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님 머리카락은 정말 예뻐요. 꼭 금색 거미줄 같아요.”
향유를 비롯해 온갖 꽃잎과 약재를 푼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염소털 은 브러시로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말리는 동안 로냐가 한 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조잘거리는구나. 그리고 마님한테 거미줄이 뭐니?”
당연히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같이 내 머리를 빗던 루실이 쏘아붙이듯 한 소리였다.
로냐가 오고 나서 루실은 마치 경쟁자를 대하듯 시종일관 내 시중을 자처하는 동시에 로냐에게 아니꼬운 태도를 유지 중이었다.
나로부터 보석 장신구를 얻어낼 기회를 잃을 성싶으니 조바심이 난 듯했다.
“찬사의 의미로 드린 말씀인걸요. 마님께서도 제 진심을 이해하셨을 거고요.”
“네가 뭔데 마님 진심을 왈가왈부한다고. 참 웃기는 애라니까.”
물론 로냐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며칠 지켜본 결과 로냐는 수줍은 첫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씩씩하면서 당찬 구석이 있었다.
몇 년씩 이곳에서 일한 다른 하녀들이 눈치를 주거나 말거나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자잘한 면에서도 손끝이 야무지고 살뜰해서 참 편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얼굴에 들러붙은 진흙 덩어리 때문에 입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문제의 연회 당일이 임박한 지금, 나는 일전에 남편 놈의 생일날 혼자 끙끙거렸던 초라한 준비와 매우 대조되는 연회 준비에 시달리고 있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난 뒤 얼굴에 붙은 진흙팩인지 뭔지를 씻어내고, 다시 무슨 씨앗을 푼 물에 세수하고, 하녀들에게 붙들려 달군 집게로 머리카락을 만지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고르고 고른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신발을 신고 장신구들을 다 찔러넣기까지 그야말로 진이 쏙 빠졌다.
로마냐에서는 이것보다 더하게 치장하곤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제대로 공들여 치장을 한 건 오랜만이라 그런가 눈이 핑핑 도는 것 같다. 젠장, 명색이 귀부인이거늘.
이런 건 전생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심하면 열리는 자선 파티를 비롯해 온갖 상류층의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전문가들이 들러붙어 치장을 도와주었지. 십 대 때부터 아주 익숙한 절차였다.
“다 끝났습니다, 마님.”
대체 그놈의 남편 놈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벌이는 건지 원.
내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거 아닐까 두려워진다.
마치 애를 갖다 버리기 전에 일부러 예쁘게 꾸며놓고 놀이동산 데려가서 실컷 놀아준 다음…… 아냐, 아냐! 나쁜 망상 하지 말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그래, 쓸데없이 불안에 떨며 기력 낭비할 필요 없어. 절망스러운 궁리는 일이 닥치고 나서 생각하자.
“아…….”
“정말 아름다우세요, 마님. 여름꽃 같으세요.”
로냐가 볼을 발갛게 붉히며 찬사를 보낼 법도 했다.
루드베키아가 미모 하나는 참 뛰어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모두가 알지.
체시아레 놈도 내 얼굴만큼은 손대지 않았으니…… 내 전생도 지금 삶도 아름다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으나 전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내 속이 얼마나 못났고 곪아 썩었든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그저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남부 여인 같았다.
구불구불 물결치는 금발에는 우윳빛 진주알 장식이 흐르듯 박혔고 화장 때문에 안색에 더 생기가 돌아 보인다.
넓은 레이스 소매가 달린 분홍색 공단 드레스는…….
음, 드레스를 다른 걸로 고를 걸 그랬나? 막상 입고 나서 보니까 좀 애 같은데.
차라리 도발적인 빨간색이나 우아한 보라색이나 뭐 좀 매혹적인 스타일의…….
“마음에 드시나요, 마님?”
“응. 다들 고마워.”
에휴, 됐다. 이제 와서 다른 거 골라 입을 시간도 없고, 내가 그런 거 입어봤자 비웃음만 살 테니.
그리고 이스케 놈이 그런 거에 넘어갈 위인이었다면 나랑 결혼하기 전에 진작 실컷 연애했겠지.
“준비가 다 되셨다 들었습니다.”
로냐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잠시 숨을 좀 돌리고 있자니 엘레니아가 나타났다.
아리따운 시누이가 등장하자마자 나는 조금 전 들은 찬사가 부끄러워졌다.
내 몸엔 미안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엘레니아와 견줄 수가 없어!
섬세한 비늘 같은 재질의 은빛 드레스에 간단한 백금 티아라 하나만 얹은 엘레니아는 말 그대로 겨울의 여신 같았다. 북부의 얼음 공주님 그 자체라고 할까.
