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36)

* * *

괴상하기 짝이 없었던 다과 타임이 끝난 뒤 레아는 아이반 경과 함께 돌아갔고, 아리엔 공주 역시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뛰어다녀도 괜찮은 건가?”

“세르게이 씨가 매일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고 해서…… 아까 제대로 못 걸었거든요.”

괴수와 단둘이 함께하는 산책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뜰을 산책하는 건데 어째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병아리가 된 기분인 걸까나.

물론 요 꿍꿍이 알 수 없는 남편 놈이 나와 따로 얘기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물들과 나에 관한 고찰이라든가, 앞으로의 처분 문제라든가, 나의 가출 소동에 묻히다시피 한 프레이야의 독살 기도 사건이라든가…….

“돌팔이야, 그놈.”

그렇군. 세르게이 씨가 돌팔이였군. 돌팔이 양반을 주치의로 둔 너희 가족은 도대체 뭐니 그럼?

정원이라기보다는 거친 숲에 가깝게 느껴지는 뜰을 지나는 동안 폭풍 전야 같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놈에게 꼬옥 붙들린 손바닥에서 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심문이든 뭐든 빨리 해줬으면 좋겠는데. 유예는 불안하단 말이…….

“네 가출 친구들 말인데.”

“네?”

“그때 거기서 처음 만난 거였나?”

가출 친구들이라.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핀은 그때 처음 만난 게 맞긴 했지만 포포는 아니었다.

포포와의 첫 만남을 설명하려면 그때 그 승마 모임 사건까지 꺼내야 하는데…….

이런, 왜 첫발부터 이런 질문인 거야. 하여간 남 고문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쏟아지는 햇볕이 눈이 부신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던 이스케가 머리를 약간 갸웃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햇살에 물들어 금발처럼 보였다.

“표정을 보니 아닌 모양이네.”

이럴 때만 눈치가 비상하신 것도 재주입니다그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솔직하게 불기로 마음먹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리핀은 거기서 처음 만난 거였어요.”

“포포리는?”

포포의 종명이 포포리인 건가? 딱 들어맞긴 하네.

“그때, 승마 모임에서요. 숲길에서 말을 타다가 무슨 넝쿨 같은 것에 끌려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포포리가…….”

그렇게 포포와의 첫 만남에 대해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내 가출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까지 불게 되었다.

신전에 방문하러 갔다가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잠깐 주변을 걸을 생각으로 빠져나갔다가 포포를 만났고, 그러다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말이다.

내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이스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무표정한 낯짝인 데다 아무 말도 없으니 괜스레 더 불안해졌다.

솥뚜껑 같은 손아귀에 꼬옥 붙들린 손이 불안하다. 왠지 이대로 콱 으스러뜨려 버릴 것만 같은…….

“그것뿐이야?”

“네?”

“다른 일은 없었어? 신전 근처에서 누구랑 마주쳤다든가.”

이건 또 무슨 함정이람.

마주친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중간에 로렌초랑 앤디미온의 무시무시한 대화를 엿듣기야 했지만 마주쳤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내 의아한 눈빛을 느꼈는지, 이스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보니 가출이 아니라 납치였군그래.”

“나, 납치라고 보기에는…….”

“아무튼 내 종자 녀석이 좀 이상한 얘기를 해서, 혹시나 해서 말이야.”

“이상한 얘기요?”

앤디미온이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설마 그때 앤디미온이 날 본 건가? 내가 기둥 뒤에 숨기 전에 봐 버린 건가?

로렌초는 분명 못 본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로렌초가 너한테 불렀다는 노래가 뭐라고 했지?”

남편 놈아, 이건 또 무슨 뜻밖의 질문이더냐. 그건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었니?

그놈의 노래 얘기는 나로서도 달가운 주제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전혀 믿지 않는 일이라 해도 주변에서 자꾸 떠들고 상기시키다 보면 자연스레 신경 쓰게 되기 마련 아닌가.

이스케가 나에 대한 그런 소문들에 신경 쓰기 시작한다면 최악이었다.

내 전 파혼자들만 해도…… 게다가 로렌초는 프레이야의 동생인데 자칫 이간질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원.

“아니, 됐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중얼거리는 투로 내뱉은 녀석이 내 손을 놓고 근처에 자리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기다려 보았으나 도통 다른 질문을 던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게 끝입니까? 저기요, 이봐요. 이왕 심문할 거 단숨에 끝내주면 서로 좋은 거 아니니?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

조마조마한 침묵 속에서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괜스레 놈의 도드라진 허벅다리 쪽으로 눈길이 갔다.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순간 불현듯 일전에 불발된 초야가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도 참.

“저어, 퓨리아나 영애께선 괜찮으신가요?”

