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으드득. 으드득.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출렁거리는 비늘들의 더미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머리가 온통 무거웠다.
맥없이 눈동자를 굴리자 석양에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북부의 하늘이 보였다.
여긴 어디지?
으드득. 으드득. 콰드득 찹찹.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무거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짙푸른 비늘들의 향연 끝에는…….
“헉……!”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자 죽은 매머드를 무자비하게 뜯어먹고 있던 용이 내 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왠지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탁, 탁 하고 거대한 꼬리가 흔들리며 하얗게 물든 땅을 내려쳤다.
눈이 사방으로 튀면서 바닥이 우릉우릉 진동을 일으켰다.
어머니 대지여, 죄 많은 자식을 용서하소서……. 그런데 언제 눈이 내렸지?
“크르르…….”
“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식사 계속하렴.”
와드드득.
놈이 갈빗대를 흉포하게 씹으며 나를 계속해서 쏘아보았다.
퍽 부담스러운 시선이었기에 나는 무거운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딴 곳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한쪽에 다리를 접고 웅크려 있는 그리핀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조는 듯 고개를 꾸벅꾸벅 까딱이고 있었다.
하, 다행이야……. 그런데 포포는 어디 갔지?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북부라 해도 이 계절에 이 정도의 눈이라니 기현상인데.
발이 시렸다. 문득 내려다본 발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긴, 며칠 동안 맨발로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혀 귀부인의 발 같지 않다. 문명인의 발 같지도…… 훌쩍.
후, 이제부터 어떻게 되려나. 로마냐로 연락이 갈까? 아니면 브리타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할까?
“크르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자 고약한 용 새끼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그리핀이 머리를 꺼덕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조는 게 아니라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푸릉…….”
“미안. 바보 같은 질문이었네.”
검기에 제대로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휴, 마물이 부상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게다가 포포는 도대체 왜 안 보이는 거야. 먹을 거라도 구하러 간 걸까?
“포포는 어디에 있어?”
조심스럽게 묻자 그리핀이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거렸다.
딱딱 경련하는 부리가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우거진 수풀과 작은 연못이 보였다. 저기로 갔다는 뜻 같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용을 돌아보았다.
용은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찹찹 열심히 육질을 뜯고 있었다.
끔찍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불현듯 안쓰러움이 일었다.
너도 먹고살려고 애쓰는구나. 그래, 여기서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애초에 제 보물 창고 안에서 동면하고 있던 용을 깨운 건 나였다.
듀라한 무리한테 쫓기다 우연히 들어간 거긴 했지만…….
만약 내가 포포를 만나지 않았다면, 같이 여기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리핀이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을 거였다.
나는 저만치 보이는 연못가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용 녀석이 빤히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놈의 시야 반경 안이었다.
“포포야, 포포?”
다행히도 포포는 거기에 있었다.
수풀을 헤치며 연못가로 다가서니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무언가를 열심히 줍는 듯하던 포포가 몸을 홱 일으켰다.
짜식, 무사했구나!
“포, 포 포!”
“너 괜찮아? 뭐 하는 거야?”
“포, 포 포.”
포포가 한쪽 팔을 파닥이며 발아래를 가리켰다.
하얗게 언 잡초들 사이 사이로 웬 보랏빛으로 빛나는 예쁜 버섯들이 피어 있었다.
이건 뭐지? 마물 전용 약재라도 되나?
“이건 먹는 거야?”
“포.”
“그리핀 주려고?”
“포.”
그렇군. 이걸 먹으면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건가.
나는 포포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버섯을 따기 시작했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포가 이러는 걸 보면 뭔가 있겠지.
내게 여기서 머문 내내 이 녀석들이 나를 돌봐줬던 것처럼 나 또한 그 친절에 보답하고 싶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가늠할 수가 없으나…….
우리는 한참 그렇게 열중해서 형광 버섯을 따 모았다.
치맛자락이 버섯으로 가득 찼다.
눈에 보이는 대로 전부 딴 다음 마침내 일어나 그리핀과 용 새끼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털썩!
빽빽이 우거진 수해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발치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포포가 펄쩍 뛰었다.
“으으!”
목덜미가 쭈뼛 섰다. 그건 다름 아닌 동강 난 바실리스크의 머리였다!
머리만 남은 채로도 펄떡펄떡 튀며 최후의 발악을 하던 바실리스크가 이윽고 서서히 먼지처럼 바스러지면서 그 자리에 새까만 마정석만 덩그러니 남겼다.
이게 대체…….
포포가 무시무시한 입을 쩌적 벌림과 동시에 번쩍, 하고 눈부신 섬광이 휘몰아쳤다.
포포가 튕기듯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포, 포포야!”
“기껏 숨은 곳이 여기인가?”
오, 신이시여 제발.
진정한 사신이 따로 없다. 소름의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쓰러진 나무들을 짜증스럽게 헤치고 다가온 이스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를 바로 보았다.
완전히 맛이 가버린 듯, 동공이 풀린 채 광기로 번득이는 눈빛이 굶주린 마물 뺨칠 기세였다.
거칠게 닳은 음성 또한 눈빛만큼이나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몸이 벌벌 떨렸다.
과도한 흥분 상태인 남편 놈은 나를 마물들과 한통속인 마녀로 판단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나를 성검으로 내려쳐 단숨에 산산조각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크롸아아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용 녀석이 곧바로 반응했다.
우리의 성격 파탄자 용은 살벌하게 포효를 뿜어대며 곧장 쿵쾅쿵쾅 달려왔다.
내 저 녀석이 든든하게 느껴질 줄이야.
묵묵히 용을 돌아본 이스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간담을 오싹하게 만드는 살기등등한 미소였다.
“목소리가 벌써 맛이 갔군. 갓 깨어난 주제에 그렇게 날뛰어 댔으니 무리가 간 것도 당연하지.”
“크르르르……!”
“남의 마누라 납치해 간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건 인간한테 배웠나.”
“크롸아아아!”
이 맛 간 녀석이 도대체 뭐라고 떠드는 거야! 이 자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아드레날린에 취해서 자기가 용도 그냥 때려잡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거라고!
그러다 생각이 들었다. 내 남편 놈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인 만큼 저렇게 무모, 아니, 정신 나간 자신감을 발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주인공 버프로 용을 때려잡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름을 날리게 될지도…….
용 녀석은 당장에라도 분노의 냉기를 토해낼 기세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콧김을 식식대면서 참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남편 놈이 검을 번쩍 쳐들었다. 으아아!
“순순히 내놓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하지 마요!”
퍽!
나도 모르게 힘껏 내던진 형광 버섯이 팽글팽글 날아가 이스케의 미간을 강타했다.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1권
냥이와향신료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