“와아, 엘렌, 오늘 진짜 아름다우세요.”
“……루비도 사랑스러우십니다.”
내가 사랑스러워 봤자지요. 호호.
눈을 약간 내리깔며 대답하는 엘레니아의 뒤로는 하녀장이 따르고 있었다.
나를 힐끔힐끔 훑는 밤색 눈동자가 못마땅하게 빛난다.
너는 여전히 내가 싫구나? 나도 네가 싫단다.
“뭔가 부족하거나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로냐와 루실이 매우 열성적이어서 말이지요. 이렇게 대접받는 기분은 여기 와서 처음이었답니다. 하하. 젠장.
“그럼 전 먼저 연회장에 가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어디가 안 좋으신 듯하면 누구에게든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네, 네. 열심히 머리를 끄덕이는 나를 뒤로하고 엘레니아는 자리를 떴다.
정중히 그 뒤를 따르는 하녀장은 어째 아까보다 더 못마땅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내가 이젠 엘레니아한테도 연약한 척 불쌍한 척 여우 짓을 한다고 여기는 건가? 그래, 나 여우다. 어쩔래.
나의 거식증과 공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엘레니아는 내게 전보다 조금 더 스스럼없이 대해주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몰라 불안불안한 한편으론 내심 좋았다.
그리고 프레이야가 부러워졌다. 왜냐하면 프레이야는 엘레니아랑 절친이잖아. 휴, 다 가졌네.
가만, 그런데…….
나는 연회장에 어떻게 가지? 그냥 혼자 당당히 가면 되나? 아니면 누굴 기다려야 하나?
참으로 귀족답지 못한 딜레마였으나 로마냐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워낙 혼자 알아서 부딪히던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탓인지 갈팡질팡해졌다.
얼마 전까지는 혼자 목욕하기도 일쑤였으니 원. 내 귀부인 체면이여.
“마님, 모시러 왔습니다.”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새삼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지만.
과묵하고 사무적인 분위기의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오만 가지 의혹이 일었다. 워낙 여기 것들에게 당한 게 많은 탓이리라.
어디로 가는 걸까. 설마 이대로 나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 가둬버리는 장난을 치는 건…….
“공자님.”
응?
서편 별관으로 이어지는 긴 통로가 끝나는 지점의 창가에 어디서 많이 본듯한 녀석이 매우 시건방진 모습으로 걸터앉아 건틀렛을 고쳐 끼고 있었다.
순간 낯설게 보인 건 그 시커먼 갑옷 말고 다른 걸 입은 모습을 거의 못 봤던 탓이리라. 단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왔나.”
얘, 너 왜 그렇게 헐벗었니? 네가 무슨 <어쌔신 크X드>냐?
이스케가 입고 있는 옷은, 뭔가 중동지역 암살자의 그것 같은 복장을 보다 야하게 재창조한 듯한 디자인이었다.
이 추운 지역에서 팔뚝이랑 가슴팍만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후드 상의가 말이 되는가? 복부가 다 드러나잖아!
후드를 벗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미남계 암살자로 오해할 뻔했다.
그나마 바지는 멀쩡한 편이었으나 이질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건 대체 뭔 옷이야. 너 성기사 맞니? 금욕주의자 맞아? 너같이 생긴 금욕주의자가 이렇게 헐벗고 다니기까지 하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 안 드니?
내가 얼이 빠져 놈을 쳐다보는 동안 이스케 역시 고개를 들고 나를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황당해 죽겠는 건 나인데 말이지, 너는 눈을 왜 그렇게 뜨니?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내가 촌스럽거나 기품 없어 보이나?
에라, 모르겠다.
“우와, 당신 오늘 진짜 멋져 보여요.”
열성 팬답게 손뼉까지 치며 눈을 초롱거린 것이 무색하게도, 남편 놈은 내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들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간파한 듯했다.
“지랄 맞은 기밀 임무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돌아와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어.”
뭐요? 기밀 임무? 그런 것도 하니? 그냥 마물만 때려잡는 줄 알았는데 뭐 암살 같은 것도 하나? 다시 봤다, 얘. 성기사가 그래도 되나.
“그럼 그 옷은 임무용이에요?”
“대충 그래. 갑옷은 너무 눈에 띄니. 마물 쫓아낼 때야 효율적이지만.”
누가 봐도 명백히 이게 더 눈에 띄는 거 같은데요?
가톨릭을 모티브로 한 종교가 중심인 세계에서 이런 중동지역 암살자 같은 복장이라니 뭔가 심히 모순적이다.
이거 디자인한 양반 대체 누구야? 누구인지 몰라도 기사들 벗겨놓는 거 좋아하는 변태가 틀림없다. 저 복근 울퉁불퉁 다 드러난 것 좀 보게.
