그렇지도 않아요. 오빠가 오면 아마 엄청 야단맞을 거예요. 휴, 이미 잔뜩 혼났는데. 혼나도 싸지만요.”

친한 친구한테 말하듯 늘어놓으며 입을 삐죽거리는 나를 보는 콘솔라시온 영애의 눈빛은 짜증과 가증 그 자체였다.

알아, 이해해. 그러니까 말 걸지 좀 말렴.

머릿속 꽃밭인 철부지한테 시비 걸어봤자 너만 피곤하잖니.

아무리 찔러봤자 내가 컨셉을 바꿀 일은 없단다.

특히 프레이야가 그런 변을 당한 이후인 지금은 더더욱.

“어머, 정말요? 혼나셨어요?”

“당연하죠.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별것도 아닌 걸로 토라져서…….”

“그만큼 걱정하셨으니 그러신 거 아니겠어요. 며칠 꼬박 지새우며 수색하셨으니 얼마나 걱정이 심하셨겠어요. 정말이지 전 에렌딜이 걱정했는걸요.”

“다들 감사드려요. 다시는 그런 민폐 끼치지 않을게요.”

누군가가 내 정수리를 살짝 두드렸다. 보니까 아리따운 시누이였다.

엘레니아는 정작 본인이 내 머리를 만져놓고는 자기도 놀란 것 같았으나 순식간에 원래의 새침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지, 반성해서 기특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퓨리아나 영애, 오늘따라 안색이 나쁘신데 괜찮으신 건가요?”

“춤까지 췄을 정도인걸요. 당연히 괜찮지요.”

“하긴 오메르타 가의 연회에 영애께서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죠. 세상에 정말 누가 그런 천벌 받을 짓을 꾸민 건지, 어서 범인을 잡아야 할 텐데…….”

“그 얘기는 이 자리에서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프레이야가 내 쪽을 흘긋 보며 차분히 내뱉은 말에 짧은 정적이 내렸다.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녹아든 정적이었다.

굳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척하실 필요 없는데.

가출 소동은 둘째치고 내가 떳떳하다 믿는다면…… 너도 나나 내 친정이 범인일 가능성을 고려 중이니?

설령 그렇다 해도 사건의 피해자인 프레이야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젠장.

부디 차라리 진짜로 의심 중인 거라면 좋겠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그래요, 우리 안 좋은 얘기는 하지 마요. 불편하실 텐데…….”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잠깐 느슨하게 풀렸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몇 번이나 거듭 고려해 보았다.

그때 문제의 승마 모임에서 프레이야가 정말로 경황이 없어 아무렇게나 둘러댔을 가능성을.

내가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서 피해 의식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더더욱 모든 행동이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난 워낙에 꼬인 인간이니까.

그렇다 해도 그 누구도 날 믿지 않는 데다 나 또한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멍청하게 믿다 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어차피 살기 위해 모두를 속이는 인생이니.

다만 프레이야가 겪은 일의 배후는 나도 이래저래 의심만 할 뿐 진실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눈을 들어 내 옆에 선 엘레니아를 힐끔거렸다.

만일 또 한 번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엘레니아가 어찌 나올지, 이스케가 어찌 나올지 훤했다.

둘 다 요즘 내게 좀 무르게 굴고 있긴 해도 얼마나 갈지 모르고, 게다가 이스케는 이제 나와 마물들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내가 보이는 것만큼 순진하지 않을 거란 가정도 쉽사리 납득할 것이었다.

이런 망할, 밸런스 패치 누가 했어, 이거.

마음이 조급해졌다.

현재 남편 놈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흥미인지 연민인지 그 외의 무언가의 복합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날 찾으러 그 고생을 해주기도 했고 포포랑 그리핀을 죽이지도 않아 준 데다 여러모로 배려를 해주고 있으니 아예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때 성부터 쌓고 보자.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파경의 가능성부터 철저히 차단한 다음 뒷일을 생각하자.

반드시 오늘 밤 그놈을 함락시키고 말리라!

