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북풍의 서커스 (2)
그 소리가 매우 찰져서 내가 던져 놓고도 흠칫해 버렸다.
이스케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어?
잠깐 기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저, 저기…….”
“읏…….”
“괘, 괜찮아요?”
“제기랄…….”
나직하게 울리는 으르렁거림이 무시무시했다.
누가 제발 방금 내가 사망 플래그를 꽂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줘.
“미, 미안해요. 일부러 세게 던진 건…….”
“크르르르……!”
남편 놈이 피습을 당한 틈을 타 기세등등하게 으르렁거린 용 녀석이 건방진 인간 놈을 한입에 먹어치울 기세로 쿵쾅거리며 움직였다.
내 손이 퍼런 비늘을 와락 움켜잡았다.
“안 돼! 그러지 마!”
“크릉……!”
용이 불만스럽게 콧김을 뿜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 진짜 울고 싶군. 나도 내가 대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일대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인간들이 무리 지어 다가오고 있는 소리……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린애처럼 입가에 고기 찌꺼기를 붙인 채 식식대고 있는 용, 저만치 쓰러져 떨고 있는 포포, 그리고 맥없이 고개를 꺼덕거리면서도 날개를 푸드덕거리려 애쓰고 있는 그리핀…….
이 상태로라면 안 된다.
틀림없이 아까보다 더 많은 팔라딘 지원군들이 몰려오고 있을 텐데, 아무리 용이라 해도 이런 상태로는 버거울 것이었다.
포포랑 그리핀은 진짜로 죽고 말 거다.
일반인들에게 있어 마물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들인지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결코 일방적으로 사냥당하는 불쌍한 야생 동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말을 알아듣고 내게 그토록 친절했던 녀석들을 대체 어떻게 그냥 외면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그냥 도륙당하도록, 부상을 당하고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어. 애초에 전부 나 때문인걸.
일단 전부 살려야 한다. 살아야 나중에 다시 만나든 할 것 아냐.
나는 머뭇거리며 이스케를 쳐다보았다.
이스케는 어느덧 얼굴을 짚은 손을 치우고서 밭은 숨결을 내뱉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눈 풀린 것 좀 보게. 나를 어떻게 족칠지 궁리하는 걸까?
“저는…….”
“…….”
“미안해요. 저, 저도 몰랐어요. 정말로 제가 이렇다는 걸 몰랐…….”
“누군 알았을까 봐.”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정말 몰랐다고, 이 넌더리 나게 야박한 자식아!
“그런 게 아니라…….”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자꾸만 속이 욱신거렸다.
신전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하필 로렌초랑 마주칠 뻔해서 숨었다고?
그러다 그 새끼가 나에 대해 무시무시하게 뒷담하는 소릴 듣고 멍하게 돌아다니다 아프기도 하고 해서 혼자 신전 밖을 서성이다 포포랑 마주친 거라고?
도망치려고 계획했던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런 걸 구구절절 떠들어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 안다.
어차피 내 말을 믿어주지도 않을 거잖아.
내 모든 삶을 통틀어 진심을 털어놓아 봤자 결과가 좋았던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런데…….
“저는 퓨리아나 영애 일이랑 아무 관련도 없어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뭐에 사로잡힌 것처럼 혀가 멋대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믿지 않으실 테지만…… 제가, 제가 마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정말로 아무 짓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용 녀석이 킁킁거리며 내 얼굴 가까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나는 주먹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뭐 하는 거야.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
“일부러 도망친 것도, 히끅, 아니고, 아파서 기절했는데 쟤들이…… 히끅, 얘네들은 절 도와준 잘못밖에 없어요. 용도 저 때문에 억지로 깨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히끅, 그러니까…… 저 안 믿으셔도 되니까, 하라고 하시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벌 다 받을 테니까 제발 얘들은 그냥…….”
“그만…….”
“네?”
“그만…… 그만 울어.”
짜증이 난 모양이다.
이윽고 남편 놈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에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는 찰나였다.
“감히 누가 너를 마녀라고 지껄인다고…….”
“히끅, 네?”
“오늘 일은 전부 우리가……. 하아, 그러니까…….”
풀썩.
용이 머리를 갸웃했다.
“젠장, 망할 잠을 못 잤더니…….”
애써 두 발로 선 것이 무색하게도, 이스케는 그대로 뒤로 풀썩 쓰러져 눈더미에 사지를 묻고 누워 있었다.
나는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고작 버섯에 맞았다고 저 괴수가 저렇게 될 수가 있나? 이 형광 버섯에 무슨 독성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미안해.”
……뭐?