내 얼굴이 자꾸만 후끈거리는 것 같아.
유혹은 내가 해야 하는데! 왜 저놈이 날 유혹하는 것 같은 복장인 거냐고!
갈아입을 시간이 없기는 뭐가 없어, 아무 눈치도 보지 않는 안하무인 주제에!
손을 털며 몸을 일으킨 녀석이 나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혼자 가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옷이 이래서 미안하게 됐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날 혼자 연회장에 가게 하기 싫어서 옷도 안 갈아입고…… 너 진짜 누구니? 이거 이스케로 변장한 암살자 아니야?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모습도 새롭고 야…… 멋있는걸요. 당신이랑 같이 연회라니 진짜 꿈만 같아요.”
네가 궁중연회에서 날 혼자 버려두고 간 걸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긴 하구나.
나는 자꾸 놈의 복근으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려 애쓰며 내밀어진 손을 슬쩍 잡았다.
아이고, 넌 왜 이렇게 콱 움켜쥐는 거야. 진짜 내가 병아리로 보이냐.
그렇게 보인다 해도 무리가 아니긴 하다만. 얘가 좀 커야지.
크고 도발적이기 그지없는 차림의 남편 놈 손에 인질처럼 콱 붙들린 채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우리의 모습이 어찌 보일지 심히 우려스러웠다.
“맙소사, 저거 봐, 이스케 경께서…….”
“이스케 경 맞지?”
“저거 그 유니폼 아니야? 예전에 우리 오빠도 입은 거 봤는데, 어쩜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저런 모습 처음 봐.”
“어머나…….”
여러분. 침 떨어지겠습니다그려. 뭐 이해합니다.
한편 친애하는 팔라딘 동료들의 반응은 몹시 판이했다.
“저 새끼 저거 왜 저래?”
“그 일 갔다 왔잖아.”
“근데 왜 저러고 나타나? 양심도 없는 새끼가.”
“저 새끼한테 양심이 어디 있어.”
딱히 놀랍지는 않으나 퍽 아니꼽게 보는 반응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결례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긴 임무 수행하다 온 거니, 과연 팔라딘 우대 국가답다. 팔라딘이기만 하면 뭐든 용서가 되는 건가 봐. 나도 팔라딘 하고 싶군.
“한데 옆에…….”
“부인 때문에 여는 연회라더니 맞는 모양이네.”
“왜 그 소동 이후부터…….”
“보나 마나 그래봤자…….”
물론, 나를 향한 수군거림 또한 있었다. 하하하. 당연히 예상은 했다. 말 나올 만도 하지.
게다가 궁중 연회장에서 날 버리고 홱 가버렸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이런 안 하던 짓이라니…….
한결같이 도도한 남편 놈은 연회장에 모인 무수한 인원 절반가량을 침 뚝뚝 흘리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이 도도하고 오만한 자태를 좀 봐.
“아슬아슬했네, 오빠.”
“야, 넌 양심이 있으면 좀 갈아입고 와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부랴부랴 왔어도 말이야.”
연회장에 다다르자 제일 먼저 엘레니아와 아이반 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아이반 경이 엘레니아의 에스코트를…… 흐음, 이 둘. 흐음?
“오랜만입니다, 부인. 와, 근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뭡니까. 정말 사랑스러우십니다.”
“고마워요. 아이반 경도 멋있으세요.”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인사하는데 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비단 아이반 경뿐만이 아니라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근처에서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신기하리만치 아무 내색들 안 하고 있긴 해도,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니…….
“이스 그런 차림 오랜만에 보네.”
“프레이야.”
귀가 절로 쫑긋 섰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여러 일을 겪으셨다 들어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변함없이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그때의 각혈하던 모습 이후 처음으로 보는 프레이야였다.
다들 별 탈 없이 회복했다길래 마냥 그러려니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또 아닌 것 같다. 북부의 기상 어디 갔어?
창백하게 반짝이는 옅은 금발은 우아하게 한쪽으로 넘기고, 늘씬한 골격에 잘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를 걸친 프레이야는 늘 그렇듯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어딘가 창백하고 파리해 보였다.
평소의 싱그러움과 생동감 대신 고혹적인 처연미가 팍팍 풍긴달까.
회복이 빨랐다던데 후유증이라도 남은 건가.
열흘 내내 앓아누운 이는 내가 아니라 저쪽처럼 보인다. 이거야 원, 누가 봐도…….
“영애께서도…… 무탈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죠. 어쨌든 우리 모두 무사하니 신께 감사드릴 일이에요.”
