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쉴드! 어서 쉴드를!”
“부인! 속히 이쪽으로…….”
“오, X발, 나 태어나서 용 처음 봐!”
“한 번에 짖지 좀 마, 이 X같은 후레잡것들아! 부인!”
나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젖혔다. 그러는 사이 두툼한 목을 좌우로 우두둑우두둑 꺾어 보인 용이 다시 한번 주둥이를 힘차게 벌렸다.
그대로 잠시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혼비백산한 팔라딘들 쪽을 향해 얼음 폭풍 같은 냉기를 내뿜었다!
“아아앗!”
콰지직.
팔라딘들 주변에 쳐진 연푸른 빛의 막이 냉기와 충돌하면서 쭉쭉 균열을 일으켰다.
대로한 용께서는 쿵쿵 각도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냉기를 뿜어댔다.
주변의 덤불들과 나무들이 허옇게 얼어붙으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고, 빗물 고인 웅덩이들 또한 순식간에 꽝꽝 얼어붙은 아이스링크로 변모했다.
나는 무릎을 엉금엉금 움직여 그리핀이 쓰러져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그리핀은 포포의 포동포동한 품에 안긴 채 다리를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포포야, 너희 먼저 도망쳐!”
포포가 뭐라고 반응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몸을 좌우로 흔들어 보인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에 땅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진동하면서 사방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다.
눈이 멀 듯한 빛이 이윽고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잠깐 주춤하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선 용이 뜻밖의 시각 테러를 당한 사실이 불쾌했는지 포악한 기세로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발을 쿵쿵 굴러댔다.
콰직! 콰직!
얼음 가루가 사방으로 튀면서 땅이 마구 흔들렸다. 땅 좀 가만히 냅둬, 이것들아!
“아…….”
내 눈이 벌어졌다. 입 또한 같이 벌어졌다.
근처에 있으리란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일시적으로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보는 남편 놈이었다.
이스케는 용과 제 동료들의 대치 지점 중앙에 검을 내리꽂고 서서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경직된 붉은 눈이 낯설고도 기이한 빛으로 번득거렸다.
“크르르르르…….”
짜증이 날 대로 난 용이 경고하듯 낮은 으르렁거림을 흘렸다.
이번엔 여태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는데, 무슨 고양잇과 맹수처럼 몸 앞쪽을 약간 숙인 채 귀를 뒤로 바짝 젖힌 자세로 이스케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대한 몸을 뒤덮은 푸른 비늘들이 출렁이면서 서로 짝 맞부딪혔다.
보아하니 용 녀석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스케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쟤가 좀 밉상이긴 하지.
망부석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던 남편 놈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용을 마주 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와락 소름이 돋았다.
가만, 저 자식 아무래도 지금 과도 흥분 상태인 거 같은데? 언젠가 내게 말했던 그 약 빤 것 같은 상태…….
“겨, 경!”
“크롸아아아아아!”
용이 다시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얼음 결정들이 흩날리며 젖은 눈가에 달라붙었다. 용이 내뿜는 냉기와 성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쉴드가 충돌하면서 굴절된 냉기 폭풍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나가던 애꿎은 새들이 거기에 얻어맞고 픽픽 떨어져 내렸다.
“저, 저 비만 도마뱀 새끼가…….”
“뭘 넋 놓고들 있어, 새끼들아!”
눈이 부시고 귀가 아프고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혔다.
무지막지한 충돌이 지속될수록 반투명한 쉴드의 막에 서서히 금이 일기 시작했다.
잠깐 숨을 고르며 몇 발자국 물러난 용이 아이스쇼를 재개함과 동시에 이스케가 땅에 박힌 성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이것들아, 이게 무슨 엘사 대 드래곤 슬레이어 판이냐고!
“그만해!”
비명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였다.
이 자리에 겨울 왕국을 강림시킬 기세이던 냉기 폭풍이 불쑥 뚝 멎었다.
뒤이어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두 발로 일어나 섰다.
용은 어느덧 입을 어정쩡하게 벌린 자세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밝은 황금색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너울거린다.
이스케 놈 역시 만만치 않게 기괴하게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날 알아보기나 하는 것일까?
“크르…….”
“너…….”
저, 저기요, 잠깐만요. 설마 지금 이 둘이 목표물을 나로 바꾼 건…….
“방금 대체 뭐냐?”
“뭔 일이 일어난 거야, 대체?”
뒤쪽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아연실색하고 의혹에 젖은 음성들이 귀를 푹푹 찔러왔다.
내가 주춤거리며 발을 떼는 찰나, 당장에라도 내게 달려들 기세로 나를 노려보던 남편 놈이 갑자기 뒤를 홱 돌아보았다.
술렁임이 뚝 멎었다. 그리고…….
“……꺄아아악!”
쿵!
땅이 다시 한번 흔들리나 싶더니 몸이 허공으로 홱 들어 올려졌다.
고약한 용 녀석은 느닷없이 나를 낚아채 발톱 속에 그러쥐고는 그대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부, 부인!”
“포, 포오!”
재주 좋게도 한 팔로 그리핀의 앞다리 두 개를 닭 잡듯 쥐고 쫓아온 포포가 용의 꼬리에 힘껏 매달렸다.
생닭처럼 대롱거리게 된 그리핀이 불만스럽게 부리를 딱딱거렸으나 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크롸아아아아아아!”
높아. 너무 높아…….
머리가 핑 도나 싶더니 잠시 후 암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