그렇게 굳은 결의를 불태우며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엘레니아가 잠깐 묘한 눈길로 쳐다보긴 했지만.

끙, 이번엔 진짜로 토하러 가는 거 아닌데.

동쪽 발코니에 딸린 화장실은 마침 아무도 없었다.

곧바로 척척 거울에 다가서던 나는, 이윽고 활활 타오르던 음흉한 의지가 푸시식 식는 것을 느껴버렸다.

아니, 루드베키아 얘는 참 예쁘기야 한데…… 그러니까 원래 악녀잖아. 그것도 보르히아 가문의 악녀.

그런데 왜 생긴 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공주님 같을까?

물론 이런 외모로 악녀 짓을 한다면 그것대로 꽤 매력적이겠지만, 내겐 그런 포인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마냐에서 하도 입발린 칭송만 듣다 보니 다른 사람의 취향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깜박했던 것 같다.

설마 이스케 놈 이거, 막상 금욕주의 때려치우려고 보니까 내가 도저히 취향이 아니라서 그때 그만둔 거 아니야?

그래서 계속 목석처럼 구는 거 아니냐고? 평생 엘레니아나 프레이야 같은 성숙하고 고혹적인 미인들만 보다 날 보니 도저히 이성적인 매력이 안 느껴져서……. 안 돼!

전생에서도 주변 사람들에 비해 아시안 특유의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문제를 느낄 줄이야.

여러모로 쳇바퀴 같은 윤회일세. 키라도 좀 컸으면.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바로잡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괜찮아, 희망을 잃지 말자. 암, 그런 쪽의 정신머리는 내가 더 성숙한걸.

기필코 이 누님에게 넘어오게 하겠어, 바로 오늘 밤!

“……역시 그렇게 보이지요?”

남편 놈을 찾아 유혹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태우며 화장실을 빠져나오는 찰나였다.

발코니 입구에 쳐진 커튼 너머로 두런두런 속삭이는 소리에 발걸음과 숨이 동시에 딱 멎었다.

“공식 연회에다 직접 에스코트에 춤까지 춰주셨잖아요. 누가 봐도 분명하지요. 단 로마냐 쪽에서 압박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러네요, 하긴 애지중지하는 딸이 적응 못 하고 가출까지 했다니 얼마나 야단을 떨었겠어요. 그런데 소공작께서 그런 압박에 넘어가실 분인가요?”

“모르지요, 어쩌면 그냥 부인이 울고 짜고 난리를 쳐서 두 손 두 발 든 걸지도요. 세상에 에렌딜 지리도 모르면서 무작정 가출까지 할 정도면 얼마나 대담한 거예요?”

“대담은 무슨, 여우가 따로 없던걸요. 딱 그 시기에 보란 듯이…….”

오호라?

“하기야 그때, 퓨리아나 영애께서 각혈하셨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신 것도 소공작…….”

“맞아요, 그때 저도 봤어요. 부인 확 밀치고 영애 안아 드시는 거. 역시 그게 진짜 아닐까요?”

“그럼 역시 진짜는 퓨리아나 영애일 가능성이 더 높네요. 하긴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면서요?”

“애초에 금방 끝날 결혼이란 거 모르는 사람 없었잖아요. 그 부인 전적 보면 모르나요? 쓸데없이 흔들리지 마요.”

“휴, 퓨리아나 영애가 가엾네요. 만약 범인이…….”

“전 공녀님도 대단해요. 그렇게 챙겨주시는 것도 참…….”

“그렇게 가출했을 때도 자경대 길드원들이 발견했다지요? 아니 그치들이라 해도…….”

“그렇죠? 솔직히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떻게 알아요? 순진해 보여도 소문이 그렇게 난잡한걸요.”

“혹시 가출했던 게 아니라 일부러 그쪽으로 찾아간 거 아니에요? 예전부터 만나던 사이라던가.”

“소문만 봐도 뻔하죠. 워낙 남자한테 환장한 분이잖아요.”

“난 그 촌스러운 남부식 억양도 들을 때마다 거슬려요. 거긴 남자들도 그렇게 혀짧은 소리를 낸대요?”

