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36)

* * *

찹, 찹, 찹, 찹.

귓가를 간질이는 정체 모를 소음과 함께 다시 눈을 떴다.

축축한 흙냄새와 정체 모를 피비린내 같은 것이 뒤섞여 코를 찔러왔다.

반사적으로 무거운 머리를 소리가 들려오는 왼편으로 돌리던 나는 이윽고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헉!”

화들짝 상체를 일으키는 나를 거대 새가 힐끔 돌아보았다.

아니, 새라고 하기도 뭣한 녀석이었는데, 얼굴을 포함해서 반쯤 접힌 날개와 앞발 두 개까지는 분명 맹금류의 그것처럼 생긴 모습이었으나 뒷다리를 포함한 하반신은 생판 다른 동물의 모양이었다.

심지어 분명 꽁지여야 할 부분에는 표범 무늬가 선명한 긴 줄이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꼬리인 듯했다.

마치 독수리와 표범을 반씩 잘라서 붙여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다. 게다가 대체 뭘 먹고 있는 거야?

딱 그리핀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마수는 어딘가 근엄하게 느껴지는 녹색 눈으로 얼어 있는 나를 잠시 빤히 응시하더니, 다시 태연하게 식사에 매진했다.

보아하니 죽은 말을 뜯어먹고 있는 듯했다.

그 끔찍한 풍경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불쌍한 말을 향한 묵념을 올렸다.

분명 포포가 나를 안아 든 다음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포포는 어디로 가고 흉포하기로는 만티코어와 버금간다는 그리핀이 나타나 나를 감시 중인가?

설마 저게 포포의 본모습이라든가 하는 반전은 아니겠지?

포포는 말고기보단 사람 고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무슨 동굴 같은 장소인 듯했다.

높은 천장에 보석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드름들이 쓸데없이 예술적인 느낌이었다.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에 자리한 입구가 보였다.

“푸릉.”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식사에 매진 중이던 그리핀이 한쪽 앞발을 구르며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히익.

잠시 고요가 흘렀다.

내가 무슨 말을 걸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리핀인지 뭔지 모를 마수는 퍽 위협적으로 보이는 대왕 부리로 무언가를 물고는 내게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것을 내 무릎 위로 툭 떨구는 것이었다.

“흐읏!”

그건 다름 아닌 뜯겨 나간 말의 허벅다리 부분이었다.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포, 포, 포, 포…….”

“포, 포포야!”

입구 쪽에서 울리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에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포포야, 어디 갔다 왔어!

우리의 포포는 양팔에 거대한 나뭇잎에 싸인 무언가를 한가득 안은 모습으로 폴짝폴짝 이쪽으로 다가왔다가, 내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왜 그러나 싶어 다시 말을 붙이려는데 포포가 그리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좀 묘한 분위기가 스쳐 갔다. 순전히 내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포포는 왠지 질책하는 듯한 기색으로 그리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핀은 마치 콧방귀를 끼듯 팽 하는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어어?

이윽고 포포는 내 무릎에 아무렇게나 놓인 말 다리를 친히 집어 들더니 그리핀을 향해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철썩!

음식으로 날갯죽지를 얻어맞은 그리핀이 포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푸르릉…….”

“포, 포.”

“푸릉.”

“포.”

……저들끼리 뭐라고 하는 건지 좀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설마 여기서 둘이 막 싸우는 건 아니겠지?

“저, 저기…….”

조심스럽게 속삭이자 두 녀석 모두 서로를 쏘아보다 말고 기다렸다는 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마땅한 상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공포감도 일지 않았다.

“싸우지 마…….”

누가 나를 본다면 아마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어쩐 건지, 먼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그리핀이 다시 식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포는 짧은 다리를 뒤뚱거리며 내 앞에 마주 앉아 고이 안고 있던 것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왕 나뭇잎 접시에 한가득 담긴 검푸른 열매들을 바라보았다.

포포는 어느덧 무시무시한 이빨들을 초승달 모양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이건…… 블루베리야?”

“포.”

“나 먹으라고?”

“포.”

그렇군. 나 먹으라고 블루베리를 따온 거로군.

저 외모로 열심히 블루베리를 채집하는 모습이라니 잘 상상이 가질 않지만…….

“고마워.”

기껏 가져와 줬는데 안 먹으면 실망하겠지.