나는 잠시 용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제가 미쳤다고요?”
이스케가 맥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밭은 숨결이 하얗게 부서졌다.
“미안해.”
“…….”
“미안해…….”
버섯 독 때문인가? 혹은 과도 흥분기 후유증으로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 아니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번득이는 빛이 어느덧 꺼진 붉은 시선이 멍하게 얼어붙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네.
왜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보는 거야?
귀찮아했잖아. 성가셔했잖아. 내가 싫다고 했잖아.
내가 없어져서 후련해하던 거 아니었어? 프레이야가 그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 믿는 거 아니었어?
“……경! 이스케 경!”
“레이디 루드베키아!”
팔라딘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군단 하나쯤은 되게 몰려왔을 줄 알았는데, 눈밭을 헤치며 다가오는 이들은 아까 본 대여섯 명의 기사뿐이었다.
선두로 다가온 아이반 경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스케와,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멈칫했다.
“크르르…….”
용이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화들짝 녀석의 주둥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그러지 마. 괜찮아.”
대체 뭐가 괜찮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팔라딘들은 애써 덤덤한 듯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남편 놈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용 녀석이 흉포하게 눈을 부라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로와 알 수 없는 감정에 절은 눈길이 나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누더기가 된 드레스, 흙투성이 손과 엉망진창이 된 발까지 빠짐없이 시선을 주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씨이, 내 꼴이 말이 아닌 거 나도 안다고…….
“……이만 가지. 이 정도면 충분히 놀았잖아.”
이건 또 뭐야. 빈정대는 건가?
마치 소풍 나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부인을 데리러 온 것처럼 태평한 어투다. 마녀를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쟤, 쟤들은…….”
“한 대 얻어맞았다고 저것들이 죽진 않는다. 회복하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정말로? 나는 주춤거리며 포포와 그리핀 쪽을 돌아보았다.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아이반 경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부인. 저것들 의외로 더럽게 끈질기거든요. 하루쯤 지나면 짜증 나게 쌩쌩해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멸종위기종은 방생해야 옳습니다! 당분간 용이 깨어났다고 다들 호들갑 좀 떨겠지만 저희도 직업윤리가…… 읍읍!”
장황하게 떠들어 대는 앤디미온의 입을 누군가가 틀어막았다.
다들 갑자기 왜 이렇게 이상하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달래려는 것처럼……. 날 회유하려고 함정을 파는 거냐?
“크릉…….”
용 녀석이 다시 킁킁거리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살짝 벌어진 잇새 사이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이쯤이면 입안에 볼 주머니가 따로 달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몸을 굽히고 발치에 떨어진 보석을 주워 들었다.
거의 내 주먹만 한 크기의 루비 원석이었다.
다짜고짜 보석을 토해낸 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돌려주려고 해도 주둥이를 흔들며 거부했다.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너울거린다.
가지 말라는 뜻일까? 이거 줄 테니까 자기랑 더 있자고?
쓰라린 죄책감이 일었으나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휴, 내가 여기서 뻗대면 전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데. 다시 만나는 것도 일단 살아야 가능하지. 게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남편 놈은 한쪽 팔을 내민 채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까 꽤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다.
또 뭐가 그렇게 힘들어? 왜 자꾸 그런 이상한 표정 하는 거야.
무슨 생각해?
지금 무슨 생각해?
나는 다시 포포와 그리핀 쪽을 돌아보고는, 마지막으로 용을 한번 쳐다본 뒤 내 앞에 있는 손을 맞잡았다.
여기저기서 밭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원 퇴각!”
“전원 퇴각한다! 자자,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고!”
아아, 다행이다.
몸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이어 발이 허공으로 홱 들렸다. 이놈의 병아리 신세.
이가 딱딱 부딪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추운 것도 몰랐는데, 문명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자마자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체감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하여간 넌 집에 가기만 해.”
……소, 소름이 오소소 돋는군. 뭐라고요, 남편 놈아?
저기요, 아까까지만 해도 너 막 엄청 힘든 척했잖아! 갑자기 미안하다는 둥 사람 헷갈리게 이상한 말까지 했잖아! 이제 다시 본색을 드러내는 거냐!
나쁜 자식. 내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이 야박한 새끼는 나의 짧고 굵은 방종을 곱게 넘어가 줄 심보는 눈곱만큼도 없는 거였어!
“크릉…… 크으응……. 끄으응……. 캬오오오오오!”
우리를 쫓아오는 대신 그 자리에서 꼿꼿이 바라보기만 하던 용이 낮게 끙끙거리나 싶더니, 이윽고 기나긴 울음을 토해냈다.
