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36)

* * *

짜증스럽게 퍼붓던 얼어붙은 비와 눈보라가 어느덧 멎고 며칠째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기현상이었다.

눈이 내리기엔 너무 이르고 햇볕이 보이기엔 너무 늦었다.

전자 쪽이야 서리용의 기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쳐도 에렌딜에서 햇살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시기는 한여름뿐이었다.

“다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시국이나 이럴 때일수록 제군들은 더욱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한동안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으나 용 또한 다른 마물들과 마찬가지, 근 20년 전까지만 해도 검투 경기의 종목에 올랐던 대상일 뿐이다. 비록 서리용이 여타 용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종이라 한들 무적은 아니며, 미숙한 어린 개체가 분명한 만큼 쓸데없이 겁을 먹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일 없으리라 믿겠다. 건국 이래 우리 롱기누스 기사단은 무수한 마수들과 싸우며 북부의 평화와 발전에…….”

소싯적 동료들과 함께 성체 화염용 두 마리를 때려잡았다는 전설의 보유자인 기사단장의 설교를 끝으로 회의는 막을 내렸다.

대충 용 중에서도 가장 골 때리는 녀석이 출몰했다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는 요의 설교였다.

해산령이 떨어지자마자 졸음을 참는 얼굴을 하고 있던 팔라딘들도 하나둘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식으로 연무장이 휑하니 빌 때까지 오직 여섯 명의 팔라딘만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날 서리숲의 경계구역 안쪽에 들어갔던 소수정예들이다.

아무리 건실한 소수정예라 해도 깐깐한 단장 몰래 뒤에서 사고를 치는 건 삭막한 일상의 소소한 낙이었다.

그것이 평소 자기들만 못하다 여겨온 다른 동료들이 감조차 못 잡고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나아가 신전과 왕실에까지 기밀로 부쳐야 할 건이라면 더더욱 짜릿한 법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그러한 낙으로 삼기에는 차원이 약간 달랐다.

그들 또한 그날 자신들이 대체 무엇을 본 것인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으나 자칫 국제적 분쟁으로 번질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완전히 멸종한 건지 의견이 분분했던 서리용의 출몰은 놀랍기는 해도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북부인이라면 늘 염두에 두고 있던 가능성이었으니까.

용은 마물이다. 다른 마물들과 마찬가지로 호시탐탐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탄의 하수, 때문에 신성에 의해 죽어 없어질 수 있는 존재였다.

야생 짐승이라면 모를까 마물이 인간과 어울리거나 소통했다는 기록은 어느 국가에도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평범한 인물도 아닌 신성의 최고봉, 교황의 여식이 마굴 천지인 서리숲의 경계구역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다.

게다가 분명 용을 비롯한 마물들과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누구한테 말해도 믿어줄는지 의심스럽다.

이쯤에서 어지간한 이들은 말 많고 탈 많은 보르히아 가문 측에서 뭔가 기이한 신술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상상할 것이었다.

어쨌든 사태를 직접 목도한 소수정예 팔라딘들은 일단 판단을 보류 중이었다.

‘네가 말해라.’

‘아니, 네가 말해라.’

암암리에 흐르는 침묵 속에서 적어도 단장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과 쫄리는 놈 혼자 죽으라는 의견이 분분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경대 놈들과 거래까지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들통난다면 경을 칠 일인 고로,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부는 게 낫지 않느냐는 놈과 자살은 혼자 하라는 놈으로 갈리는 판국이다.

솔직히 단장의 불호령이야 좀 많이 겁나기는 해도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는 있을 터였다.

모든 주저와 망설임의 원흉은 다름 아닌 이 사태의 주도자에게 있었다.

오메르타 소공작은 뒤끝이 더러웠다. 더럽다 못해 질기기까지 했다.

만약 이중 누군가가 양심을 못 이기고 그날 경계구역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단장에게 술술 분다면 그날로 대가 끊기는 참사쯤은 각오해야 할 터였다. 혹은 그 밀렵꾼 여인과 같은…….

믿음직한 동료들을 이러한 딜레마에 빠뜨려 놓은 주제에 정작 이스케 본인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낯짝으로 검 손잡이를 손질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마치 어느 놈이든 혀를 나불대고 싶으면 나불대 보라고 협박하는 듯한 연출이다.

