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36)

* * *

일단 의혹은 밀어두고, 가출 소동 덕에 무산된 일-체시아레의 편지에 답장을 쓰고 신전에 가서 대주교를 만나는 일 말이다-을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체시아레 놈의 편지 내용은 으레 그렇듯 건조하고 간략했다.

로마냐 국경 지대의 분란과 리미니 진군이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졌고 가족들 모두 잘 지내고 있으며 또 언제나 내 생각을 한다는 말.

으레 그렇듯 답장을 쓰는 건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자기는 간략하게 써도 내가 간략하게 답하는 건 못 봐주는 놈이니.

내 가출 소동 전말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정보망을 통해 들었겠지만, 그놈이라면 내가 여기서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하고 있기를 바랄 것이니 내심 좋아했을 거다.

어쨌든 그 부분은 대충 생략하고 온갖 아첨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부으며 만나서 할 얘기가 많으니 어서 오라고 보고 싶다고 썼다.

내 팔자야. 부디 어디 하나 콱 부러져서 못 오면 소원이 없겠다만.

“무사히 회복하신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신전에 도착하니 대주교는 무척이나 감개무량하다고 주장하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내가 뭘 몰랐다면 속 편히 감동했을 지경이었다.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 실종되신 기간 내내 단식하며 철야 기도를 올렸지 뭡니까. 다행히 주님께서 미천한 종들의 간곡한 부르짖음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노고에 감사드려요. 덕분에 무사히 돌아온 것 같네요.”

단식기도라는 것이 어떤 사기 행각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였으나 그냥 아무 생각 않기로 했다. 뭐, 여기선 다를지도 모르잖아.

가느다란 햇살이 천장을 뒤덮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왔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음침한 미궁 같았던 신전 내부도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진다.

“어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레이디 루드베키아, 제 질녀 일과 관련해 그간 수도에서 떠돌던 천박한 억측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듯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대주교 또한 그 일이 내 방종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 법도 하겠다. 알아서 오해해 주니 고맙군.

“그러실 거 없어요. 이젠 신경 쓰지 않는걸요. 무엇보다 영애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일 따름이죠.”

“과연 시스티나의 천사이십니다. 속된 무리와 비교할 수가 없군요.”

성호를 그으며 보랏빛 눈을 감개무량하게 빛내는 대주교는 참으로 경건하게 보였다.

이분은 정말 프레이야 독살 기도 사건과 아무 연관도 없는 걸까?

애지중지하는 질녀라 한들 아끼는 척하면서 장기짝으로 여기는 인간은 널렸는걸.

누가 보면 엄한 사람들 의심한다고 하겠지만 아무도 믿을 수가 없으니 원.

이 대주교가 단지 야망 있는 평범한 성직자에 불과하다면 나도 좋겠지만, 비단 대주교뿐만 아니라 이 신전의 무수한 사제들과 수도사 중 누가 내 친정의 첩보망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쪽에서 먼저 내게 접근하지 않는 이상…….

이건 체시아레가 나를 철저하게 감시 중이라는 방증도 되었다.

하여간 웃기는 놈. 그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주제에 약간의 신뢰도 허용 못 한다니.

원작의 루드베키아처럼 신전을 들락거리며 접촉을 시도하려 한다면 그것대로 남편 놈과 다른 이들의 오해를 살 것이니 문제고, 친정과 시가 양쪽 모두로부터 감시받는 내 팔자란. 체시아레가 오면 좀 파악이 되려나.

“하필 이런 시국에 사탄의 하수가 재출몰했다 하여 걱정입니다.”

사탄의 하수라. 우리 용 새끼를 말하는 것 같은데.

“아…… 안 그래도 다들 긴장하신 것 같았어요.”

“갈수록 참된 신도의 마음가짐을 잃어가는 북부에 내리는 징벌이지요. 축제가 속히 오길 바랄 뿐입니다.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오신다면 그 무엇보다 든든할 테니까요.”

그래, 교황 큰아드님인 체시아레 놈이 온다면 신전 입장에서야 기세가 오르긴 하겠다. 난 끔찍해 죽겠지만.

“저도 어서 오빠가 보고 싶네요.”