여태까지의 그 장엄한 포효가 아니라, 마치 구슬프게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였다.
“캬오오오, 캬오오오오!”
어떡해, 저 바보 진짜 우는 거 같아.
나는 못돼먹은 남편 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꾹꾹 삼키려 애썼다.
내 몸을 안아 든 팔에 힘이 꽉 실렸다.
“……괜찮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똑같은 바보 주제에. 씨이, 전부 똑같이 바보 멍텅구리인 주제에…….
훌쩍거리는 내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색하고 머뭇거리는 듯한 손길이었으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머리가 무겁고 잠이 쏟아졌다.
내 생애 최초의 방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온몸이 무거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더운 동시에 지독하게 추운 느낌. 의식이 온통 가물가물하면서 눈알이 욱신거렸다.
“루비…….”
누군가가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무거운 눈알을 굴렸다.
누구지? 내가 아플 때 이렇게 해줬던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데…….
“언니……?”
흐릿한 시야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들어왔다.
언니가 떠올랐다. 가는 손목에 엉겨 붙어 있던 그 피가…….
“언니, 언니.”
“루비……?”
“언니,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더듬거리는 손가락 끝에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와 닿았다. 언니다, 언니야!
나는 그 머리카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훌쩍훌쩍 애원했다.
“언니, 죽지 마. 나 죽기 싫어. 그러니까 언니도 죽지 마. 나랑 살자.”
이마를 짚은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안 돼, 가지 마!
“너, 얘 앞에서 뭐 위험한 짓이라도 했냐?”
“아니. 딱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응? 언니가 아닌가?
저건 분명 내 못돼먹은 남편 놈 목소리 같은데, 언니가 내 남편 놈과 얘기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암, 여기랑 거기랑은 아예 차원이 다른 세계잖아…….
낑낑 몸을 돌리려는데 어떤 손길이 내 어깨를 잡고 바로 눕게 했다.
코끝에 와닿는 체향이 어딘가 낯익었다. 어어?
“사…….”
사신이다. 은빛 머리칼의 사신께서 죽어가는 나를 물끄러미 굽어보고 있었다. 으악!
“사, 살려줘요. 살려줘…….”
피가 고인 웅덩이 같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살려줘, 나 죽이지 말란 말이야 이 나쁜 놈아! 네놈이 주인공이면 다냐!
어찌나 분한지 눈물이 찔끔찔끔 솟았다.
나는 굳은 듯 나를 노려보고 선 사신 놈의 우람한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살려줘어, 나 살려줘요…….”
이놈은 왜 맞는데 안 피하지?
내 손만 더 아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거기서 다시 의식의 줄이 끊겼다.
의식이 멋대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웬 조그만 손바닥이 내 얼굴을 토닥이고 있었다.
“빨리 나으세요, 부인…….”
얜 누구야. 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예쁘다.
내가 아는 어떤 꼬마 공주님이 떠오르는군. 공주님이 날 방문해 올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얼굴을 토닥이는 자그만 손길에 의식을 내맡기다시피 하자 다시 한번 풍경이 바뀌었다.
주변의 풍경도, 침대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왜 여기에 틀어박혀 있어?’
언니가 물었다.
긴 생강빛 머리카락, 푸른 눈, 태닝한 피부와 코럴빛 립스틱을 바른 일자 입술.
진짜 언니였다.
‘나가서 요트라도 좀 타지 그래? 명색이 여름 방학인데.’
매해 여름 방학마다 우리는 가족용 여름 별장으로 내려왔다.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호숫가의 풍경이 보이는 곳.
언니의 친구들이 신나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내가 누운 방 안까지 들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던 언니가 홱 하고 내 옆에 드러누웠다.
‘문제가 뭐야? 엄마나 아빠가 너한테 조용히 처박혀 있으라고 했을 린 없고, 여기 있지도 않잖아. 어디 아파?’
우리의 부모님은 자식들이 친구들을 불러모아 광란의 여름을 즐기는 동안 각자의 애인들과 함께 해외 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큰오빠가 나더러 자기가 올 때까지 여기 있으라고 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오빠들과 자주 싸웠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과도 자주 싸웠다.
그렇게 한바탕 싸우고 나면 꼭 혼자 숨어서 자해를 하곤 했다.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말했더라면…….
담배 연기를 휘감은 메마른 팔뚝이 장난치듯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것을 끝으로 하얀 거품이 밀려오듯 풍경이 지워졌다.
그 후로는 중간에 다시 깨는 일 없이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전에 없이 맑고 개운한 느낌이었다.
또렷한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들어왔다.
오메르타 성의 내 침소…….
