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36)

Chapter 3 인형의 춤

오메르타 가문의 주치의, 세르게이 씨의 말에 따르면 내가 열병으로 열흘을 꼬박 앓아누웠단다.

내가 무려 열흘을 그렇게 흘려보냈다니 말 그대로 기겁했다.

길어봤자 사나흘쯤 된 줄 알았는데!

“열은 떨어졌으나 무리는 절대 금물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속히 회복하시려면 잘 드시는 것이 최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입맛이 없으셔도 드셔야 합니다. 가벼운 산책도 틈틈이 하시고요.”

얼른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이긴 했기에 나는 부질없이 그의 당부에 고분고분히 따랐다.

엘레니아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통에 안 따르고 배길 도리도 없었지만.

그나마도 속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프나 포리지 등이라 망정이었다.

아침부터 고깃국물에 비스킷을 찍어 먹는 것이 일상인 북부인들 눈에는 전채요리도 못 될 테지만.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십니까?”

“……아직,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엘레니아와 나 사이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저 패턴의 문답이 오갔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긴 했으나 조만간 뭐든 대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엘레니아를 포함해 누구 하나 나의 가출 사건의 진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아버님, 그러니까 공작조차 아들로부터 아무 사실도 전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의 며느리가 가출 소동을 벌였으니 못마땅할 법했으나 아버님은 무슨 꿍꿍인지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직 환자라고 생각해서 유예 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부인, 로마냐에도 용이 있어요?”

“남부에는 그런 거 없다고 그랬는데.”

“왜애 없대요?”

내가 뜰을 산책하는 동안 아리엔 공주와 레아가 나비처럼 주변을 맴돌며 재잘거리고 꽃을 꺾었다.

저 둘이 내 병문안을 와주는 건 고마웠으나 나의 진실에 대해 왕실도 모르고 있는 듯하여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그날 현장에서 모든 걸 목도한 아이반 경은 무슨 생각으로 제 누이동생을 내게 보낸 걸까?

한동안 꺼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휴, 다들 어쩌고 지내고 있으려나. 포포랑 그리핀은…….

아냐, 생각하지 말자. 생각해 봤자 소용없잖아. 그런 티 내봤자 좋을 것도 없고.

“부인, 화환 만드실 줄 알아요?”

날씨가 무척 좋았다.

에렌딜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화창했다.

루실을 비롯한 하녀들이 크림빛 양산을 들고 따르는 가운데 나는 모처럼의 햇볕을 만끽하며 두 꼬마와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화환을 만들었다.

“마님, 아가씨께서 다과상을 차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아리엔과 레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하긴 좋아할 때긴 하지.

나도 옛날에는 좋아했…… 휴, 어쩔 수 없군.

이 화환은 어쩌지? 엘레니아한테 줄까? 이런 걸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며칠간 나를 잘 챙겨줬으니 고마움의 뜻에서…….

그렇게 시누이에게 줄 뇌물 아닌 뇌물을 들고 두 꼬마 아가씨들과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달콤한 향기가 바람결을 타고 벌써부터 코를 찔러온다.

상큼한 레몬 크림 케이크와 딸기 무스와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쿠키와 타르트와 푸딩이…….

“어, 오빠 왜애 여기 있어?”

앞장서서 깡충깡충 걷던 레아가 멀뚱멀뚱하게 물었다.

나는 하마터면 애써 만든 파란 꽃 화환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데도 전혀 대비가 안 된 느낌이었다.

“루비.”

차분히 내게 시선을 돌리는 엘레니아의 맞은편에는 왠지 매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의 남편 놈이 서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반 경까지 함께였다.

대체 너흰 왜 맨날 소리 소문 없이 튀어나오니?

“나도 반갑다, 누이야. 안녕하십니까 저하. 오랜만입니다, 부인. 쾌차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이반 경은 언제나처럼 경쾌한 한 떨기 꽃 같은 모습이었다.

살갑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가 굉장히 진실하게 느껴진다.

따라 미소를 지으려는데 오늘따라 안면 근육이 유독 뻣뻣하게 느껴졌다.

아이고, 아무래도 그새 감이 떨어진 것 같아 감이……!

“시, 심려를 끼쳐 드렸…….”

애써 방긋 대꾸하려는데 순간 너무 긴장한 탓인지 뭔지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휘청하는 느낌에 멋없게 비틀거리는데 육중한 팔뚝이 다가와 나를 황급히 붙들었다.

“괜찮아?”

나는 황급히 떨어진 감을 제자리에 복귀시키려 애썼다.

이스케는 양팔로 내 몸을 받쳐 든 채 기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또 그런 이상한 표정 하고 있어? 헷갈리게…….

“네, 고마워요.”

“안색이 나쁜 것 같은데 세르게이를…….”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너무 기뻐서 그런 거예요.”

아, 나의 메소드 연기력이여. 아직 완전히 녹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우리의 한결같은 남편 놈은 곧장 눈을 의심스럽게 치떴다.