이 친구들 보게. 예상은 했다만 좀 기분 나쁜데.

프레이야의 독살 기도 사건이 예상외로 크게 번진 내 가출 소동 덕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나나 내 친정을 배후로 여기는 여론이 존재한다는 거 나도 알고 있었다.

대놓고 캐묻거나 드러내지는 못하겠지만.

비단 신전과 교황청뿐만 아니라 오메르타 가문까지 엮여 들어갈 문제가 됐으니 말이다.

이스케가 이 연회를 연 진짜 꿍꿍이가 무엇이든 간에 내 입지는 가출 소동 전에 비해 확연히 공고해진 셈이었고, 공작가 일가 전원이 그 문제에 대해 나를 감싸고 있다 공표한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현재 자칫 문제의 사건에 오메르타 가문을 엮게 될지도 모르는 말실수를 감내할 인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뒷담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가출 소동 또한 어떤 식으로든 추문으로 만들 수 있다.

저런 여론이 있을 거라는 거 예상 못 한 거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골탕 먹여 주고 싶어졌다.

“제 생각에는…… 헉!”

숨을 죽이고 다가가 커튼을 홱 젖히자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속닥대던 영애 중 하나가 말 그대로 기겁을 했다.

다른 두 영애 또한 경악 그 자체인 표정이 되었다. 셋 다 아까 나와 신나게 재잘대던 이들이었다. 저 얼굴 파랗게 질린 것들 보게.

“부, 부, 부인, 저 저희는…….”

“……우흑!”

“부, 부인?”

댐을 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내 모습을 세 영애는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우흑, 저, 저는…….”

“부, 부인…….”

“저는, 진짜, 아무것도, 흑, 다들 그리 생각하셨을 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와락 울음을 터뜨리자 퍼렇게 질려 있던 영애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달라붙었다.

“부, 부인, 죄송해요, 저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러니까 정말로 별생각 없이…….”

“어흐흐흑, 전 그것도 모르고, 히끅, 다들 절 진짜 좋아하시는 줄 알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부인. 저희가 그만 칵테일에 취해 바보 같은 말실수를…….”

“우흑, 다들 여태껏 제가 퓨리아나 영애를 해쳤다고…… 어떻게 그런…… 히끅, 전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여러분이 정말 좋았는데……. 여기가 너무 좋은데…….”

“죄송해요, 부인. 잘못했어요. 저희가 어리석고 멍청한 말실수를…… 상처받지 마세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심이 아니긴 뭐가 아니니?

꺼이꺼이 소리죽여 흐느끼는 내 어깨를 허둥지둥 매만지던 영애 중 하나가 갑자기 나를 따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히끅, 죄송해요, 부인. 다시는 뒷담 같은 거 하지 않을게요. 용서해주세요. 그냥 남들이 떠드는 말이 재미있게 들려서…….”

“저도요, 정말 죄송해요. 울지 마세요, 가여운 분.”

“그런 끔찍한 말 해서 죄송해요, 부디 잊어주세요.”

어린 것들 같으니. 나중에 어떻게 나오든, 나를 따라 눈물을 글썽이며 용서를 구해대는 영애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일 것이었다.

왜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해도.

어차피 나도 잠깐 골려주기만 할 생각이었기에 그쯤에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한적한 구석이라 해도 더 길어졌다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 테니까.

“후윽, 그럼, 진심으로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닌 거예요?”

“그럼요!”

“당연하죠! 정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어요. 정말 멍청한…… 죄송해요.”

“진짜요?”

“네, 진짜요!”

이구동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는 영애들을 향해 나는 머뭇머뭇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애들 또한 따라 눈가를 훔치며 미소를 지었다.

아아, 훈훈한 광경이로다. 너희가 부럽구나. 정말 부러워.

훈훈한 풍경을 떠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보니까 어느덧 한껏 분위기가 달아오른 듯했다.

댄스홀에 다시 열기가 올라 있었고,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여기저기 흩어져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울었더니 목이 메어서 뭐부터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고 다들 하나같이 왜 이렇게 큰지…….