곧장 자리를 뜨는 대신 의미심장한 분위기의 소수정예들을 넌지시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쑥 이스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바람에 다들 화들짝 마른침을 삼켰다.

“공자비가 무사해서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한데 왜 그리 고민에 잠긴 얼굴인가? 기뻐 날뛰지는 못할망정, 그 야단을 떨어댄 주제에 말이네.”

“……바론스 경, 혹 안주인께서 가출하신 적이 있습니까?”

“신혼 때 두 번인가, 그리고 첫 아들놈을 가졌을 때 한 번 있었네만. 가출이라 해봤자 친정으로 간 거지만 아무튼 자네가 고민하는 게 그거였군그래? 왜, 부인이 여전히 자네 꼴도 보기 싫다고 하는가?”

단장께서 뭔가 낌새를 눈치챈 것이 아닐까, 혹은 이스케 저 예측 불가한 놈이 그냥 폭탄 던지듯 불어버리는 거 아닐까 내심 초조하게 지켜보던 팔라딘들은 일제히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저 철통같은 단장과 저 안하무인 싸가지의 부부 상담이라니 다들 날씨만큼이나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롱기누스 기사단의 단장은 이스케를 꽤 편애하는 편이었다.

실력 출중한 수하를 아끼는 거야 인간적이라 쳐도 때론 좀 과할 때가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차라리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웬일로 반성을 다 하는 꼴을 보는군. 내일은 해가 서쪽에 뜰 일이야.”

옛 생각이 떠오른다는 듯 훈훈한 표정으로 농을 치는 단장의 행위에 이스케는 매우 삭막한 눈빛으로 반응했다.

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집에서도 그렇게 부인한테 눈깔 부라리나?”

“……어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남의 마음 풀어줄 고민도 다 하고 기가 막힌 발전일세. 뭐 아직 한창 신혼 아닌가. 특히 자네 부인 나이 대의 여인이라면 유리 그릇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법이지. 그래서 말인데…….”

탁, 하고 단장의 우람한 손아귀가 이스케의 우람한 어깨에 얹혔다.

이스케는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일단 답은 하나뿐이네. 기분이 풀릴 때까지 무조건 잘해주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긴 자네가 원체 숙맥이긴 하지. 별거 없네, 그냥 꾸준히 반성하고 있다는 걸 보이면 되네. 허튼소리는 삼가고 무슨 말을 하든 절대 흘려넘기지 말고 선물도 이것저것 주고 사교 모임에도 자주 동반 참석하게. 안 그래도 남부의 사교 문화에 익숙한 분 아닌가, 이곳에 친지도 없는데 지루해서 미쳐버릴 지경일 걸세.”

역시 중년 유부남의 연륜이라,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이스케는 잠깐 망설였다가 슬쩍 다시 질문했다.

“선물이라 하면 이를테면 어떤…….”

“거참, 아무리 숙맥이라 해도 누이동생까지 있는 친구가 왜 이러나?”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지 않습니까.”

“자네 부인 취향을 내가 무슨 수로 아는가? 자네가 알아서 죽을 쑤든 해야지.”

단장은 뿌듯함을 넘어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꼬장꼬장한 골칫덩이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다 해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 훈훈한 낯빛이다.

“큼, 단장님?”

“음? 경은 또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경도 연애 고민인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언제든 상담해도 좋네.”

영 평소답지 않은 단장의 관대하고도 자상한 태도에 기껏 용기를 발휘한 말총머리의 팔라딘은 그만 어설프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모처럼 관대한 기분에 사로잡힌 단장이 훈훈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자리를 뜬 뒤, 연무장 안에선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저기 말인데.”

“…….”

“이봐, 난 적어도 단장님께는 알려야 한다고 본다.”

물빛 말총머리의 팔라딘, 카뮤가 헛기침을 하듯 내뱉은 발언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변함없는 복잡미묘한 낯짝으로 이 사태의 주도자만 가만히 살필 뿐이다.

연이은 침묵 끝에 카뮤는 마침내 폭발했다.

“너희 진짜 다 같이 맛이 갔냐?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한 건 나뿐인 거냐고? 만약 우리가 자경대 놈들이랑 거래까지 한 거 들통나면 그땐 진짜…….”

뭔 생각에 빠져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낯빛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이스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카뮤를 바라보았다.