자신이 겪은 일을 두고 어떤 억측들이 오갔는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나를 향해 상냥하게 웃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딱히 드러나는 공포나 꺼림칙함은 없었다.
그런 걸 내색할 인물도 아니겠지만, 오히려 예전보다도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분위기다.
하기야 그때 이스케 놈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나를 팩 밀치고는…… 그래그래 너네 잘났다. 나도 알아. 결국에는 누가 제일 중요한지 나도 안다고, 잘난 주역들아.
그런데 옆에 저분은 누구지? 로렌초가 아니라서 좋긴 하다만.
프레이야와 함께 등장한 이는 처음 보는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창백한 금발과 시원한 눈매가 프레이야와 꼭 비슷하다.
단 프레이야 비해 조금 더 깐깐하고 냉랭한 인상이었다. 가족일까?
“오랜만입니다, 퓨리아나 부인.”
“공자께서 연회를 여신다 하여 인사차 들른 것뿐입니다. 젊은이들이 노는 데 방해하지 않을 터이니 심려 마십시오.”
역시 프레이야의 어머니인 모양이었다. 우아하면서도 거침없는 투로 말한 부인이 곧바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운 은빛 눈동자가 빠르게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얼굴도 모르는 루드베키아의 생모 말고, 내 전생의 양어머니가.
“요양이 길어지는 바람에 인사가 늦게 되었습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한 점의 온기도 없는 형식적인 어투였다. 딱히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성향 자체가 그런 느낌.
그것보다 대놓고 나를 보러 왔다는 티를 팍팍 풍기시는데.
내가 딸내미의 독살범인지 아닌지 확인할 작정이기라도 하나.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애께서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특출하신 거였군요.”
최대한 무해하게 방긋 웃자 퓨리아나 부인은 마치 관찰하듯 한쪽 눈썹을 약간 올리더니, 남편 놈 손에 꽉 붙들린 내 손을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다. 흐음?
“과연 듣던 대로 사랑스러운 분이시군요. 남부의 영양들은 전부 님프 같다더니 맞는 말입니다.”
니, 님프라. 꽤 과한 비유이긴 한데, 워낙 건조한 어조라 그런지 다분히 형식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나는 몸을 꼿꼿이 폈다.
“엄격한 북부에 비해 상당히 자유분방하다는 것도 말입니다. 듣자 하니 최근 이런저런 변을 겪으셨다던데…….”
의외로 도발적이시군요, 아주머니. 한데 도발의 대상이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은 단지 기분 탓일까요?
“잡담이 길어지는군요. 인사만 하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남편 놈아, 아무리 안하무인 유아독존이라 해도 친구 어머니한테 그런 말투는 좀 그렇지 않니? 그것도 후작 부인인데.
그러나 퓨리아나 부인은 이스케의 싸가지 밥 말아 먹은 태도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알 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비트는 모양새가 퍽 의미심장했다.
“실례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쓸데없는 말이 늘었군요.”
“차라도 들고 가시지요, 부인.”
“괜찮습니다, 공녀. 다음번에 따로 마시지요.”
“정말 벌써 가시려고요, 어머니?”
“아까부터 말하지 않았니. 그보다 머리 모양 좀 어떻게 다시 하거라.”
보기 좋은 웃음을 머금은 프레이야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머리 모양 괜찮기만 한데. 왠지 내가 다 민망스럽군.
비단 나뿐만 아니라 엘레니아와 아이반 경 역시 퍽 민망해하는 기색이었다.
“너희 어머니는 여전하시네. 그것보다 정말 이렇게 나와도 괜찮아? 오늘따라 안색이 창백한데.”
“이제 다 나았는걸. 어머니야 뭐 오늘은 그래도 양호하신 편이지. 아이반 경, 제 머리 이상하나요?”
“전혀 흠잡을 데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요? 휴, 이스 네가 보기엔 어때?”
“어머님 말씀이 옳다. 다음부터는 가발이라도 쓰고 오든가.”
“뭐어? 하여간 너무해.”
금방 다시 쾌활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괜히 민망해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알아서 잘들 깔깔댈 텐데 말이지.
“네가 그러니까 이렇게 귀엽고 착한 부인께서 가출을 다 하신 거 아니야.”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
“뭐라는 거야, 바보. 아무튼 부인, 다음부터는 차라리 이 녀석더러 나가라고 하세요. 무탈하셨기에 망정이지 무슨 변이라도 당하셨으면 어쩌실 뻔했어요. 자경대라 해봤자 어차피…….”
말끝은 또 왜 아련하게 흐리니.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지 알겠다만 아무래도 상관없단다.
왜냐하면 그건 다름 아닌 이 남편 녀석이 직접 꾸며낸 전말이니까.