“와, 저것 봐.”

“신전에서 터뜨린 건가?”

멀리서부터 피융, 하는 폭죽 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발코니 쪽으로 몰려갔다.

그 바람에 반대로 가는 중인 나는 퍽 힘들어졌다.

거인국에 떨어진 걸리버가 된 기분이군. 하아.

“멋지시군요, 레이디 루드베키아.”

술에 취하고 흥에 들뜬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지나면서 그 와중에 남편 놈이 지금쯤 돌아왔나 이리저리 둘러보던 내 귀에 불쑥 속삭임이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빠지직.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오른쪽 발의 발가락들이 일제히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발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이는 이미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그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게 웬 복병이야, 오늘 밤이 얼마나 중요한 밤인데!

반쯤 주저앉았던 몸을 조심조심 일으켰다.

느낌상 다행히 발가락이 부러진 건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이 붙은 듯 아팠다.

이걸로 오늘도 넘어갈 핑계가 되면 안 되는데.

대체 누구였지. 아픔보다는 섬뜩함이 더 앞서는 기분이었다. 술에 취해 실수로 밟은 거라 보기에는 너무…….

귓가에 울리던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경고하는 듯한…….

“부인? 괜찮으십니까?”

사람들 틈을 재주 좋게 헤치고 다가와 손을 내미는 앤디미온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착한 녀석!

왠지 아까부터 네가 날 쫓아다니는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갑구나.

“어디 안 좋으십니까?”

“괜찮아요. 잠깐 발을 헛디뎌서…… 그보다 제 남편 보셨나요?”

“예, 아까 돌아오셔서 지금 저쪽 테이블에 계십니다.”

나는 앤디미온의 에스코트에 의지하여 최대한 절뚝이지 않으려 애쓰며 만찬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고통을 참는 데 익숙한 나였으나 발가락에 자꾸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파, 아파. 아프다고 남편 놈아……!

도도한 남편 놈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만찬 테이블 한쪽, 눈에 익숙한 시커먼 갑옷들이 몰린 중심에 성기사들과 협상 중인 암살자처럼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저것들은 연회장에서 뭔 얘길 저렇게 진지하게 해? 괜히 불안하게.

“이스케 경, 부인께서…….”

“여보오!”

내가 방금 뭔 소릴 뱉은 건지 나도 모르겠어.

다만 내 심신의 안위를 위해 오늘 밤 반드시 부부의 성을 쌓아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러한 굳은 결의를 불태우며 애써 발랄하게 다가가던 나는, 이윽고 또 다른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발가락이 죄다 부러질 뻔한 거야 그렇다 치자.

어째서 만찬 테이블에 대왕 거북이가 있는가? 아무리 접시라 해도 머리가 너무 크잖아! 눈알도 너무 생생해!

“꺄악!”

“부인?!”

철퍼덕.

정적이 흘렀다. 참으로 길게 느껴지는 정적이 흐르고 또 흐른 끝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의 현 상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 남편 놈의 무릎에 엎어져 있었다.

그것도 뭔가 처연하거나 애틋한 자세로 엎어진 게 아니라, 왜 그 부모가 아이를 혼낼 때 무릎에 엎어놓는 그 자세 있지 않은가.

딱 그 자세였다! 신이시여, 쥐구멍, 쥐구멍 좀! 이게 뭐야 진짜!

너무너무 창피해서 차마 움직일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어쩐지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남편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

“기절한 건가?”

아니요.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차라리 코피 터진 게 더 나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발가락만 멀쩡했어도. 아니, 거북이 접시만 없었어도.

꼼짝도 못 하는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이 파고들어 왔다. 안 돼, 건들지 마!

“기절한 것치곤 힘이 잔뜩 들어갔…….”

“아,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창피해 죽겠다고!

그러나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텨봐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스케가 너무도 간단히 나를 들어 올리는 동안 나는 고개를 최대한 아래로 푹 수그렸다.

아아, 존경스러운 팔라딘 용사 여러분, 그대들의 사기적인 초특급 능력으로 쥐구멍 좀 만들어주세요.

