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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냐의 황금빛 햇볕이 산 미드레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물을 긷는 성모의 상이 세워진 분수대 주변에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흰 비둘기들이 여느 때처럼 모여들어 오후의 일광욕을 즐기는 중이다.
어찌나 태평하고 대담한 생물들인지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앉아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이 오만한 귀족 양반조차 벌벌 떨게 만드는 검은 수단 자락의 성직자라 해도.
공평을 기하자면 이쪽 역시 비둘기 떼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젊디젊은 추기경의 너른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는 새는 한낱 비둘기 따위가 아니라 우아한 금빛 꽁지깃을 가진 전령새였다.
바다 건너 북부의 수도에서 교황령 로마냐까지 신속하게 날아와 자랑스레 제 임무를 끝마쳤다.
상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서신 읽기를 끝마친 남자는 아까부터 꿈쩍도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햇볕에 물들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흑발, 보기 좋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빠질 정도로 깊은 감청색 눈동자, 대리석 조각 같은 선이 악마와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거의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성상이 따로 없었다.
“퍽 걱정되시나 봅니다.”
급기야 근처에 서서 비둘기들에게 모이 주는 시늉을 하고 있던 심복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우아한 미남자인 상관과는 대조적으로 북슬북슬 거친 붉은 머리와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몹시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비둘기들이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모이를 얻어먹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걱정이라.”
“뭐 무사히 귀가하셨다니 됐지요. 매제분께서 나흘 내내 에렌딜을 이 잡듯 뒤지면서 찾아냈다는데, 의외의 정성 아닙니까. 한시름 더셔도 될 법한데.”
“…….”
“바다 건너 나리들이 뭐라고 적었는지 몰라도. 어차피 완전히 신용하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치들.”
감히 상관보다 먼저 서신을 들여다봤다는 걸 뻔히 내색하고서는 곧장 저런 뻔뻔한 사족이라니.
그러나 체시아레는 비둘기 먹이 주기에 여념이 없는 피에트로를 질책하지 않았다.
건방지다 내치려 했다면 진작에 내쳤을 것이었다.
남부 어디에서도 피에트로 만한 충복을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괴물 같은 힘과 사탄조차 울고 갈 잔혹함, 그림자 같은 잠입능력과 상관을 향한 맹목적인 충심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녀석을 또 어디서 찾으랴.
“확실히 의외이긴 하군.”
“그리 동요하시는 걸 보니 바다 건너 나리들도 어지간히 의외였나 봅니다. 예하께선 누이분의 방종이 의외이신 겁니까, 매제분의 태도가 의외이신 겁니까?”
“대체 네놈이 언제부터 그리 비아냥을 일삼는 놈이었는지 그것이 의외다.”
서늘하게 벤 경고의 기미에도 피에트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까지 하며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 고분고분한 아가씨께서 그런 소동을 벌이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 참, 누이분 나이 대의 영양이라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라지만요. 제법 신선하다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목석같다 알려진 매제분께서도.”
매제라. 손에 들린 서신을 와락 구기는 체시아레의 입술이 엷게 비틀렸다.
그에게 있어 매제란 종이 냅킨처럼 쓰다 버리는 존재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뻣뻣하게 모가지를 세우고 누이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 주장하던 오만한 놈들이 종내 애써 굴욕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러가는 꼴을 보는 건 소소한 즐거움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건은 조금 달랐다. 루드베키아를 브리타냐로 보낸 건 온전한 그의 의사가 아니었다.
부친인 교황의 의사가 결정적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치솟는데 얼굴도 본 적 없는 새 매제 놈의 의사 또한 섞여들었다.
제 누이동생을 대신해 교황의 자식과 결혼하겠다 나선 북부의 성기사. 기사라는 점부터 마음에 안 들었으나, 어떤 놈인지 조사를 끝마쳤을 때만 해도 꽤 마음을 놓았었다.
그런 놈이라면 이 혼사가 기간제 광대극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이의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골을 들쑤시는 이 거슬리는 감각은 무엇인가.
비단 얌전히 지내라 당부했던 루드베키아가 그의 지시를 어기고 그런 소동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매제 놈이 벌써부터 거슬렸다. 배알이 뒤틀릴 정도로 거슬렸다.
북부에서 가장 푸른 피를 가진 존귀한 기사라는 놈을 잡아다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루드베키아의 작은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데려갔을 놈의 손을.
“저였다면 두 번 다시 꿈도 못 꾸게 다리를 분질렀을 테지만, 귀하신 귀족 도련님께선 어떠실지 모르지요. 예하께서 우려하시는 게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체시아레는 그만 서신을 움켜쥔 손을 내리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저놈이 언제부터 저렇게 속 긁는 소리만 골라 해대는 놈이었던가.
루드베키아는 항상 그의 손안에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바다 건너 북부까지 멀어졌다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리라 믿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느낌이 이는 원인을 알 길이 없었다.
매우 오랜만이었다, 이런 불쾌한 기분은. 3년 전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정확히 봤다. 당장 쫓아가 듬직한 오라비의 의무를 다하고 싶다만 그럴 수 없으니, 네가 나 대신 가줬으면 하는데.”
이거야말로 뜻밖이라는 듯, 자루 속에서 모이를 한 주먹 꺼내던 피에트로가 멈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부리부리한 검은 눈을 짐짓 크게 치뜨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이 미천한 놈이 말입니까? 이런, 예하. 아무리 저라 해도 북부 최고 팔라딘 도련님께 대드는 건 심히 무리입니다. 게다가 거긴 더럽게 춥단 말입니다. 얼어 뒈지겠는데 자느라 배곯을 대로 곯은 서리용이 덤벼들기라도 하면 이 하찮은 민간인은 어쩝니까?”
“말썽꾸러기 누이에게 오라비로서의 조언을 대신 전해줄 수 있는 믿음직한 놈이 너 말고 누가 있나. 이래 봬도 꽤 걱정스러워서 말이지. 네놈 말대로 눈 뒤집힌 매제께서 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누이한테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알지?”
피에트로는 더는 눈치 없는 척 의뭉스레 굴지 않았다.
파르스름하게 얼어붙은 상관의 시선이 말하는 진짜 속뜻을 빠르게 간파한 탓이었다.
가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라고. 감시하고 있으라고. 허튼짓 못 하도록, 남편의 관심을 끄는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라고.
“제 선에서 멋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언제는 멋대로 안 했나?”
“가끔 보면 예하께선 참으로 악취미적이십니다. 그리 애지중지하실 땐 언제고.”
“악취미로 따지면 네놈만 할까. 여튼 신전에서 기거하면 밤이슬 맞고 자다 마수의 야식이 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미리 손을 써두마.”
“호오라, 제게 수사 흉내가 어울린다 보시나 봅니다.”
“고작 흉내가 불만스럽다면 진짜 수사로 만들어주랴.”
“성직 매매는 불법인 거 아십니까? 그전에 신성모독이라고요, 예하.”
“자애로운 주님께서 우릴 용서하실 것이다. 잡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서 채비나 하라고.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잘 주시해라.”
기도문을 읊는 듯한 평온한 어조로 지시한 체시아레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짙푸른 눈동자가 푸른 화염처럼 맹렬하게 번득였다.
“내가 가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