“그만 만지작대지 그래.”
“네?”
잡힌 손을 끌어당기는 느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스케는 예의 그 무심한 듯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한테 말하는 거 맞니?
“네 머리.”
“아…….”
“그대로 괜찮은데.”
잠시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슬그머니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손을 내렸다.
이런, 퓨리아나 부인이 나한테 한 말도 아닌데. 깜박 전생의 어머니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고마워요. 당신 머리도 예뻐요.”
“…….”
“에헤헤, 춤추실래요?”
이스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조니? 아니면 내 얼굴에 뭐 묻었니?
물론 도도하신 네놈이 춤 같은 걸 출 리야 없지만, 면박을 주든 뭘 하든 대답은 좀 해주렴.
결국 남편 놈 대신 엘레니아가 대답해 주었다.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빠는 아마 기본 스텝도 까먹은 지 오래일 겁니다.”
“맞습니다. 저 새끼가 워낙 숙맥이라 틀림없이 부인 발등만 만신창이가 될…….”
“못 할 것도 없지.”
예? 방금 뭐라고요?
미처 내 귀를 의심해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남편 놈의 무시무시한 손아귀에 붙들린 채 그대로 댄스홀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뒤를 돌아보는 내 눈에 마찬가지로 황망함을 금치 못하는 낯빛의 세 친구가 보였다. 어어? 이봐요, 이게 아닌데?
“저기, 지금 진짜로…….”
“갑자기 쑥스럽기라도 하나? 우리가 먼저 춰야 다른 인간들도 놀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네가 나랑 춤을 춘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거기다 그 차림으로! 그런 야하기 짝이 없는 차림을 하고서! 대체 누굴 유혹하려고!
“그게 아니라 너무 꿈만 같아서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지금. 제발 누가 내게 이것이 사망 플래그가 아니라고 좀 말해줘.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원작의 이스케는 나와는 물론이요, 그 누구와도 춤 따위 추지 않는 고고하신 철벽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예상 밖의 행각이라니 어찌 수상쩍지가 않겠는가.
너 대체 누구냐? 역시 이스케로 분한 암살자 아니야?
혼란스러운 심정을 감추려 애쓰며 함께 댄스홀에 다다르자 군중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충격과 공포에 전 수군거림, 그리고 광분.
“뭐, 이스케 그 새끼가 춤을 춘다고? 어디냐, 거기가 대체 어디냔 말이다!”
“여기야, X신아.”
“얼씨구 지랄 났네, 부인 발 밟고 망신이나 당해라!”
“확 고꾸라져 다리나 부러져라!”
남편아, 네 전우들의 뜨거운 동료애에 감동의 전율이 이는구나.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온 거니.
유체이탈을 시도 중인 나와는 대조적으로, 연회장을 실시간으로 초토화하는 중인 장본인께서는 하늘 아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어 뵈는 멀뚱한 표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의 여유라는 걸까? 그래 너 잘났다.
“신나게 제안하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랑 추기 싫어진 건가?”
“서, 설마요. 너무 오랜만이라서 좀 긴장한 것뿐이에요.”
심장이 아주 벌렁벌렁하네.
침착하자.
나는 인형이다. 그냥 춤추는 인형인 게야.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지.
“로마냐에서 유행하는 춤이 따로 있나?”
“있긴 한데 조금 방정맞을지도…….”
“그럼 그걸로 하지. 네가 리드해 주면 되겠군.”
대체 뭔 바람이 든 거야. 에라, 모르겠다.
고상하신 북부인들이 뭐라 생각하든 일단 이놈이 가장 중요하잖아.
굽이 거의 없는 걸로 신길 잘했네.
악사들이 연주하는 경쾌한 왈츠곡이 비장한 선율을 타고 드라마틱하게 퍼졌다.
왜 내 귀에는 심판의 날 레퀴엠처럼 들릴까?
하하. 내 앞에는 헐벗은 암살자 행색의 괴수가 있고…… 저 쇳덩이 같은 발에 밟히면 내 발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겠지.
나는 춤추는 인형이다.
암살자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흥미로운 춤사위를 펼치는 인형일 뿐이다.
그 생각에 집중하려 애쓰며 흐르는 선율에 몸을 맡겼다.
초반엔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추는 춤이었기에 놈의 복근과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맨가슴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유혹은 내가 하려 했거늘! 왜 정작 아무 생각도 없는 이 목석이!
“……신기하네.”
나는 네놈이 더 신기하단다. 아까보단 긴장이 약간 풀리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들자 놈과 눈이 마주쳤다.