신성 그 자체인 신전 연무장이거늘 홀로 과도 흥분기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기묘하게 너울거리는 시선에 카뮤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가서 떠들어, 그럼.”

“…….”

“뭐 해? 가서 누구든 붙들고 떠들어 보라니까.”

어찌나 팽팽하고 싸늘한 목소리였는지 한껏 고조되었던 험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가라앉았다.

카뮤는 이제 분노를 넘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협박하는 거냐? 네가 우리를? 보르히아 여자 때문에? 웃음도 안 나온다, 진짜.”

“카뮤-”

“너넨 이 상황이 같잖지도 않냐? 이딴 식으로 감추면 결국 막판에 책임을 지게 되는 건 우리야. 빌어먹을 X도 몰랐던 우리가 전부 떠안게 되는 거라고, 남부 돼지 놈들이 아니라!”

“옳은 말이다! 이 싸가지 없는 놈아, 할 게 없어서 전우를 상대로 협박질이냐? 이런 소심한 새끼 입장에선 쫄리는 게 당연하잖아!”

아이반의 눈물겨운 동료애가 어린 일갈에 소심한 카뮤는 일순 핵심을 잊고 발끈했다.

“누가 누구더러 소심하다는 거냐 밴댕이 소갈딱지 새끼야!”

“이 말 엉덩이 대가리가 편들어줘도 지랄이냐? 야, 이스, 그러지 말고 그냥 이 새끼 쓱싹하고 끝내자. 이 새끼만 사라지면 우리의 비밀은 무덤까지 갈 수 있을 거…….”

“로마냐 쪽은 아무 정보도 없으리라 확신하는 거냐?”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갈라르가 불쑥 나서서 던진 질문에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저 녀석이 요즘 드디어 옹알이가 터진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이스케가 멀뚱멀뚱하게 대꾸했다.

“그래.”

“이유는?”

“…….”

“네가 언제부터 감만 믿고 이런 중대사를 덮고 넘어가는 놈이었냐.”

“자기도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말했다. 신성하신 장인어른이 뭔가 알았다면 그렇게 대책 없이 보내놓진 않았겠지.”

딸이 가진 신통한 재주로 북부를 엿 먹일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이리 허무하게 발각될 일이 없었으리란 말이었다.

그 점에는 다들 동의했다.

이렇게 대책 없이 들통난 이상 이쪽에 칼자루를 쥐여준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처음부터 뭔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모든 게 지나칠 정도로 허술했다.

“일리가 있다만…….”

“아니면 순전히 내 부인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말하고 싶은가?”

이스케의 눈동자는 태풍의 눈 같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갈라르는 검붉은 눈썹을 약간 꿈틀거렸다.

“그런 분으로 보이진 않던데. 당장 여러 사람이 알수록 좋을 거 없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한다만,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

앞으로. 앞으로 어쩔 작정인가.

이스케는 그 소리가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뭘 아는 놈들이든 모르는 놈들이든 이놈이나 저놈이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똑같은 소리를 되뇌고 있다.

나흘에 걸친 수색 끝에 루드베키아를 찾아온 이후부터 다들 그를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작정이냐.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질문을 하는가. 심지어 국왕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서리용이 눈을 뜬 시기가 겹쳐서 아슬아슬했군. 어쨌든 무사히 찾아서 다행이다만, 앞으로 어찌할 작정이냐?’

‘제가 언제 계획하고 사는 놈이었습니까?’

‘애초에 피차 일회용으로 여긴 결혼 아니더냐.’

피차 일회용으로 여기는 결혼을 중매한 장본인 주제에 걱정스러운 체 하는 눈빛이 가소로웠다.

그래서 이스케는 평소보다 더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모르죠, 우리 둘 중 하나가 노예였다면 세기의 로맨스를 찍고 있었을지도.’

‘왜 내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구나. 네 성질머리대로라면 나나 네 아비가 뭐라 하든 지금쯤 진작 그녀를 로마냐행 배에 태워 보냈을 텐데. 뭐가 마음에 걸리는 게냐?’

뭐가 마음에 걸리는가.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건 페아놀 왕이 이런 식으로 자상한 외숙처럼 굴 때마다 짜증이 난다는 사실 뿐이었다.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서 이교도국 노예 출신 무희를 왕비로 들였다고 그런 부분에 통달한 척 으스댈 때도.

‘나흘 내내 왕도를 뒤집어 놨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녀는 교황의 여식입니다.’

