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6)

* * *

오메르타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기가 막혀 죽겠다 주장하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놈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모양이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뭐 그런 요의 말인 것 같았다.

아들을 두고 저런 소리라니 이 부자도 참 미묘하군.

“엘렌, 너도 같이 작당한 게냐?”

“아니요. 저도 아버지만큼 어처구니가 없습니다만.”

삭막하게 주고받은 부녀가 이제 나란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아니 왜 나를 보십니까. 나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요! 꿈에도 상상도 못 해본 일이라고!

“내 안뜰에 온실이라니 보나 마나 남부식 정원을 구현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구려.”

아버님 말씀에 일리가 있었다. 유리 온실이라면 북부의 기후에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바람 넣은 적 없다고요! 난 그저 그놈이 묻길래 설명해 준 것뿐이야!

우리가 얼이 빠진 모양새로 바라보거나 말거나, 북부 최강 인격 파탄자의 지시를 받은 부지런한 인부들께서는 정체 모를 괴상한 장비들을 가지고 작업에 매진할 뿐이었다.

구획을 나눠 땅을 갈아엎을 때마다 꽥꽥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온 노움들은 곧장 성수가 담긴 양동이에 처박히는 것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거야 원, 그냥 두더지 취급인데.

“뭐 원체 삭막했으니 이런 변화도 나쁘지 않다 봅니다.”

고마워요, 엘렌. 역시 당신은…….

“향수병이 덜어지면 가출하는 일도 없으시겠지요.”

“일리가 있다만, 이런 것도 다 한때다.”

아버님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엘레니아는 일순 입매를 굳혔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님 얘기인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중단하라 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그놈이 언제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더냐? 노발대발해서 아비 멱살을 잡으려 들 것이다.”

혀를 차듯 중얼거린 아버님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퍽 못마땅해하는 듯한 기색이다.

내가 아드님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긴 공작 입장에서야 이스케가 나한테 푹 빠져버린다면 그것대로 곤란하겠군.

언젠가 나와 이혼시키고 다른 북부 영양과 맺어줄 계획을 품고 계시니 말이야…….

“몸은 좀 괜찮으시오?”

“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얼굴로 방긋거리자 아버님은 잠시 나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이내 헛기침을 했다.

“가장 중대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 같소만, 조만간 속히 성사되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네, 네. 염려 마세요.”

그놈의 초야 얘기는 굳이 일일이 일깨워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요.

나도 다급해 죽겠다고. 얼른얼른 진도를 빼야 하는데, 일단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거 아닌가?

게다가 이 꿍꿍이 모를 남편 놈이 내 정체에 의문을 품고서 나와 그렇고 그런 일을 치르는 것을 더더욱 꺼리게 됐으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마님. 로냐라고 합니다.”

갈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하녀가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이제 열여섯쯤 됐을까?

“영지의 친척분이 추천한 아이입니다. 아직 어리긴 해도 손이 야무진 편이라 하니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전에 말한 것처럼 프레이야 쪽에서 알아봐 준 건 아니겠군요. 새삼 안도감이 인다.

“아…… 정말 고마워요, 엘렌.”

“진작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늦어져 면목이 없지요. 보다 노련한 사람을 알아볼까도 했는데, 오빠도 저도 나이 어린 아이가 나을 거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당장은 더 알아보기 어려우나 앞으로 차근차근 늘려갈 예정입니다.”

노련한 하녀든 어린 하녀든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내게 안심하고 편히 부릴 수 있는 전속 하녀가 생기다니!

웬일이야, 이제 더는 루실한테 뇌물 줘가면서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못돼먹은 사용인들한테 골탕먹을 일도 없고!

게다가 더 늘려줄 거라니 해가 서쪽에서 뜰 예정인가 보다.

유리 온실도 그렇고 갑자기 왜 이런 이변이 벌어지는 거지? 좋긴 하다만 적응하기 힘든데.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앞으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뭐든 열심히 할게요.”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로냐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상냥해 보이는 커다란 갈색 눈이 맑고 또렷했다.

수줍음 많으면서도 씩씩해 보이는 아이. 딱 내가 바라던 종류의 아이였다. 부디 네가 첫인상 그대로였으면 좋겠구나.

“오자마자 바쁘게 됐구나. 그러는 편이 적응하기 쉽겠지.”

“네, 아가씨.”

응? 오자마자 바빠? 의아한 표정이 된 나를 향해 엘레니아가 차분히 설명했다.

“연회를 열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축제 준비로 더 바빠지기 전에요.”

“네에, 그런데 어떤 연회…….”

“그냥 연회입니다. 루비는 주인공이시니 특별히 더 치장에 공을 들이셔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좀 맴돌았다. 내가 방금 뭔가를 좀 잘못 들은 듯한데.

“제가 주인공이요?”

“예.”

“어떤 주인공…….”

“루비 때문에 여는 연회이니 주인공이시지요.”

하고 말하는 엘레니아는 무표정한 얼굴에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따라서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뜬금없이 나 때문에 여는 연회라니, 난 생일도 아직 멀었고 뭘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가출했다 돌아온 탕아 기념 연회인가?

혼돈에 사로잡힌 내 심정을 알 턱이 없는 엘레니아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고 부담 가지실 건 없습니다. 어차피 주최자는 오빠이니 뭐가 잘못되면 오빠가 욕먹겠지요.”

퍽이나 잘도 그럴 것 같군요.

이스케 그놈은 대관절 왜 갑작스럽게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기행을 벌이는 거냐고!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번엔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게야?

여태껏 내가 에렌딜에서 참석한 사교 모임은 딱 세 개뿐이었다.

국왕 부부 결혼 기념 연회와 승마 모임, 그리고 이스케 놈의 생일 연회.

하나같이 참석일 뿐인 입장이었던 데다 그것도 세 번 모두 험난한 일이 벌어진 탓에 반만 참석한 셈이 됐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주가 되는 연회라니.

물론 오메르타 가의 공자비로서 내 입지도 공고히 하고 북부 토박이들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식의 소개 파티 같은 거라면 참 좋겠지만, 그놈이 그런 사려 깊은 생각을 해줄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아직 초야도 안 치렀다.

거기다 프레이야 일 때문에 아직도 날 아니꼽게 볼 인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내 가출 소동을 가지고도 여우 짓이네 뭐네 꼬아댔을 것이 뻔한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그런 연회라니 그 자식 대체 무슨 심보지?

설마 역시 그런 것인 걸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의 대가로 이런저런 것들을 적선해 주는 거 말이다.

내 안위를 살펴 주는 대신 마물 퇴치용 비밀 병기 노릇을 하라는 뭐 그런 심보라면?

아냐,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그리 보이지 않았는데.

나한테 섣불리 다시 마물이랑 접촉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막…….

휴, 어렵다 어려워. 내 살다 살다 체시아레보다 더 어려운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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