아름드리 샹들리에 불빛을 담고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
참 오묘하긴 하다니까.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는 전생에도 많이 봤지만, 얘처럼 예쁘면서도 섬뜩한 눈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잘 따라오시네요. 역시 뭐든 완벽하셔요.”
“어색해 죽겠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너 진짜 왜 이렇게 잘 따라오니?
물론 내 발을 밟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정말 오랜만에 춤추는 거 맞아?
지난번 실패한 초야 때 하던 모습도 그렇고 이거 알고 보니까 숨겨진 뒷얘기가 있는 거 아니야?
사실은 금욕주의자인 척하는 자유주의자였다던가.
박자가 빨라지면서 아슬아슬하게 붙었던 몸이 떨어졌다.
한쪽 손만 맞잡은 채 잠시 원을 그리다 빙글 홱 돌아서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울퉁불퉁한 근육 덩어리들이…… 절대 사심이 아니라 춤의 일부였다!
그 다음이 가장 어려웠다. 다행히 여자 혼자 추는 거나 마찬가지라 내 발등은 무사할 터였다.
남자 손을 완전히 놓고 발꿈치를 들고서 양팔을 접었다 폈다 하며 남자 주변을 빠르게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도는 거다.
내 전생에 발레를 배웠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맞아가며 익혔을 터였다.
이름하여 나비와 꽃.
누가 이런 거창한 명칭의 춤을 유행시켰는지 몰라도 남부 영양들의 원망을 두고두고 들을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춤에 열중하는 동안에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렸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뭣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하다.
나는 빙글빙글 도는 나를 쫓는 이스케의 시선에 대고 활짝 웃었다.
남편 놈아, 네가 꽃이야, 네가! 괴수 암살자 같은 네가!
그리고 나는 나비란다. 너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용을 쓰는 중이지.
클라이맥스가 끝으로 치달음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빙그르르 돌며 나비답게 놈의 품으로 홱 안겨들었다.
상체가 뒤로 홱 젖혀지면서 빠르게 허리를 받치는 손길이…… 완벽해! 너 진짜 사기 친 게 아니라면 소질 있구나?
흥에 겨운 탓일까, 아니면 음악 때문일까, 내게로 수그린 붉은 눈동자가 유독 빠질 듯 깊어 보였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일순 눈을 딴 데로 돌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왜 그런 눈을 하고 나를…….
바로 그때 누군가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내뱉는 소리와 함께 웅장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면서 몸이 바로 세워졌다. 의외로 격렬한 박수 소리에 좀 안심되었다. 원래 여기서 코다로 마무리 지어야 하지만, 뭐 어때. 오랜만에 춰서 그런지 숨이 좀 가쁘네.
뒤로 물러서서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몸을 숙였다.
이스케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모습으로 마무리 인사를 했다. 하도 정중하고 절도 있게 보여서 진짜 암살자를 감명시키는 데 성공한 기분이 일 정도였다.
“마음에 드셨나요?”
“……남부 영양들은 힘들겠군.”
그래, 내 너한테 뭘 바라겠니. 이 한결같은 자식! 아까 그런 이상한 눈빛이나 짓지 말든가! 씨이, 하마터면 감명받은 걸로 착각할 뻔했어.
다시 새로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짝을 짓고 댄스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야한 암살자의 손아귀에 꼬옥 붙들려 음료수를 마시러 향했다. 그림이 참 그렇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아, 깜짝이야. 네가 무슨 시동이니?
이슬 맺힌 유리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우리 앞을 가로막은 녀석은 아니나 다를까 앤디미온이었다.
맑은 호박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초롱초롱 빛나는 것 같다.
이스케는 황당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여는 찰나 앤디미온이 먼저 말했다.
“정말이지 환상적인…….”
“그만.”
“예, 하지만 세상에 맙소사 경께서 춤을 다, 무엇보다…….”
“거기까지.”
“거기다 부인께선 정말로 봄의 요정 같은…….”
“너 나가라.”
“그렇지만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러한 감동과 여운을…….”
그 기사에 그 종자 아니랄까 봐, 앤디미온도 보면 볼수록 만만치가 않다.
나는 안하무인 남편 놈이 이 자리에서 종자를 박살 내려 드는 거 아닐까 살짝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앤디미온의 목덜미를 쥐고 밖으로 내던질 기세이던 이스케가 갑작스레 저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는 내 시선에 이윽고 계단 옆쪽에 장대와 같이 장엄하게 서 있는 아버님이 들어왔다.
아까 내내 안 보이시더니 언제 나타났지?
아들내미 옷 입은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하신 듯, 왠지 좋지 못한 표정의 아버님 앞으로 이스케가 다가가 섰다. 둘이 거의 키가 같았다.