그런 생각에 나는 동글동글한 베리들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약간 떫으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덧 그리핀은 말고기 도륙하는 짓을 그만두고 네 다리를 모두 접은 채 앉아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디저트가 필요한 건가 싶어 블루베리 몇 알을 슬쩍 내밀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포포랑 그리핀과 함께 앉아 블루베리를 절반이나 혼자 해치우는데 평소처럼 섭식에 대한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그저 달큼한 맛이 기분 좋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례행사 증세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포포가 뭔가 한 걸까? 아니면…….

……가만. 나 근데 마지막에 코피 터지지 않았었나?

“저기, 얘들아.”

“포?”

“푸릉.”

“호,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어 있니?”

쓸데없는 허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코피가 대충 말라붙은 내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니 갑자기 자괴감이 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포포와 그리핀은 잠깐 뜻 모를 시선을 교환하나 싶더니 이내 동시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포포는 몸뚱이를 좌우로 흔들었고 그리핀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정말?

“포, 포, 포, 포.”

포포가 빠르게 양팔을 퍼덕거렸다. 가만 보니까 무슨 의미가 있는 동작 같았다.

저건 마치. 세수하는 동작인가?

“내가 세수했어?”

“포, 포.”

“네가 세수시켜 준 거니?”

“포.”

“그렇구나. 고마워.”

바로 그때였다.

다시 콧방귀를 끼듯 팽 하는 소리를 내던 그리핀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포포 역시 활짝 이를 드러내다 말고 멈칫하며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이야, X발 진짜야, 진짜. 이거 진짜 통하는구먼?”

“모처럼 풍작이다. 어디 보자, 와, 저거 그리핀 아니냐?”

“우리도 그리핀을 다 잡아보네. 근데 앞에 저건 또 뭐야?”

성마르게 들려오는 소음은 분명 사람의 말소리였다.

귀에 거슬리는 거칠고 호들갑스러운 음성들.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감각이 확 곤두서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야…… 잠깐, 저 구석에 있는 거 여자 아니야? 사람 여자?”

“멍청아, 밴시가 변신한 거겠지. 아, 근데 밴시 보면 재수 없다던데…….”

“그건 그년이 울 때 누가 죽는다는 거고, 병신아. 마물 주제에 존나 예쁜 척 흉내 내고 있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적휘적 동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잔뜩 흥분 어린 기색으로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하나같이 굉장히 수상쩍은 느낌에, 괴상한 모양의 장비들로 잔뜩 무장한 상태였고, 포포와 그리핀의 모습에 겁을 먹기는커녕 멋진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신나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감이 왔다. 아마 밀렵꾼들인 것 같았다.

암시장에 도는 성유물들을 구입해 불법으로 마물들을 사냥하여 마정석 등을 채집해서 파는 밀렵꾼들에 대해선 들어본 바 있었다.

근처 숲을 떠돌다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마기를 감지하고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듯했다.

“야, 아깝다. 원래는 더럽게 추한 늙은 마녀라더니 저런 미인으로…….”

“빨리 해치우고 가자고. 아까 보니까 뭔 일인지 사방에 팔라딘들 쫙 깔렸던데, 걸리면 우리 진짜 X된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의 숨도 쉬지 않았다. 포포도 그리핀도 이상하리만치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연푸르게 빛나는 작살을 꼬나쥔 남자가 신기하다는 듯 포포 앞으로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포포는 어느덧 입을 꽉 다문 채 이를 감추고 있었다.

“그 새끼들도 여긴 안 올걸? 대왕 도마뱀 새끼가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X발, 근데 얜 진짜 뭐냐? 토끼야 너구리야? 이거 이름이 뭐였지? 존나 맹하게 생겼어.”

“야, 일단 저년부터 잡아. 마물 년이 감히 인간 흉내를 내고 있잖아.”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여자가 내 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포포의 통통한 배를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던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나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쿠, 쿠쿠쿠…….”

그리핀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정확히는 낮고 기괴한 울음에 가까웠지만, 내 귀에는 왠지 비웃음처럼 들렸다.

그리고…… 포포가 입을 벌렸다.

쩌저적 벌어지는 입이 거대한 몸통 전체로 확장하며 소름 끼치는 크고 아름다운 이빨들과 유골들이 한가득 처박힌 목구멍을 드러냈다.

나는 끝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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