“얼굴 좀 들어 봐.”

“시, 싫어…….”

“내가 싫다고?”

그 와중에 그런 건 왜 또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니?

“너, 너무 창피해서…….”

“그냥 넘어진 건데 뭐가 창피해.”

“그래도…….”

신이시여, 당신 저 진짜 싫어하죠? 그러지 않고서야 자꾸만 이런 시련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이스케의 무릎 위에서 웅크린 채 놈의 우람한 어깨에 고개를 마구 파묻는 모습을 연출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조차 못 하며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진짜, 진짜 너무 바보 같아서…….”

“진짜 하나도 안 바보 같다. 얼굴 좀 들어 봐.”

진짜? 나는 애써 혼미한 정신을 추스르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반쯤 들었다. 생생하기 짝이 없는 대왕 거북이 머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흐아아!”

“왜, 왜…….”

“야, 저거, 저거 보고 놀라신 거 아니야?”

내가 왜 이러지. 트라우마에 휩쓸리는 시기는 졸업했는데. 거북이 공포증도 태연하게 참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다 저게 너무 큰 탓이다.

대체 어떤 심미안을 가진 작자가 저런 큰 거북이 접시를 만든 거냐고!

아니면 내 발가락을 부러뜨리려 한 정체불명의 놈 때문에 정신적 후유증이…….

“거북이를 무서워하는 건가?”

‘왜, 거북이가 무서워?’

“아니요, 아니요, 안 무서워요. 잘못했어요. 진짜 안 무서워요.”

“뭐?”

“안 무서워할게요. 진짜 안 무서워요. 잘못했어요.”

머리 위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울린다.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 빨리 빠져나와, 멍청아.

“치웠습니다! 이제 거북이 없습니다, 부인!”

“들었지? 이제 얼굴 좀 보자.”

남편 놈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낯설게 들렸다. 너무 온화해서 되레 적응이 안 된달까.

투박한 손이 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턱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고개가 들렸다.

빌어먹을 거북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알 수 없는 빛으로 요동치는 새빨간 눈동자뿐이었다.

반대로 쿵쿵 요동치던 내 가슴은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왜 울었어?”

이상한 질문이군. 왜 우느냐도 아닌 왜 울었냐니. 네가 우는 거 싫어하는 건 알겠다만 심문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그새 또 무슨 사고라도 쳤나?”

내가 애냐! 끙끙 입을 열려는데 자꾸만 딸꾹질이 나왔다.

발가락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얼굴도 모르는 거북이 접시 장인이 원망스러워졌다.

“아파서…….”

“어디가 아파?”

안 되는데.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오늘 밤 기필코……. 꼭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바보같이 발을 밟혔다는 거 굳이 말할 거 없잖아.

내가 대체 왜 무작정 여기 온 거지? 조용히 슬쩍 빠져나가서 로냐한테 얼음찜질이나 좀 받고 올걸. 대체 뭐에 홀린 거야.

“나 발이, 발이 너무 아파요…….”

마음이 아프다고 둘러대려 했으나 기어이 혀가 제멋대로 돌아갔다.

아파, 아프다고 남편아. 어떤 고약한 새끼가 내 발을 무자비하게 콱 짓밟고 가버렸다고. 기껏 너한테 안 밟혔다고 좋아라 했거늘.

“아파요, 아파…….”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이 분명하다. 칭얼대면서 저지하려는 내 모순적인 몸부림이 무색하게도, 이스케는 이미 허우적대는 내 다리를 누르고 몸을 숙여 친히 신발을 벗기시고 있었다.

누군가가 헉, 하고 밭은 숨소리를 내었다. 그 바람에 절로 바라보게 된 내 발의 형상은 꽤 볼만했다.

발가락이 부러진 건 아닌 듯했지만, 발톱 틈새로 피가 흐르는 데다 발가락들이 흉측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벗겨낸 비단 양말이 보기 싫게 얼룩졌다. 문득 발레를 처음 배웠을 때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한 침묵이 흘렀다. 영광의 상처가 난 내 발을 쥐고 한참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남편 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지?”

