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6)

* * *

“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코즈믹 호러급의 공포에 처했어도 비명은 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멋대로 들어와 놀다가 잠자는 집주인의 코털을 건드린 주제에 시끄럽게 구니 집주인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집주인, 즉 멸종 위기에 처한 최상위 마물께서는 당연히 내 비명에 무시무시한 호통으로 응답하셨다.

“크롸아아아아아!”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보석 산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며 보석들이 자갈돌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동굴이 이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잠시 얼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가엾은 포포랑 그리핀이 그 거대한 덩치들로 내게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게 느껴졌을 때야 정신이 약간 들었다.

“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당신이 여기 있는지 몰랐어요! 그냥 도망치다 보니까 어쩌다 여기로 온 거예요! 우리 아무도 당신 보석 슬쩍하지 않았어요! 얌전히 다시 나갈게요!”

횡설수설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막 싹싹 비는 나를 대로한 용께서 잠시 근엄하게 굽어보셨다.

아까는 와이번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지만 와이번은 저렇게 클 수가 없었다.

눈도 다른 마물들처럼 초록색이지 저런 밝은 황금색일 수가 없었다.

“크르르르르…….”

“하, 한 번만 봐주…… 흐아앙!”

버둥거리는 몸이 허공으로 홱 낚아채었다.

독수리 발톱에 꿰인 병아리에 이어 용의 발톱에 꿰인 병아리 신세라니, 신이시여 제 팔자 좀……!

이대로 날 먹기라도 하려는 걸까?

안 돼, 이렇게 허망하게 개죽음당할 순 없다고! 살려줘, 이 이스케 같은 놈아!

“포, 포…… 포, 포 포!”

“포, 포포야! 도망쳐!”

몸이 사정없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양팔을 파닥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포포가 냅다 점프해 날 붙든 용의 발목을 깨물었다.

감동이긴 한데, 일단 먼저 도망치라고 짜식아!

머리 위에서 피요오오오 하고 호각 소리가 울렸다.

그리핀이 허공을 돌면서 용의 목덜미를 쪼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마물계의 먹이사슬 최우위를 점한 용께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밸런스가 이래서야 무슨 뾰족한 수가 없다.

“크르르…….”

거대한 주둥이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거대한 콧구멍과 쪽빛으로 출렁이는 비늘들, 소름 돋게 번득이는 황금색 눈동자가 포악한 괴수 그 자체였다.

훅, 하고 뜨거운 연기 같은 콧김이 끼쳤다.

“미, 미안…….”

“크르르…… 킁, 킁.”

한참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맡는 듯하던 용이 갑자기 나를 내려놓은 것은 그때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석 더미 위에 얌전히 내려놓고는 그대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혹 다른 마물들처럼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아니면 그냥 귀찮으니 얼른 꺼지라는 뜻일까?

나는 슬금슬금 두 발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시늉을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용은 여전히 날 물끄러미 관망하고만 있었다.

급기야 아까 들어왔던 쪽으로 냅다 튀려는데 녀석이 한쪽 다리를 움직여 콰직 하고 가로막았다!

“꺄악!”

“크르릉……!”

“왜, 왜 이러는…… 꺄악!”

콰직! 콰직! 콰직!

보석들이 마구 흩날렸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놈 또한 발들을 요리조리 움직여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뭔가를 더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내가 움직이면 쫓아 가로막기만 하는 것이었다.

한참 더 그렇게 혼 빠지는 술래잡기 아닌 술래잡기를 한 끝에야 나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자식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설마 날 가지고 놀고 있는 건가?

나는 간신히 움직임을 멈추고서 놈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면 당장에라도 덮쳐와 나를 한입에 씹어먹을 기세인데……. 꼬랑지는 왜 흔들고 있는 거야? 공격 태세인가?

탁, 탁.

용 놈이 꼬리를 흔들 때마다 아까운 보석들이 사방으로 튀고 벽이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때 포포가 다시 덤벼들어 와 놈의 다리를 철썩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포, 포 포!”

용감한 포포. 그러나 흉포한 용은 그저 간지럽다는 듯이 팽 하고 콧김을 뿜으며 무자비하게 포포를 걷어찰 뿐이었다.

포포가 맥없이 날아갔다.

“포, 포포야! 너 이 나쁜……!”

“크르르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리자 놈이 거대한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불이라도 뿜으려는 건가 싶어 기겁하는데, 불 대신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들이 촤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니, 대체 얼마나 보석을 좋아하면 입에 물고 자기까지 하는가?

촤르르 촤르르륵.

주변에 쌓인 것들과는 약간 다른, 거의 내 주먹만 한 크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내 발치에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대왕 보석들에 파묻혀 질식사하라는 심보인가 싶었다.

“저기…….”

“크르…….”

“지금, 대체 뭐 하자는…….”

“크롸아아아!”

대기가 떨리는 일갈에 나는 그만 보석 언덕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아이고, 또 뭐가 잘못된 거야, 이 성격 파탄자 자식아!

혼비백산한 내 팔을 누군가가 홱 잡아채 끌어당겼다. 보니까 포포였다.

“으아아!”

듀라한 바로 다음에 용이라니 이건 B급 영화 시나리오 축에도 못 끼겠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몸은 살기 위해 움직였다.