부스스 일어나 앉는 동안 마지막으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이 느릿느릿하게 되살아났다.
이제부터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포포랑 그리핀은 괜찮으려나.
고 포악한 용 녀석이 얼씨구 지화자 하고 괴롭히는 건 아니겠…….
“좀 괜찮으십니까.”
나는 하마터면 헉하고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침소 한쪽에 놓인 의자에 꼿꼿이 앉아 나를 넌지시 응시하고 있는 엘레니아가 보였다.
예의 그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내가 찔리는 게 많아서인지 좀 무서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궁리하며 연거푸 마른침을 삼키는 찰나 그녀가 다시 말했다.
“미안합니다.”
“……네?”
“그렇게 루비를 몰아붙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때 화장실 앞에서 벌어졌던 일 얘기를 하는 듯했다.
내가 그저 멍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가운데 엘레니아는 눈을 약간 내리깔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어색해하는 것 같다.
궁금증이 일긴 하지만 일단은 그냥 괜찮다고 말해야겠지?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
“제 어머니도 손등에 그런 반점이 있었습니다.”
“아…….”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해부터 그렇게 천천히 말라가셨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날 날 몰아붙일 때 약간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엘레니아의 입으로 들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러면서도 외적인 부분에 병적으로 집착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괴한 습관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저를 비롯한 소수 사용인뿐이었습니다. 하루에 과일 몇 개만 먹고 머리 관리에 반나절을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언니 생각이 났다. 죽은 공비와 언니의 마지막 행보가 너무 비슷했던 탓이었다.
물론 나도 비슷한 습관이 들어버리긴 했지만…… 나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입술 끝을 살짝 깨물어 보인 엘레니아가 다시 눈을 들고 내 눈을 바로 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
“덕분에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덕분이라니, 무슨 뜻일까.
내가 그때 변명하다시피 둘러댄 통제에 관한 소릴 뜻하는 거려나?
“저어, 제 남편한테는…….”
“오빠에겐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선한 목소리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막말로 그런 거 들켜서 좋을 거 없잖은가. 수치심은 둘째 치고.
그럼 이걸로 엘레니아와 나 사이에 비밀이 하나 생긴 건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짧고도 기묘한 침묵이 흐른 끝에 엘레니아가 마침내 내게서 시선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아리엔 전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네?”
“꼭 병문안을 하고 싶다며 들르셨거든요. 얼른 낫길 바란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게 꿈이 아니었던 거였어? 진짜 공주님이 맞았다니, 신기하면서 감격스럽군.
“한데 루비.”
“네?”
“혹시 언니가 있으십니까?”
응? 갑자기 언니라니? 전생에야 있었지요.
내가 의아하게 머리를 갸웃거리자 엘레니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빠르게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것보다 어차피 곧 아시게 될 테지만, 잠적 중이던 서리용이 깨어났다 하여 지금 수도 상황이 꽤 어수선합니다.”
“…….”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다들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다지 태연해 보이진 않던데요. 것보다 엘레니아는 문제의 용을 깨운 작자가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
이스케가 엘레니아한테 말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뭔가 시험해보려는 심산인가?
“그러니 당분간은 절대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사람들이 먼저 발견해서 망정이었으나…….”
“네?”
멍하게 되묻는 나를 향해 엘레니아가 붉은 눈을 크게 깜박여 보였다.
“역시 기억을 못 하시나 보군요. 서리숲 근처에 쓰러져 계시던 걸 자경단 길드원들이 발견해 몸값을 논하는 중이었다 합니다만, 대체 어쩌다 그곳까지 가게 되신 겁니까?”
“그게, 아파서 정신이…….”
“뭐 됐습니다. 그래도 다시는 혼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특히 서리숲 부근은 잘 훈련된 팔라딘이라도 홀로 가기 꺼리는 곳입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운이 좋으셨으나 자경단 길드 또한 믿을 만한 것들이 못 되고요. 아시겠습니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다짐에 나는 절로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엘레니아는 내가 일련의 상황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몰려 가출했던 거라고 결론지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전혀 모르는 기색이다.
도시경비대가 일일이 살피기 어려운 민가의 치안을 위해 암암리에 눈감아주고 있긴 하나 그럼에도 엄연히 불법인 자경단 길드를 끌어들였다는 건 그쪽을 매수했다는 뜻일 거다.
즉 그런 수고까지 감행하면서 이스케 녀석을 위시한 날 찾아낸 팔라딘들이 모든 걸 비밀에 부쳐 뒀다는 뜻인데, 그게 내게 있어 좋은 방향일지 아닐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누가 모르고 누가 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