“뭐?”

“그게, 저 아예 안 보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저 때문에 다들 그렇게 고생하셔서…….”

네 녀석들이 자경대 길드를 매수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남편아, 이번엔 대체 무슨 꿍꿍이니? 날 어쩔 작정이야?

“뭐 저 새끼야 고생해도 싸지요. 안 그렇습니까 공녀?”

“그렇지요.”

퍽 빠르게 대답한 엘레니아가 묘한 눈길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눈빛이다.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대에게 화환을 바칠 테니 부디…….

“케이크 먹고 싶어요.”

레아가 조르는 투로 칭얼거렸다. 아리엔으로 말하자면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얌전히 서 있었다.

이스케만 보면 긴장하는 건 여전했다.

엘레니아한테는 좀 나은 것 같은데, 사촌 오빠가 영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이 녀석이 좀 그렇긴 하지.

“레아, 넌 남의 집에서 예의를 좀 갖춰라. 하여간 말괄량이가 따로 없…….”

“오빠는 예의 같은 거 밥 말아 먹었으면서어.”

“너, 너 말이야…….”

뒤쪽을 한번 힐긋 돌아본 이스케가 불쑥 팔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참으로 익숙한 기분이 밀려왔다.

이 자식아, 넌 내가 그냥 병아리로 보이는 거지?

고 못돼먹은 용 녀석도 그렇고 이것들이 하나같이 나를 그냥 번쩍번쩍…….

“네 루비는 잘 보관하고 있다.”

응?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에 나는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놈의 낯짝을 멍하게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황급히 어설프게 웃었다.

아아, 그래. 그 대왕 보석 말하는 거구나. 용 녀석이 마지막에 나한테 준…….

“초코 푸딩이다아!”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들 다과상에 둘러앉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화려한 5단 디저트 트레이들이 맛깔스럽게 진열된 테이블에 사이좋게 모여 앉아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여기에 괴수 같은 팔라딘 두 놈이 껴 있는 모습이라니 참 표현하기도 뭣하다.

“오빠도 먹으려고?”

“시끄러워.”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엘레니아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습다는 듯 살포시 가늘어진 눈매가 예사롭지가 않다.

“저어, 엘렌…….”

“예?”

“이거 드리려고요.”

지금 아니면 줄 틈도 없을 것 같고 해서 무작정 쥐고 있던 화환을 들이밀었다.

내가 대체 뭐 하는 건지 참. 아무리 봐도 아부하는 것 같잖아! 그것도 화환으로 아부라니!

아리따운 시누이께선 자못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으나 다행히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좀 머뭇거리는 기색이긴 했으나 순순히 화환을 받아줬다 이 얘기다.

머쓱하군. 아무래도 조만간 좀 괜찮은 진짜 선물을 살 기회를 노려봐야겠다.

내가 하는 짓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편 놈이 득달같이 이죽거렸다.

“잘 어울릴 것 같네. 머리에 써 봐라.”

“……시끄러워.”

“선물을 받았으면 사용하는 것이 예의지.”

“오빠가 써보는 건 어때. 나보다는 오빠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것들이? 물론 엘레니아는 절대 저런 걸 머리에 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이스케 머리에 씌우면 매우 볼만하긴 하겠다.

“받은 건 너니까 네가 써야지.”

“오빠가 탐내는 것 같아서 하는 제안인데. 루비가 나한테만 줘서 분한 거 아니야?”

이 대화의 흐름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나로선 도저히 알지 못할 희한한 이유로, 이스케는 웬일로 누이의 이죽거림에 연이은 이죽거림으로 받아치는 대신 앞에 놓인 차를 원샷할 뿐이었다.

그러더니만 입맛에 영 맞지 않는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무시무시하게 오만상을 찌푸렸다.

살 떨리는군. 그러게 왜 확인도 안 하고 들이키니.

이 좀생이는 역시 내가 제대로 팬심을 발휘하지 않는 거라고 판단하고 불쾌해진 모양이었다.

지 거 만들어줘 봤자 받아주지도 않는 주제에 참 탐욕스러운 놈이다.

“다음부터는 당신 것도 만들게요. 오늘 보게 될 줄 몰랐어요. 게다가 당신은 꽃을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

“……은 스르흔드.”

“네?”

“……쿨럭! 싫어하는 거 아니라고.”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급격하게 오른 혈당에 의해 머리가 잠깐 맛이 간 모양이다.

좋아, 이 핑계로 다음번엔 반드시 저놈 머리통에 아기자기한 화환을 씌워주고 말리라.

“흐음, 역시 공녀께서 고르신 차는 풍미가 다르군요.”

“과찬이십니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애들 먹는 코코아를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잘도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아이반 경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엘레니아는 퍽 기품 있게 대꾸했다.

이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고 있는 건 나뿐인 것 같군.

“이거 용 닮았어요.”