“조금 걱정이 일기도 합니다. 사랑스러운 누이가 그간 얼마나 고초를 겪으셨는지 아시면 틀림없이 대로하실 테니까요.”

“딱히 고초라고 할 건 없었는걸요.”

“참으로 너그러운 말씀이십니다만, 부인께선 그리 소홀히 대접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예하께 꾸짖음을 듣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체시아레가 대로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그러길 바라고 있는 것 같은 투였다.

꾸짖음이라니, 하하, 체시아레가 이스케를 꾸짖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려나.

오히려 둘이 싸움 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유아독존 안하무인으론 쌍벽을 이루는 놈들이니 원.

“한데 그때 저를 초대하신 이유가…….”

“아, 별일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때 상황이 상황이라 많이 놀라고 혼란스러우실 듯하여 미약하게나마 위안을 드리고자 뵙고자 한 겁니다. 어떤 작자가 그런 짓을 꾸몄는지 모르겠으나 필히 주님의 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그랬으면 정말 좋겠군요. 그게 차라리 로렌초 놈 입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에 날 보면 어떻게 한다 했더라?

“대주교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계속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표현이 미숙하지만, 정말 많은 의지가 되는 것 같아요.”

“성하께 충성하는 종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어떤 일이든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때마침 뎅- 뎅-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시간이 참 빠르군요. 점심 식사 함께하시겠습니까?”

“괜찮아요. 남편하고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이라기보다는 그냥 식사를 빙자한 고문 타임이겠지만. 그렇게 생긋 웃는데 대주교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부군께서…….”

아련하게 말끝을 흐리는 대주교의 만면에 얼핏 당혹감이 스쳐 갔다.

뭐지, 저 표정은? 뭐가 그리 놀라운 거야?

“……그렇군요. 나날이 가까워지시는 듯하여 다행입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냥한 어조였으나 왠지 떨떠름하게 들렸다.

희한하군.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나랑 남편 놈 사이가 더 나빠졌으리라 예상했던 걸까?

단지 막연히 짐작했던 것뿐이면 저런 떨떠름한 반응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길 바랐던 게 아니고서야…….

젠장, 순수하게 보려고 해도 자꾸 이러면 그럴 수가 없잖아.

“앗, 레이디 루드베키아!”

떨떠름한 분위기의 대주교의 배웅을 받으며 복도를 지나 입구로 나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종자 녀석이 나타나 해맑게 외쳤다.

앗은 또 무슨 의미니, 앗은.

“앤디미온 경.”

“안녕하십니까, 대주교님. 날씨가 참 좋군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앤디미온은 아이반 경만큼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서리숲에서의 소동 이후 조금이나마 날 꺼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들 왜 이렇게 태평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자기들끼리 뭔가 작당하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어떤 식으로 인사를 건네야 적절할지 고민하는 찰나 앤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무탈히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부인. 이제 다시 종종 연무장에서 뵐 수 있겠군요.”

“아하하…… 고마워요. 한데 여긴 어쩐 일…….”

“아, 이스케 경께서 부인을 모셔 오라 지시하셔서 말입니다. 점심 같이 하기로 하셨지요?”

그렇군요. 근데 이스케 그놈은 내가 여기 온 걸 어떻게 알았지? 그새 누구한테 들은 거야? 그놈 혹시 나 감시 중인가?

생글거리는 앤디미온의 금색 눈동자는 참 변함없이 해맑아 보였다.

일전에 엿들은 로렌초와의 대화에서 그 거칠었던 말투는 상상도 안 갈 지경이다.

“이스케 경께서 부인을 참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잠시 묵묵히 나와 앤디미온을 지켜보던 대주교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계시든 간에 크나큰 오해랍니다, 대주교님.

다른 호위 기사들도 있는데 굳이 종자를 보낸 상황이니 오해할 법도 하다만.

성기사의 종자는 견습생이라 해도 긴급 상황 시 귀한 보조였다.

평범한 기사의 종자나 일반적인 호위 기사들과는 비견할 수가 없는 존재.

평소에는 꽤 풀어주는 분위기라 한들 그것도 근처에 한해서지 누구 데리러 오는 하찮은 일에 종자를 보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 야박한 남편 놈 아무래도 날 감시하려는 작정이 분명한 듯한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