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36)

* * *

“와아, 풍년이네.”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잠시 멎은 틈을 타 협곡 아래로 내려오자 헤이즐넛 나무와 산딸기 덤불이 널린 숲이 나왔다.

나와 포포가 열심히 열매들을 채집하는 동안 그리핀은 수풀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으로 가져온 고깃덩어리를 뜯었다.

“저거 봐, 쟤들은 누구지?”

“포, 포, 포.”

“네 친구들이니? 안녕?”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나무 뒤에서 수줍게 기웃거리고 있던 조끄만…… 너구리 괴물 꼬마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것들이 팔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며칠 이곳에서 머물면서 내 담도 커지긴 커진 모양이다.

신발을 잃어버려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그래도 수풀 속에서 갑자기 대왕 사과를 문 바실리스크가 튀어나왔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참고로 그 사과는 매우 맛있었다.

포포와 그리핀은 잠깐씩 사라질 때를 제외하고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고, 다른 마물들 또한 번갈아 나타나 우리 주변을 알짱거렸다.

우습지만 마치 마물들끼리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온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포포가 특이하거나 내가 특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던 가설은 후자로 기정사실화되었다.

원작의 루드베키아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던 것인지, 혹은 다른 세계에서 온 내 영혼이 들어오면서 뭔가 발생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단 지금까지 본 바로는 위험하다 알려진 마물들이 내게 더없이 유순하게 군다는 것이었고, 나 또한 어떠한 위협이나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비록 포포는 자기가 사람을 꿀꺽하는 모습을 내가 보고 겁에 질렸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나는 그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으니 못 본 것으로 서로 타협했다.

끔찍하다거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포포는 엄연히 마물이었고, 그들은 불법으로 마물들을 사냥해 파는 밀렵꾼들이었다.

야생의 맹수들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인간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포포가 두 남자를 모조리 꿀꺽하는 동안 그냥 외면했다.

남은 여자는 졸도해 버렸는데 그리핀이 데리고 나간 다음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리핀이 자비를 베풀었다 해도 마물이 득실거리는 이 수해를 혼자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얼른 다 따고 동굴로 돌아가자. 곧 다시 비가 내릴 것 같아.”

“포.”

포포는 몸을 앞뒤로 흔들었으나 그리핀은 팽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자신에게 있어 한낱 비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물론 내가 빨리 다시 동굴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밀렵꾼들이 죽기 전에 했던 말들 때문이었다.

주변에 팔라딘이 쫙 깔려 있다던가, 그들이라 해도 이 동굴까지는 안 올 거라던가……. 도마뱀 새끼 어쩌고는 드레이크라도 산다는 뜻일까?

나를 찾고 있는 걸까도 싶었으나 바보 같은 생각일 뿐이었다.

아무리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북부라 해도 나 하나를 찾으러 마굴 지대를 들쑤실 리가 없었다.

만약 귀부인이 마물에 의해 납치되었다면 십중팔구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하니까.

거기다 내가 없어졌다고 하자마자 다들 내심 얼씨구 지화자 했을 테고…… 쳇. 교황청 눈치 봐서 며칠 좀 찾는 시늉 하다 말겠지.

아마 남편 놈도…….

그래, 그놈은 원래 한결같이 야박한 놈이니까…….

“포, 포.”

폴짝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포포가 파닥거리는 양팔을 뻗어 내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내가 또 어두운 표정이 되었나 보다. 착한 녀석.

휴, 나 그냥 여기서 마물들이랑 같이 꼭꼭 숨어 살까. 어차피 돌아가 봤자 또 오해받고 혼나기만 할 텐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리 도망친다는 계획은 가당치도 않았다.