이스케는 이쪽을 등진 상태였기에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분위기가 꽤 살벌하다는 것만큼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 부자는 만나기만 하면 저 모양이군.
이스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부인.”
나는 얼른 앤디미온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찰랑거리는 분홍색 음료가 무척 시원해 보인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것보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부인. 아니, 경이로웠습니다! 이스케 경께서 춤을 추신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부인께선 정말이지 굉장했습니다.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부끄럽네요. 하잘것없는 재주일 뿐이랍니다. 오히려 너무 과했던 거 아닐까 걱정이에요.”
“과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경께서도 완전히 넋이 빠진 듯 보이던데요. 전 솔직히 두 분이 키스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얘 이스케한테 하도 처맞고 살아서 나사 몇 개가 빠진 것이 분명하다.
지 상관이 어떤 작자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키스는 무슨 얼어 죽을 키스!
한시가 급한데도 아직 뽀뽀도 못 해봤구먼!
일전에 내가 그놈 볼에 입 맞춘 건 논외로 치자.
“아하하, 그래 보였나요?”
“저뿐만 아니라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까 그놈이 내가 봐도 좀 요상한 눈빛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음악과 춤에 잠깐 홀렸다 해도 그런 짓을 할 위인이 아닌걸.
“딸기입니까?”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쩐지 갑자기 바닥이 진동하는 것 같더라.
“아, 아니요. 자몽 같은데요.”
이름이 갈라르라고 했던가?
아무튼 앤디미온의 형님은 언제나처럼 내 대답을 끝으로 다시 쿵쿵 멀어져 갔다.
대체 저분은 왜 매번…….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앤디미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지능이 더 퇴화하는 것 같습니다.”
“음, 멋진 형님처럼 보이는걸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후, 차라리 이스케 경 같은 분께서 제 친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취향 한번 괴상하구나. 네 형도 형이지만 너도 참 독특해.
어쨌든 갈라르 경 또한 앤디미온처럼 그날 서리숲에서 나의 비밀을 알아버린 이들 중 하나였다.
아이반 경도 그렇고 다들 지나치리만치 변함없는 태도가 불안해해야 할지 안심해야 할지 모르겠다.
워낙 자부심 넘치는 팔라딘 나리들이라 내가 설령 마녀라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이런 건가?
혹은 일단 나를 안심시킨 다음 비밀리에 자기들 일을 돕게 하려는 걸지도……?
만약 역시 그런 거라면 나는 어쩌면 되는 걸까.
단순히 민가를 습격한 마물을 돌려보내는 수준이 아니라 이참에 마물들의 씨를 탈탈 털어버릴 작정으로 내 협조를 종용하거나, 서리용이나 포포 등이 사고를 쳐서 잡으려 든다면?
나는 오직 내 한목숨 부지하기 위해 무슨 짓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가정이 떠오를 때마다 속이 메슥거렸다.
우습게도 그런 순간이 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보다는, 내가 거절했을 때 이스케가 어떻게 나올지가 더 궁금한 느낌이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와, 저거 참 맛있겠군요.”
응?
나는 앤디미온이 바라보는 쪽을 따라 멍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저게 뭐야? 설마 푸딩인가? 그냥 푸딩 모형 아니야?
번쩍번쩍한 뷔페 테이블 중앙에 시종들이 짊어지고 오는 그것.
실로 예술적인 그릇에 담긴 그것은 아무리 봐도 요즘 들어 익숙한 대왕 초코크림 푸딩이었다.
푸딩은 푸딩이었는데 크기가 무슨 삼단 케이크만 했다!
“한번 가서 맛보실…… 으아앗!”
“동작 그만. 너 왜 여기서 알짱대냐?”
엘레니아와 춤을 끝마치고 나타난 아이반 경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앤디미온의 귀를 잡고 쭈욱 당겼다.
보는 내가 다 아프다. 종자들 좀 그만 괴롭혀!
“하, 하지만 저는 이스케 경의 종자로서 공자비께 푸딩을 갖다 드릴 의무가…….”
“네가 처먹으려고 했으면서 개수작은.”
“저야 하, 한 입만…… 아아앗!”
불쌍한 앤디미온.
명색이 손님이거늘 그깟 푸딩이 뭐라고.
난 되레 네가 다 먹어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그나저나 부인, 아까 정말 놀랐습니다.”
“오빠가 루비 발을 밟지 않은 것도 놀랍지만, 하여튼 루비한테 그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 배우고 싶을 정도더군요.”
오오! 엘레니아의 이런 후한 칭찬이라니 내가 꽤 잘 해내긴 했나 보다. 남편 놈이 이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한데 오빠는 또 어디 간 겁니까?”
“저쪽에 아버님과…….”