“진짜네. 근데 진짜 용은 뿔이 없대.”

아무것도 모르는 레아와 아리엔이 쿠키를 들여다보며 조잘대는 소리가 참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닮긴 닮았구나. 내가 깨워버린 그 녀석하고…….

간신히 다디단 입속을 갈무리한 듯한 이스케가 다음으로 기행을 벌인 것은 그때였다.

“어서 들어.”

나는 내 앞으로 밀어진 대왕 푸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색색의 설탕 과자들로 예쁘게 장식된 크림이 얹힌 초코 푸딩.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껴보라는 심보인가?

쿠키를 내버려 두고 푸딩 접시들 쪽으로 팔을 뻗던 레아가 어 하고 입을 약간 벌린 것은 그때였다.

아까부터 이 화려한 초코 푸딩을 노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도 쪼코…….”

“레아가 먹을래? 난 다른 푸딩 먹어도 돼.”

“그래도 ㄷ…….”

기다렸다는 듯 예쁜 눈망울을 초롱거리던 레아가 어째서인지 불쑥 말끝을 흐리며 눈을 굴렸다.

음? 왜 그러…….

“난 너한테 줬는데.”

잠시 침묵이 좀 흘렀다.

멍하게 눈을 돌리는 내 시야에, 이윽고 지옥의 화신과 같은 암흑의 기운을 풀풀 풍겨대고 있는 남편 놈이 들어왔다.

“야, 이 자식아, 너 왜 내 여동생한테 눈치 주냐? 왜 남의 동생 기를 죽이고 그래?”

아이반 경이 발끈하여 대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역시 아까 원샷한 코코아가 잘못된 걸까?

“네 이웃의 것을 탐하는 건 7대 죄악에 속한다.”

“뭐래, 미친놈이 갑자기 신실한 척 염병이야? 그깟 푸딩이 뭐라고, 나 원 아니꼽고 치사해서, 레아, 그냥 다른 거 먹어!”

“응. 다른 거 먹어도 괜찮아.”

의외로 순순히 머리를 끄덕인 레아가 딸기 푸딩 접시를 끌어당겼다.

넋 빠진 얼굴로 제 사촌오빠를 응시하던 아리엔 역시 황급히 제 푸딩에 코를 박는 시늉을 했다.

아니,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추태람. 난 이거 안 먹어도 된다고!

“어서 드십시오.”

나 못지않게 어처구니를 상실한 눈빛이 된 엘레니아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따라서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부질없이 대왕 초코 푸딩을 푹 떠서 입안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하, 맛있긴 진짜 맛있구나. 습관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가 없지만, 뭔가가 이렇게 맛있다고 느끼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전하께선 별말씀 없으셔?”

“딱히. 신전 측에선 붙잡아서 이번 검투 경기 종목에 올리고 싶은 눈치다만.”

“그게 가능해?”

“아직 어린 용이라서 말입니다, 공녀. 상대해 볼 법은 하지만 일단은 방생하고 지켜보자는 것이 보편적인 의견입니다.”

두 팔라딘과 엘레니아가 나누는 대화에 나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고 성격 파탄자 용 녀석 아직 어린 녀석이었구나.

그런데 검투 경기 종목이라니 십수 년 만에 나타난 멸종 위기종한테 무슨 수작이야!

“하도 잡아대서 씨가 말랐으니 자각이 있다면 곱게 내버려 두겠지.”

빈정대듯 중얼거린 이스케가 문득 내 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노려보는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니아는 자못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쪽도 타당하긴 한데 용이 활동할수록 마물들도 증가한다면서.”

“꼭 그렇지도 않다. 용이 죽이는 수까지 따지면 비슷한 수준일걸.”

“난 그것보다 쓸데없이 패기 넘치는 애송이들이 드래곤 슬레이어 되겠답시고 찾아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막말로 그것들 시체 찾으러 우리만 고생할 거 아냐?”

일리가 있긴 하다만, 네놈들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뿔난 용 앞에서 잘도 나랑 실랑이한 것들이 누군데.

“부인, 용 좋아하세요?”

“……아하하하, 글쎄요, 저하께서는요?”

“용 귀엽잖아요.”

“맞아요, 귀여워요. 불쌍한데 귀여워.”

아리엔과 레아는 용이 저 쿠키처럼 생겼다고 상상하는 것 같다.

혹은 흔히 이 세계의 동화책에서 나오는 머리 좋은 척하는데 늘 당하기만 하는 어설픈 마수라든가.

“너 그런데 그거 끝까지 안 쓸 거냐?”

“왜, 오빠가 써보고 싶어?”

“만약 이스 네놈이 머리에 화환을 쓰는 날이 온다면 내 신전 정문에서 네 발로 엎드려서 개처럼 짖어주지.”

기괴하리만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초콜릿 푸딩을 바닥까지 다 비웠다.

안 하던 짓을 저지르고 나면 향후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대비가 좀 될 것 같은 심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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