인권 개념도 없고 치안도 인외마경 수준인 이 세계에서 내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들고 도망쳐 봤자 암흑가와 현상금 사냥꾼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나마 신분을 감추고 안전히 숨어 지낼 만한 장소는 수도원뿐이었으나, 체시아레는 전 세계의 수도원들을 샅샅이 뒤져서 나를 찾아내고 말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포포 등과 숨어 사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여기에도 위험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모든 종류의 마물들을 만나본 것도 아닌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밀렵꾼들과 팔라딘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필사적으로 숨어 지내야 하겠지.

목격자가 하나둘 늘어나고 나면 난 아마 마수들을 부리는 마녀로 낙인이 찍힐 것이고, 머지않아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시작…… 젠장, 이러든 저러든 서바이벌 찍어야 하는 건 다를 바 없구나.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람.

“푸르릉…….”

내가 그렇게 여자 타잔이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새 말 갈비를 다 뜯고 기세 좋게 트림을 하던 그리핀이 대뜸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포포 역시 폴짝 나를 지나쳐 그리핀의 옆으로 다가섰다.

뭐지, 설마 또 밀렵꾼이 나타난 건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저만치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다각…… 분명 말발굽 소리 같았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안개 낀 숲길 너머로 대여섯쯤 되는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순간 그들이 팔라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팔라딘이 아니었다.

저놈들은 듀라한이었다.

“푸르르르릉…….”

그리핀이 뭔가 말을 하듯 위협스러운 으르렁거림을 흘려보냈다.

반면에 포포는 꼼짝도 않고 얼어 있었다.

밀렵꾼들이 나타났을 때 가만히 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맞다. 포포는 듀라한을 무서워했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포포는 듀라한이 가까이 오자 나를 데리고 숨었다.

성유물로 무장한 인간 남자도 대수롭지 않게 꿀꺽해 버리는 녀석이 어째서 듀라한을 겁내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반면에 말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그리핀은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경계하고 있는 태세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저 둘, 여태 바실리스크나 만티코어가 주변에 알짱거려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듀라한만은 뭔가 다른 걸까? 기사 모습을 해서 그런가?

포포랑 그리핀의 새삼스러운 반응에 나 역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혹시 몰라 들고 있던 나뭇잎 바구니를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는 찰나, 선두에 선 듀라한이 냅다 이쪽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풀썩, 하고 투구를 쓴 머리통이 발치에 착지했다.

나는 기겁했다. 소름이 끼치면서도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으나 아무튼 기겁했다.

“끼야악!”

다음으로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폴짝 점프해 다가온 포포가 나를 집어 듦과 동시에 그리핀이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더니만 앞발 두 개로 포포의 귀를 움켜쥐고 그대로 고공 질주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넋이 허공으로 날아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짜 독수리 발톱에 꿰인 병아리 신세 아니야!

물론 듀라한들도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지 않았다.

공포를 억누르며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니, 놈들은 말을 달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 미끄러져 질주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말들이 내뿜는 음산한 울음소리가 등골에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저것들은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으아아아……!”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는 다시 그 동굴 입구로 들어왔다.

그리핀은 말 그대로 흐르듯 비행하며 포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곧이어 포포는 나를 한 팔에 낀 채로 무작정 안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렇게 꼬불꼬불하게 경사진 동굴 길을 쭉쭉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 그리핀은 휘파람 소리 비슷한 울음을 뿜으며 앞장서 날아갔다.

마침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경사가 멈추고 무슨 돌 더미 같은 것으로 가득 찬 어두컴컴한 공간에 이르러서야 다들 전력 질주를 멈추었다.

포포가 나를 살포시 놓아주었다. 나는 잠시 돌 더미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혼미한 정신을 추슬렀다.

아이고, 내 정신아. 눈알이 핑핑 도는 느낌이다.

침묵이 내렸다. 한참을 숨을 잔뜩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나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들이 추격을 멈춘 걸까?

“쿠, 쿠쿠쿠쿠…….”

내 옆에 내려앉아 형광불처럼 밝게 빛나는 녹색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던 그리핀이 대뜸 부리를 반쯤 열고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왠지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쿠쿠쿠쿠…….”

