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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점점 어둑하게 물드나 싶더니 기어이 거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하게 솟은 서리나무들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스케 경.”
누군가가 잎담배를 내밀었다.
이스케는 거절의 표시로 머리를 가로저으며 발치에 널브러진 듀라한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잡은 놈이었다.
전부 소멸하고 남은 마정석과 잘린 머리만이 발치에 굴러다녔다.
이것들은 어째서 매번 머리만 남을까.
은빛 머리카락이 금방 젖어 들었다.
그는 자꾸 시야를 방해하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흘 내리 걸친 수색 작업에 다들 지친 기색이 현저했으나 어느 놈 하나 주둥이를 나불대지 않으니 신기한 현상이었다.
“이 주변도 꽝인 것 같다.”
듀라한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며 다가온 아이반이 무겁게 중얼거린 소리였다.
이스케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흘 내내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있잖냐, 이스.”
평상시 아이반이 이스케를 애칭으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주 간절한 상황이거나 지가 뭔가 아쉬울 때를 제외하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했기에 이스케는 등을 돌려버렸다.
친구 놈의 우람한 등짝을 노려보며 아이반은 탄식을 짓씹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사흘째 서리숲 일대를 뒤지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귀부인이 실종된 사건에 마굴들이 득실거리는 이 장소부터 수색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으나, 이 근방에서 실종된 공자비의 신발이 발견된 이후 도시경비대와 롱기누스 기사단, 원탁 형제단 등 에렌딜의 총력이 이쪽으로 집중된 상황이었다.
툭하면 알력다툼에 환장한 놈들끼리 모처럼 군소리 없이 사이좋게 협동하고 있는 건 좋은 현상이었으나 여태껏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쯤에서 공자비를 납치한 미친놈이 일부러 신발 한 짝을 이쪽에 던져둠으로써 도시 전체의 삽질을 야기했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그쪽이 더 희망적이었다.
만일 루드베키아가 정말로 이 일대로 끌려 들어갔다면, 지금쯤…….
다들 그 말을 할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스.”
이스케는 돌아보는 대신 저만치 날아간 듀라한의 머리를 게슴츠레 응시했다.
왜 자꾸만 저것에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이스, 벌써 사흘째인데 말이야…….”
“나흘째다.”
“엉?”
“나흘째라고.”
침묵이 흘렀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속에서 아이반은 그만 고개를 맥없이 떨구었다.
갑자기 참담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을 한 이스케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발을 발견한 거야 사흘 전 새벽 무렵이었으나, 루드베키아가 사라진 건 나흘 전 오전 무렵이었다.
그것도 한참 나중에야 알아낸 일이었다.
엘레니아가 이스케에게 전언을 보냈을 때는 이미 한나절이 지난 뒤였다.
즉, 그때까지 누구도 루드베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한번 움직이는 일에도 많은 인력을 요구하는 귀부인의 실종을 한나절 가까이 누구도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누구를 족쳐야 하는가.
애초에 초청을 한 신전? 종일 그냥 죽치고 있다 그냥 멋대로 돌아온 마부와 호위기사?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도 가만히 있던 호위기사들과 가신들? 종일 왕궁에 있던 공작?
종일 프레이야의 병문안을 하다 저녁 무렵 귀가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엘레니아?
아니면 그 자신?
이스케는 빗물이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결국 탓해야 할 대상은 그 자신뿐이었다.
엘레니아는 전부 자기 탓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결코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가 없을 때 루드베키아가 집안에서 무슨 취급을 받고 있는지 몰랐던 우매함이 칼이 되어 돌아왔다.
오메르타 성의 가신들은 대다수가 오래되고 충성스러운 이들이었다.
특히 하녀장은 엘레니아에게 모성에 가까운 맹목성을 보였다.
그런 그들이 침입자로 낙점한 대상에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의 생일 연회 날 벌어진 일의 내막이 밝혀졌을 때 하녀장은 죽여주십사 조아렸고, 엘레니아는 하녀장을 감쌌다.
그때 그는 어찌 됐든 자신이 그 모든 것의 근원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루드베키아가 이곳에 온 첫날부터 확실히 해주지 못했으면 뒤늦게라도 다시 기강을 잡아줬어야 했는데.
그들 남매 모두 어리석게도 그냥 나아질 거라고만 생각했다.
잘린 듀라한의 머리가 그를 향해 비웃음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은 마물한테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제 아비와 똑같은 놈이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용을 쓰며 결혼을 거부했다고 변명해 봤자 우스운 자기기만일 뿐.
어둑한 눈망울이 다시 아른거렸다.
정확히는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어둡게 물든 눈동자와 파리한 얼굴이.
단 한 번도 그런 눈을 한 적이 없던 루드베키아였다.
궁중 연회장에서 버림받았을 때도,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열이 펄펄 끓을 때도, 그 마구간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며 눈물을 찔끔거렸을 때도, 집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며 애원했을 때도, 초야 의식을 치르다 그만두었을 때도…….
잘린 머리의 입이 움직이며 기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물론 착각일 뿐이었다.
이스케는 그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환각까지 보이는 건가? 거의 7일 가까이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반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동료들이 하나같이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도 알았다.
루드베키아가 이 숲 일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럼에도 이스케는 삽질을 멈추자고 할 수가 없었다.
실낱만도 못한 가능성임에도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첫날밤 안방에 침입한 스펙터.
앙그반 궁전의 실로안 연못에 등장한 페시보트.
승마 모임에서 말을 타다 실종됐던 것.
그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왔던 것.
세르게이가 했던 증언-굳이 교황의 여식이 아니라 해도 일반인에 비해 고유 신성 코어가 상당히 옅다고 했던 것.
다른 감정들에 취해 미처 제대로 들여다볼 여지가 없었던 일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감이라고 할까, 이상한 촉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으나 그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너무도 일찍 가버린 어머니가.
이젠 얼굴조차 희미한 모친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만일 이대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면, 영영 찾지 못하게 된다면, 그 눈물도 미소도 반짝이는 머리카락도 이대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면, 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수한 잔상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늘 풍성한 드레스 속에 감춰져 있던 앙상하게 마른 몸. 등에 새겨진 흉터. 언제나 눈치를 보느라 또륵거리는 푸른 눈. 맑은 하늘처럼 푸르렀던 눈…… 그 모든 걸 안고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항상 웃었다.
몸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제에 늘 바보처럼 방긋거리던 여자였다.
미처 묻지 못했던 말들.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의 속뜻이 무엇이었는지 진작 말해줬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너무 상관하고 싶어서 되레 외면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스케 경.”
검붉은 머리의 팔라딘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종자 동생 놈과는 딴판으로 통 입을 여는 모습 보기 힘든 녀석이 웬일로 먼저 말을 거나 싶어 이스케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C구역 쪽에서 수상한 여자를 발견했다. 꼬락서니 보니까 밀렵꾼인 듯한데…….”
“밀렵꾼이 이 시즌에 여길 돌아다닌다고?”
“기절해 있었다. 동료들이 버리고 간 건지 뭔지, 알게 뭐냐. 아무튼 깨워서 정신 좀 차리게 했더니 이상한 헛소리를 해댄다.”
“헛소리라니.”
“난 모르겠다. 횡설수설하는데 좀 이상해. 커다란 너구리를 보았다느니, 너구리 귀신이 동료들을 먹었다느니, 그리핀이 금발 마녀랑 놀고 있었다느니…… 네가 한번 볼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