‘너의 아내로서 북부 땅을 밟고 있는 이상은 이쪽 관할이지.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단지 어설픈 책임감이라면 놓을 수 있을 때 놓거라. 말리지 않으마. 연민이나 책임감만으로 밀고 갔다간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테니.’

‘…….’

‘이럴 때 보면 엘렌보다는 네가 더 네 어미를 닮은 것 같구나.’

어머니를 닮았다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브리타냐의 왕녀이자 오메르타 가문의 공비.

평생 권력과 동경의 중심에서 떠받들어지며 살면서도 늘 불행해하다가 결국에는 목을 맨 여자.

이른 새벽 후원의 버드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어머니를 제일 먼저 발견한 이는 그였다.

그보다 한발 늦게 달려온 아버지는 주먹이 피범벅이 되도록 버드나무를 내리쳤다.

나무가 그녀를 죽인 장본인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그토록이나 사랑했다 한 주제에. 그렇게 정열적이었다 한 주제에.

누가 둘의 사랑을 방해한 것도 아니고 신파적인 걸림돌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거늘, 그저 저들끼리 만든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결국 아내는 목을 매고 남편은 아내가 목을 매도록 몰아갔다.

어느 쪽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처음에는 어머니를 다시 만나 묻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다.

자살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대가로 구울이 된 어머니를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팔라딘이 되었다.

그런 순진해 빠진 생각은 광포하게 울부짖으며 날뛰는 마물을 하나씩 죽일 때마다 사그라져갔지만.

그의 어머니가 정말로 구울이 되었다 한들 그건 그냥 잡아 죽여야 할 또 다른 마물일 뿐이었다.

그의 검에 무수하게 스러져 내린 마물 중 어머니가 섞여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종국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오는 혼담마다 걷어차고 금욕주의를 자처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남들이 멋대로 지레짐작하듯 어머니의 자결에 의한 충격 탓이 아니었다.

단지 같은 피가 흐른다는 생각 탓이었다.

같은 피. 타고난 재능도, 유독 강렬한 고유 신성도, 광폭한 검기도, 전부 부친과 같은 피를 가졌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좋은 것만 골라 같은 피라 여기는 건 자가당착이다.

유산만 꿀꺽하고 채무는 나 몰라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세상만사가 마물들과 싸우는 일처럼 단순하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런데 이제는 그것조차 그리 단순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아니, 실은 여전히 아주 단순했다. 그냥 진실을 말하면 될 일이었다.

국왕에게, 아버지에게, 기사단장에게, 북부의 핵심 세력가들에게 알린 뒤 그녀를 묶어두면 될 일이다.

국제 정세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패였다.

이런 패를 북부는 놓치지 않을 것이고, 날고 기는 보르히아 가문이라 해도 이번만큼은 협상 테이블을 뒤엎지 못할 것이다.

혹은 그냥 그녀를 배에 태워 돌려보낼 수 있었다.

최소한의 배려로서,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잊기로 하고, 그녀가 가진 정체 모를 재주는 그쪽에서 알아서들 하라고 하고, 두 번 다시 북부에 발 들이지 않는 조건으로 영원히 보내버릴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전처럼 생활하면 될 일이었다.

한데 무엇 때문에 이런 짓들이나 하고 있는가.

버러지 같은 자경대 길드까지 끌어들이고, 동료들을 압박하고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무엇 때문에 떼어놓길 망설이는가.

‘저도 정말 몰랐어요. 제가 이럴 줄은…… 진짜 거짓말 하는 게 아니라…….’

알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거늘.

광분하는 서리용을 한 마디로 진정시킨 주제에 바들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민이나 책임감만으로 밀고 갔다간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테니.’

연민. 책임감. 그깟 게 도대체 다 무엇이라고.

그녀의 날갯죽지에 새겨진 상흔을 본 밤 이후부터 끈질기게 그를 들쑤시던 불편한 감정은 고작 연민이었을까.

그 여리고 말랑한, 조금만 힘을 줘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몸에 새겨진 잔인한 흔적이, 단지 책임감으로 밀어붙이려 했기에 그걸 보고 그리 머리가 식어버렸던 걸까.

마구간에서 채찍을 들고 훌쩍이던 모습이 뇌리를 들쑤셨다.

대체 누가? 언제? 왜?