낮디낮은 서늘한 음성에 몸이 움찔 떨렸다.

내 벗겨진 신발을 받아들고 멍하게 굳어 있던 아이반 경이 나를 향해 몸을 굽혔다.

담녹색 눈동자가 드물게 심각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부인, 어쩌다 이리되신 겁니까?”

“모, 모르겠어요. 아까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지나가다가…….”

졸지에 촐랑대다 발 밟힌 것도 모르고 돌아다닌 귀부인이 되어버렸군. 그렇게 자조의 눈물을 삼키는 찰나였다.

“네가 말을 못 하겠다면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예?

이스케는 나를 팔에 안은 채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그제야 마치 원형 장벽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팔라딘들과 앤디미온이 보였다.

하나같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생소하기 그지없는 낯빛들이었다.

“이스케, 잠깐만…….”

“손 치워.”

“죄 죄송합니다, 경. 제가 좀 더 잘 지켜봐 드려야 했는데…….”

“눈 돌린 사이에 벌어질 일이었다면 언제든 벌어질 일이었겠지.”

문득 이스케가 왜 북부 최고의 팔라딘이자 최고의 개차반으로 유명한지 실감이 났다.

하나같이 개성 뚜렷하고 성질머리로도 만만찮은 동료들을 이렇게 당황시킬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로 성질머리가 글러 먹어야 하는가.

“이스케!”

“야, 야!”

“대체 무슨 일이야?”

애타게 매달리는 동료들을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이스케의 모습은 심판의 날을 맞아 강림한 살육귀 같았다.

신나게 연회를 즐기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당황하여 돌아보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상관 말고 비켜라.”

서늘한 칼날 같은 일갈에 엘레니아의 얼굴에 보기 드문 당혹감이 어렸다.

다른 이들은 그야말로 핏기가 싹 가셔버린 낯빛이다.

왜 우리 엘렌한테 그래, 이 못돼먹은 놈아!

나 안 그래도 요즘 네 동료들 눈치 보느라 죽겠는데, 우린 왜 항상 남들 좋은 분위기에 초 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부부여야 하느냔 말이야.

이러니까 내가 진짜 분란의 씨앗 같잖아, 기껏 열어준 연회인데…….

나는 와들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자칫 던져버리는 거 아닐까 심히 공포스러웠으나 남편 놈이 이대로 연회를 초토화하는 건 막아야 할 터였다.

“부디 진정하세요, 그런 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면 왜 발이 그 모양이 됐지? 어느 놈 짓인지 왜 말을 못 하느냐고?”

“그건…….”

“어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싸가지 없는 새끼가 감히 네게 아가리를 털었으니 그 꼴이 되도록 아무 내색 못 하고 내게 온 것 아니야?”

오오! 실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으르렁거림이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보라고 이 성격 파탄자야!

성질머리 괴팍한 남편 놈은 누가 나를 일부러 다치게 만들고 협박했다 확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주최한 나를 위한 연회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여러모로 자신을 향한 도발이라 여긴 걸 거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격노할 줄이야, 정말로 누가 그랬는지 나도 모른단 말이야!

“다, 당신 생각밖에 나지 않아서!”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지옥의 케르베로스 같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걸음을 옮기던 이스케가 그 자리에서 뚝 멈췄다.

“뭐?”

“누, 누가 그랬는지 진짜 못 봐서 무섭고 아프고, 그래서 당신한테 간 건데, 이, 이렇게 화나실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히끅. 잠시 동안 내 딸꾹질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두근거렸다.

내가 방금 불길에 기름을 뿌린 걸까, 물을 뿌린 걸까.

이윽고 후, 하는 옅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몸을 옥죈 팔에 힘이 실렸다. 살려줘! 역시 기름이었나?

“……뒤 좀 부탁한다.”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봐라.”

“그래, 얼른 가봐.”

기다렸다는 듯 등을 떠미는 팔라딘들과 더불어 선선히 머리를 끄덕여 보인 엘레니아가 몹시 걱정 어려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면목이 없다 면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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