부랴부랴 도망치는 우리의 뒤로 약이 바짝 오른 용님의 포효가 울렸다.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뒤쫓아오는 무시무시한 발소리가 공포의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사방이 흔들거리면서 돌바닥에 쭉쭉 금이 갔고, 뜻밖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천장의 고드름들이 후드드득 쏟아져 내렸다.

그리핀이 머리 위를 날며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그대로 고슴도치가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캉, 캉! 캉! 캉!”

“빽, 빽! 빼애애액!”

아무래도 이 용님의 집안에 무단으로 살림을 차린 마물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일말의 예고도 없이 폭주하는 용의 등장에 사방팔방에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들이 튀어나와 우리의 도주에 합류했다.

“아악!”

어느 순간 무언가가 나를 붙들고 바깥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허공에 붕 뜬 잠깐 동안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통, 통!

뒤쪽에서 날아올라 나를 콱 껴안은 포포가 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깎아지른 협곡의 경사를 공이 굴러가듯 통 통통 구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다 막판에 무슨 튀어나온 바위 같은 것에 걸렸는지 포탄처럼 홱 튕겨 올랐다.

“피요오오오-”

눈이 팽글팽글 도는 느낌이다.

그리핀은 우리를 반쯤 떨어뜨리다시피 우거진 덤불 한복판에 떨구고는 자신 역시 날개를 뻗고 푹 드러누워 버렸다.

머리 위로 반쯤 언 비인지 눈인지 모를 것들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기침을 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포포도 그리핀도 완전히 기진맥진한 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애들아, 괜찮아?”

“포오……. 포오…….”

“푸르르릉…….”

안 괜찮은 것 같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 해도 여기라고 안전할까?

대체 그 용 녀석은…….

“푸릉, 푸릉!”

그때였다. 사람처럼 할딱대며 누워 있던 그리핀과 포포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연푸른 빛이 덤불 틈새로 번쩍 휘몰아쳤다. 오, 제발, 이번엔 또 뭐…….

“……부인?”

휩쓸려 나간 덤불 사이로 어디선가 많이 본 녀석이 서 있었다.

“……애, 앤디미온 경?”

얘가 대체 왜 여기에……?

앤디미온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내가 멍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사이, 앤디미온 또한 나 못지않게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크게 벌어진 호박색 눈동자가 완전히 멍했다. 이렇게 놀란 표정은 처음 본다.

그리고…… 잠시 후 시퍼런 검날이 번쩍 움직였다.

“부인, 물러나 계십…….”

“가까이 오지 말아요!”

“예?”

나도 모르게 외침과 동시에 포포가 입을 벌렸다.

쩌저적 소름 끼치게 벌어지는 입속이 오늘따라 유독 무시무시해 보인다.

그리핀 또한 어느덧 커다란 날개를 위협적으로 펄럭거리며 녹색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리핀이 머리를 갸웃했다.

잠깐 움찔한 포포가 입을 엉거주춤 벌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애원하듯 머리를 가로저어 보였다. 미치겠다. 대체 이 상황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앤디미온이 당혹감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혼란스럽고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부인, 저는…… 저희는…….”

딱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 되어버린 건가?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앤디미온이 포포에게 먹히도록 놔둘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포랑 그리핀이 죽거나 다치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앤디미온이 여기 있다는 건 틀림없이 근처에…….

“앤디미온!”

아, 큰일 났다. 다른 녀석들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앤디미온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무작정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포포와 그리핀이 앞다투어 나를 쫓아왔다.

“부, 부인!”

망했어, 나의 문명인으로서의 인생은 완전히 망했어! 이제부턴 여자 타잔의 길밖에 없는 거야!

그러다 성격파탄자 용 놈의 장난감으로 전락하든, 마녀사냥을 당하든 그때 가서 생각해 보…….

“부인! 레이디 루드베키아!”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망할 팔라딘 놈들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부르지 마, 이것들아! 어차피 얼씨구 지화자 하고 있었잖아!

이대로 돌아간다면, 운 좋게 어찌어찌 둘러댄다 해도 곧장 로마냐행 배를 타게 될 것이 뻔했다.

운이 나쁘다면 온갖 심문을 겪고 이때까지 일어났던 마물 습격들이 전부 나랑 교황청이 짜고 친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겠지.

그러면 나는 로마냐로 돌아가 아버지와 체시아레의 또 다른 도구로 쓰이든 브리타냐에서 기밀 마물 사냥용 도구로 쓰이다 필요가 끝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하든…….

번쩍, 하고 벼락이 치듯 날아온 서슬 퍼런 검기가 막 나를 붙들려는 그리핀을 강타했다.

그리핀이 비명을 뿜으며 저만치 튕겨 나가 나무둥치 아래에 처박혔다.

포포가 펄쩍 뛰어올랐다. 안 돼!

“하지…….”

바로 그때 쿵, 하고 땅이 요란하게 지진을 일으켰다.

그 격한 충격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주저앉고 말았다.

지진이 다 가라앉기까지 일시적으로 모든 일대가 넋이 빠져버린 듯했다.

나는 손등으로 흐릿한 눈을 문질렀다. 바로 코앞에 못돼먹은 용 새끼가 보였다.

그랬다. 격노한 용은 내 바로 앞에 땅을 딛고 착지해 있었다.

잠시 어색하고 멋쩍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놈은 살벌하게 번득이는 눈으로 눈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나 싶더니, 이윽고 긴 목을 모로 꼬며 내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지가 다시 한번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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