“푸흡…….”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가며 숨죽여 웃다가 급기야 녀석을 따라 키득거렸다.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포, 포, 포, 포!”

심지어 포포는 우리 중 가장 즐거워 보였다.

팔을 파닥거리며 돌 더미 속에 몸을 파묻을 기세로 마구 뒹구는 모습이 캣닢을 만난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엄청 기분 좋아 보인다. 돌 더미를 좋아하는 건가?

“포, 포, 포!”

잘그락잘그락.

기분 좋은 포포가 희미하게 반짝이는 조약돌을 허공에 흩뿌렸다.

희한하네. 무슨 돌들이 저렇게 반짝거리지?

“푸르릉…….”

나는 별생각 없이 몸 아래 돌을 하나 집어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리핀의 빛나는 눈을 불빛 삼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살펴보았다.

녀석 또한 돌 더미를 모래 삼아 목욕하는 중이라 좀 번거로웠지만.

“……루비야?”

그리핀이 행복하게 부리를 딱딱거렸다.

이거 진짜 루비 같잖아? 내 애칭 말고 진짜 보석 루비!

다른 돌들도 주워다 살펴보았다. 어떤 건 루비처럼 선명한 붉은색, 어떤 건 사파이어, 요건 에메랄드, 저건 다이아…… 아무리 봐도 유리 따위가 아니라 진짜 보석인데?

그럼 이 돌 더미들이 전부…… 맙소사, 설마 우리가 암굴 속 보물섬을 발견한 것인가?

“포, 포, 포, 포!”

“푸르릉 푸르릉.”

“와…….”

나는 턱을 힘없이 떨어뜨린 채 보물 속에서 뒹굴고 있는 두 마물을 멀거니 응시했다.

유난히 반짝이는 보석에 환장하는 마물이 있다고는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그냥 전부 다 환장하는 것 같다.

혹시 이 둘이 여길 아지트 삼아 꾸준히 보석을 감춰온 걸까?

너 너희, 이제 보니까 대부호였구나!

워낙 어두워서 자세히 파악하긴 어려웠으나 대충 눈어림으로 짐작건대 이 공간은 굉장히 큰 것 같았다.

그리고 보석 산은 보이지 않는 벽 끝의 끝까지 꽉 메워져 있었다.

이게 전부 보석들이라면 포포랑 그리핀은 내 아버지보다 더 부자일 터였다.

“우와아아…….”

보석 산에 파묻힌 기분을 아는가?

나는 잠시 인간으로서의 체면과 품위는 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또 언제 보석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보겠는가!

“야, 너희 진짜 대단해! 멋져! 최고야!”

우리가 보석들이 튕기는 감촉에 몸 둘 바 몰라 하며 한참 그렇게 어린애들처럼 놀던 와중이었다.

제일 굴곡진 부분을 따라 썰매를 타듯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간 나는 발 앞에 딱 자리한 유독 커다란 보석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나도 모르는 보석인가?

그건 내 주먹보다 더 커보였다.

게다가 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밝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구체에 가까운 모양이었는데, 중앙 부분에 뭔가 특이한 얼룩이…….

황금 보석이 서서히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아니, 그것이 파묻힌 보석 언덕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었다.

언덕이 점점 더 높아짐에 따라 무수한 보석들이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단 황금 보석만은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보석이 아니라 눈이라는 것을, 내가 만나본 적도 만나기를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최상위 마물의 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이나 더 걸렸다.

사람이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난 현상과 마주하게 되면, 감히 대적하거나, 또는 거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면 그냥 가만히 있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로마냐를 떠나기 전 참고삼아 읽은 책자가 떠올랐다.

전생의 대중매체에서 접한 지성적이고 오만하며 신격화된 모습들과 달리, 이 세계에선 사탄의 하수라는 낙인 덕에 멸종 위기에 처한 마물계 최상위 포식자에 가까웠다.

북부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것도 십수 년 전이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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