하고 말을 잇던 나는 이윽고 아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서 암흑의 기운을 풍겨대던 부자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새 어디로 갔지?
“아버지가 오셨습니까?”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쪽에 계셨는데…….”
엘레니아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막 앤디미온의 귀를 놓아주던 아이반 경 또한 대뜸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왜들 이러니? 내가 모르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면 단순히 둘이 충돌하는 것 때문이려나.
지난번 신전 축일 행사 때도…….
“그렇군요. 그나마 자리를 옮겼다니 별일이네요. 오빠가 신경을 쓰고 있긴 한가 봅니다.”
뭐를 신경 써요?
“저어,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버님께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던데…….”
“별일 없습니다. 단지 오빠가 죽을 때가 다 됐다 싶어져 심기가 불편하신 것뿐입니다.”
아이반 경과 앤디미온이 애써 숨을 죽이고 키들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네, 그렇군요. 영 납득하기 힘들지만 일단 잘 알겠습니다, 시누이님.
척 봐도 그냥 이 연회 자체가 마음에 안 드신 거 같던데, 이스케가 나랑 춤추는 것까지 봤다면 더욱 심기가 불편하긴 하겠다.
아들내미가 나랑 가까워질수록 계획이 어그러질 테니…… 젠장, 그러면서 나한테는 툭하면 의무 타령이나 하고 말이야.
“후, 덥다. 다들 엄청 활기차네.”
때마침 음료를 마시러 다가오는 프레이야의 모습에 나는 다시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단 이번엔 프레이야 때문이 아니라, 프레이야를 에스코트 중인 물빛 말총머리의 팔라딘 때문이었다.
내 비밀을 아는 또 다른 분.
깐깐하고 차가운 인상의 팔라딘께서는 잠시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넌지시 보더니, 이내 정중히 머리를 숙여 보이곤 시선을 돌렸다.
으으, 괜히 불안해.
“아이반.”
“뭐냐, 카뮤.”
“잠시 얘기 좀 하지. 이스케는 어디로 갔냐.”
그러는 사이 프레이야는 엘레니아가 건네주는 음료를 받아 들며 친근하게 떠들고 있었다.
“한데 공작님께선 안 보이시네.”
“오빠랑 눈빛 교환 중이시래.”
“또? 어휴, 하여간……. 그나저나 볼 때마다 키가 자라시는 듯하네요, 앤디미온 경.”
“예? 아, 예. 감사…….”
어라?
귓불을 만지작대다 말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인사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불쑥 자리를 떠버리는 앤디미온이었다.
정말이지 답지 않은 행위였기에 나는 자연스레 놀랐으나 결례를 당한 프레이야 본인도 다른 이들도 그다지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종자들 쥐어패기가 취미인 아이반 경조차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아직 제가 어색하신가 보네요. 그럴 필요 없는데.”
“영애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워낙 숫기 없는 녀석이라서요.”
“그렇지만 제 동생이랑 싸우신 거지 저랑 싸우신 건 아니잖아요.”
호오, 이건 또 무슨 뜻밖의 뉴스람. 앤디미온이 로렌초랑 싸웠다고?
“저어, 싸움이라니요?”
“아, 부인은 모르시겠군요. 철부지 종자 놈들이 글쎄 자기들끼리 뭐가 꿍했는지 잠깐 풀어준 사이에 패싸움을 벌였지 뭡니까. 그것도 떼어놓고 보니 두 놈이서 시작하고 나머지는 구경하다 분위기에 휘말린 거랍니다.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이란.”
음, 아이반 경이 종자들을 어떻게 떼어놨을지 상상이 가는 건 왜일까.
“왜 그런…….”
“글쎄요, 꼴에 누가 잘났는지 겨루기라도 했나 보지요. 하나같이 주둥이 꾹 다물고 말을 처 안 합니다. 영애께선 뭐 들으신 거 없으십니까?”
“저도 로렌이 도통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아, 얘기 좀 하자고.”
묵묵히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카뮤 경이 기어이 왈칵 짜증을 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시늉을 하던 프레이야가 불쑥 내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부인, 이러고 계시지 말고 가서 저희와 함께 놀아요.”
예끼, 이 요망한 손 놓지 못해?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설상가상으로 엘레니아까지 합세했다.
“프리 말이 맞습니다. 루비도 이 기회에 친분도 쌓고 해야지요. 어차피 오빠도 그러라고 벌인 판입니다.”
그 야박한 놈이 나더러 친구 사귀라고 연회를 열었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쓰다 달다 말도 못 하고 엘레니아와 프레이야에게 사이좋게 붙들려 다른 여인들이 모인 곳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것들아, 내가 무슨 포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