슬며시 화두를 던지자 아니나 다를까 남편 놈은 곧바로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참. 왜 또 갑자기 힘들어 보이는 표정인 거야. 힘든 건 나라고, 이놈아!

별안간 그때 서리숲 속에서 이 녀석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이스케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긴 했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마곡석 용액을 좀 들이켰다고 북부인은 죽지 않아.”

그렇군요. 그것이 바로 위대한 북부인의 기상이로군요. 쳇, 다들 그 야단법석을 떨어놓고는.

“범인은 아직 못 잡은 거예요?”

“딱히 이렇다 할 단서도 없으니 지지부진할 수밖에. 뭐 그건 당국 문제지,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

진심인가? 칼같이 자르는 듯한 말투가 새삼 낯설다.

나랑 관련지었던 그 온갖 추측도 그냥 이렇게 묻히는 걸까?

“그것보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데…….”

긴장이 다시금 밀려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질문을 기다렸다.

“서리숲에서 사귄 녀석들 전부 얘기해 봐.”

“……네?”

“네 가출 친구들 말고도, 거기서 같이 논 것들 종류 말이야. 전부 네게 호의적이었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포포가 매우 무서워하는 듀라한 녀석들이 있었으니까.

그것들 덕분에 우리가 용 새끼의 보석 창고로…….

젠장, 아까 이것도 말해둘걸. 깜빡 빠뜨렸어.

“혹시 포포리가 듀라한이랑 천적 관계인가요?”

슬쩍 묻자 놈은 잠시 은빛 눈썹을 공포스럽게 꿈틀거리더니만, 이윽고 가관이라는 듯 픽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말하는 거 보니 듀라한한테 된통 당했었나 보군.”

“그, 그게…….”

“재미있었나?”

“……아니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내가 죄인이요, 내가!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부질없이 줄줄 불게 되었다.

듀라한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포함해 그곳에서 마주친 마물들에 대해.

이름을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선 생김새만 묘사하는 식으로 말했다.

남편놈은 예의 그 속 모를 게슴츠레한 낯짝으로 묵묵히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알겠다는 투로 내뱉었다.

“서리용까지 전부 금수 새끼들뿐이었다는 거네.”

금수 뭐요?

“마물이라도 금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랑 그냥 괴물 같은 것들이랑은 사이가 안 좋다. 아무튼 S급들은 못 봤다는 거지? 트롤이라든가, 오우거라든가 언데드 종이라든가.”

금수 새끼들이라니! 하지만 듣고 보니 정말로 그렇긴 했다.

거기서 마주쳤던 친근한 태도의 마수들은 전부 동물 형태와 유사한 종들이었다. 포유류든 파충류든 간에.

우릴 무시무시하게 추격했던 듀라한으로 말하자면 사람 기사 모습의 마물이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온 첫날에…….”

성화가 꺼진 틈을 타 들어왔던 스펙터 이야기를 꺼내려 머뭇대자 그가 말을 잘랐다.

“그래, 그 스펙터. 궁전 연못에서는 페시보트였고.”

페시보트.

아마존 야화 속 사랑의 마물께서 왜 여기 있을까? 진짜 사랑의 마물이었을 줄이야.

“저는 앞으로 어떻게…….”

“나 또한 너 같은 경우는 처음 접하지만, 일단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걸로 결론이 났다. 확실한 갈피가 잡히기 전까지는 너도 섣불리 마물들과 접촉하면 안 돼. 네 가출 친구들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네게서 정확히 뭘 원하는 건지, 원하는 게 동일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친절하리만치 상세한 답변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그대로 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조금이나마 내가 마녀일 가능성을 고려 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은 여태껏 그런 괴악한 능력을 숨긴 채 내 친정과 짜고 그 온갖 습격들을 꾸민 게 아니냐는 의혹이라든가…….

아니면 나를 무슨 비밀 병기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는 거 아닐까 했거늘.

어쨌든 일리 있는 지론이긴 했다.

내가 아직 모든 마물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니 전부 내게 친화적일 거다 단정 짓기도 섣부르고, 무엇보다 나 또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친화력이었다.

원작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현상이었기에 더더욱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라는 점과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내 연례행사 증세도 뭔가 연관이 있을까?

제기랄, 왜 점점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지? 단순한 서바이벌에서 자꾸만 추가 미션이 붙는 느낌이야.

“친정에 알리고 싶은가?”

불쑥 울린 뜻밖의 질문에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제 친정이요?”

“가족 중 누구라도 말이야. 서리숲에서 있었던 일, 알리고 싶은 사람 있어?”

나를 시험하는 거냐? 오히려 내가 알리려 한다면 막아야 정상 아닌가.