앙그반 궁전의 연못가에서 그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때려도 좋다던가. 처음에는 단지 파경 구실을 만들려 그를 자극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무언가가 기형적으로 망가져 있다는 걸 느꼈다.

‘전, 당신한테 반하고 말았어요.’

실소조차 안 나오는 말이었다. 그런 공포에 질린 눈을 한 주제에 시종일관 반했다는 소리라니.

대체 무엇에 어떻게 반해야 때려도 좋다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가.

애초에 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뭐라고 딱 집어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보면 볼수록 열여덟의 여인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았다.

철없다거나 대책 없이 해맑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책 없이 무력하면서도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굴 처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 대단한 친정이 버티고 있는 로마냐의 공주라면, 아니, 하다못해 여느 한미한 가문의 여인이라 해도 그렇게 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굴고 있었다.

뭐가 그리 두려운지. 뭘 바라는 건지.

글쎄, 스스로가 뭘 바라는지 그녀 자신조차 모르는 것 같은데 그가 무슨 수로 알까.

제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반했다고 떠들어대는 여자를.

그는 검을 잡은 이래 속수무책으로 정신이 망가진 놈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다양한 방식으로 미쳐버린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는, 이런 종류는 그의 세계에서 낯설디낯선 상대였다.

단순히 그 많은 파혼자 중 미친놈을 한두 명 만났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될 순 없지 않은가.

게다가 루드베키아는 그들과 함께 산 적조차 없었다.

루드베키아의 전 정혼자들은 하나같이 평판 좋고 잘난 놈들이었다.

그래봤자 보르히아의 권세에 꼬리를 내린 놈들이기도 했다.

이스케는 처가 식구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나, 국제적 고자로 전락한 렘브란트의 알폰소가 어지간한 상대에게 꼬리를 내릴 놈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폰소는 남자로서의 최고의 굴욕까지 감수하면서 발렌티노 추기경에게 꼬리를 내렸다.

그 잘난 놈이.

그 잘난 놈들이.

누가 교황의 애지중지하는 여식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발렌티노 추기경의 사랑하는 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제 누이를 그 지경으로 망가뜨린 작자를 발렌티노 추기경이 그냥 내버려 뒀을까.

빌어먹을, 그냥 모르는 척하면 되는 것을.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그딴 성가신 일, 남의 사정 따위 그냥 외면해 버리면 간단한 것을.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끓는 분노의 원천은 무엇인가.

‘분명 그녀에게 아무 소리 말라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리 토라져 뛰쳐나가 버릴 줄 내가 알았겠느냐?’

변명이랍시고 늘어놓는 아버지의 속내를 읽는 데 수정 구슬 같은 게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 결혼의 시작부터 공작의 의도는 아주 뻔했다.

‘네놈이 이리 미쳐 날뛸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담을 막았을 것이다!’

‘오빠!’

‘고 공자님, 부디 용서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려 용서를 비는 가신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참담했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꺽꺽대는 호위기사는 지옥이라도 엿본 것 같은 눈이 되어 있었다.

루드베키아가 신전에 오래 머무를 줄 알았다는 뻔뻔한 헛소릴 변명이랍시고 늘어놓던 모습과는 생판 다른 놈 같았다.

‘……다 같이 작당하고 태만을 저질렀는데 네 녀석만 죽이면 불공평하겠지.’

‘고, 공자님…….’

‘내 아내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빌어라. 그녀가 잘못된다면 너희 모두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루드베키아를 찾아 데려온 뒤, 그는 며칠 밤을 앓아누운 그녀의 방바닥에서 보냈다.

딱히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녀를 느끼고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살려줘요, 살려줘…….’

망할 여자 같으니. 차라리 소문대로 악독하고 이기적인 여자였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진작 배에 태워 보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차라리 그를 이용하려 드는 여자였다면, 저가 가진 작은 능력에 한껏 들떠서 콧대를 세우는 여자였다면 모든 게 훨씬 쉬웠을 텐데.

정말로 알려진 대로 애지중지 귀여움만 받고 살아온 여자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그냥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토록 고통스러운 기분 따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수년에 걸쳐 쌓아온 두꺼운 얼음 장벽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가장 지독한 한파조차 봄의 볕에 끝끝내 녹아내리고 말듯이, 그만의 냉철하고 단순한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이스케?”

정말이지 하나같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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