내 친정 식구들이 무슨 일개 범부들도 아니고, 이런 비장의 카드를 무턱대고 넘겼다가 무슨 결과를 빚을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물론 그런 문제를 논외로 친다 해도 알리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요.”

“일말의 주저도 없는 대답이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투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무어라 더 캐물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스케는 의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좋아. 그럼 한동안 우리끼리의 비밀이 되겠군.”

“저어, 당신 동료분들께선…….”

“남의 부인 비밀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건 기둥서방이나 하는 짓이지.”

“…….”

“의외로 조신한 녀석들이라 입은 무겁다. 걱정할 것 없어.”

그러고는 내 손을 다시 움켜쥐는 손아귀에 힘이 바짝 실렸다. 갑자기 속이 저릿해 왔다.

아니, 왜 자꾸 이런 괴상한 소릴 떠드는 거야. 꼭 안심시켜 주려는 것처럼 들리잖아. 진짜 안심해 버리고 싶을 정도인걸.

“하지만 저 때문에 용이…….”

“서리용은 누가 억지로 깨운다고 해서 깨어나지 않아. 민가에 접근하는 성향도 아니고, 이곳 치안은 원래 항상 개판이었으니 변하는 건 별로 없지.”

억지로 깨운다고 깨는 타입이 아니라 해도 나 때문에 깨어난 건 확실한데. 그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면 원작에서도 깨어났을 거 아니야.

씨이, 왜 갑자기 이렇게 안 어울리게 구는 거지. 역시 아까 원샷한 코코아의 부작용인가.

“진짜예요?”

“……진짜.”

“진짜 제가 속인 거 아니라고 믿어주시는 거예요?”

“뭘 속여……?”

“그게에, 실은 당신이 오해할까 봐 엄청 걱정했거든요. 제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정말 기뻐요. 저 찾으러 와주신 것도요.”

의혹 어린 속내를 감추며 방긋 웃자 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또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영 만족스럽지가 않은 건가? 하여간 깐깐한 새끼. 또 반성문 써주랴?

“다시는 가출 안 할게요.”

주먹을 불끈 쥐며 굳은 의지를 표하자마자 즉시 심드렁한 대꾸가 들려왔다.

“가출이 아니라 납치 아니었나.”

“나, 납치도 안 당할게요.”

“포포리나 비만 도마뱀이 와서 놀러 가자고 구슬리면 냉큼 따라갈 것 같은데.”

내가 애냐? 게다가 비만 도마뱀이라니 좀 너무하다.

우리 용 새끼가 얼마나 잘 빠졌는데! 좀 포악하긴 했어도 나름 착하단 말이야. 아직 어린놈이니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할 거고…….

“그럼 당신이랑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건 나쁘지 않군.”

응? 이봐, 그렇게 진지하게 머리 끄덕거리지 마!

난 그냥 농담한 거라고! 당연히 면박 들을 줄 알고 한 농담이란 말이야!

네가 거기 가서 걔들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설마 아직도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당분간 접촉은 지양해야 한다. 행여나 남들 눈에 띄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네, 네.”

냉큼 고개를 주억거리자 야박한 남편 놈은 왠지 의심스럽다는 눈빛이 되었으나 별말을 하진 않았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햇볕에 물든 뜰을 좀 더 걸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누구 취향인지 뜰이 참 야생의 숲 같다.

또 침묵이 이어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되는 대로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었다.

“정원이 참 멋져요.”

“의외의 감상이네.”

“남부랑은 또 다른 느낌이지만 특유의 거친 멋이 잘 살아 있는걸요.”

“그래? 남부식 정원은 어떤데?”

빈정대는 건가 싶었으나 다행히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음, 일단 나무보다는 꽃이 더 많고, 특히 장미꽃이 제일 많아요. 그리고 새장이랑 분수대도 꼭 있어요. 특히 분수대는 화려할수록 자랑거리거든요. 어떤 데는 계단식 폭포처럼 만들기도 해요. 새장도 화려하게 꾸며서 희귀한 수입종 새들을 들여놓죠.”

“정원이 아니라 유원지 같군.”

“네, 그래도 구경하기 좋긴 해요. 잘 만들면 그것대로 멋지거든요. 물론 여기도 여기 나름대로 멋지고요. 꼭 숲 같잖아요.”

“숲이야 널린 게 숲이지.”

사치의 극치를 달린다고 한 마디 비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이하게 반응하는 이스케였다.

거참 오늘따라 독특하시군. 매일 오늘만 같으면 참 좋을 것 같다.

휴, 다중인격 같은 놈.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뜰을 갈아엎으며 유리 온실 시공에 바쁜 인부들의 풍경을 접하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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