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것 좀 보게, 동료여.”
“거울은 또 어디서 났…….”
“거울이 아니다. 네 흉악한 상판대기지. 얼마나 추한지 감이 오냐? 우리 눈이 얼마나 괴로울지 감이 와? 양심이 있으면 이만 집구석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시지 그래?”
와장창!
바닥으로 힘없이 내동댕이쳐진 거울이 박살이 났다.
아이반은 혀를 찼다.
“이 양심도 없는 새끼가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걱정해 달라고 한 적 없다.”
“79시간 내내 눈 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는 게 걱정해 달라는 시위 아니면 뭐냐 관심병 새끼야.”
79시간? 이스케는 그만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두통이 인다 싶었다.
“벌써 그렇게 지났나.”
“왜,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냐?”
“그건 아닌데 머리가 약간 아프군.”
“너 그러다 갑자기 팩 쓰러져 뒈져도 난 모른다. 난 분명 경고했어.”
잠 좀 못 잤다고 해서 팔라딘이 죽지는 않았다. 종자 시절에는 닷새 내리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그때 같이 굴렀던 새끼가 새삼 왜 지랄인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이런다고 사라진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냐? 이건 우리 관할 밖이라고. 이쯤에서 그냥 도시경비대가 알아서 하라고 놔둬. 수배자 찾는 짓은 우리보단 걔들이 더 잘해. 엘렌이 설명한 대로 몽타주도 쫙 뿌렸으니…….”
“정말로 사라졌으려나.”
“뭐? 그건 또 뭔 소리야?”
이스케는 설명을 하는 대신 방금 지나온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힐끔 돌아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네 기분 몰라서 이러는 거 같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레이야가 당한 일이니 열 뻗치는 건 알겠는데, 우리가 불법 길드까지 들쑤시고 다닌 거 단장님이 아시면…….”
“별로 열 뻗친 거 아닌데.”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럼 왜 이 지랄인 건데?”
79시간이라는 소리를 괜히 들었다.
머리가 자꾸만 아파 왔다.
이스케는 엄지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도랑을 헤엄쳐 지나가는 쥐새끼를 노려보았다.
프레이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하얗게 웃던 얼굴이.
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줘서 기뻤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뭐가 그리 기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솔직하게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가 각혈한 순간 마기를 감지한 그가 정말로 누구에게 달려갔던 건지.
“나도 모르겠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새끼야.”
“…….”
“후, 답답한 새끼. 너 지금 네 아내 때문에 이 지랄인 거 아니야?”
아내. 아내라. 이스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른거리는 잔상이 자꾸만 눈에 밟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둑한 눈동자가. 해사한 빛이 꺼진 푸른 눈망울이.
루드베키아는 조금만 거친 동작에도 겁먹은 새끼 고양이처럼 움찔거리곤 했다.
그녀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매사 눈치를 살피며 연푸른 눈을 또르르 굴리는 모양이 훤했다.
그리고 이스케는 살아생전 한 번도 행동거지를 조심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국왕의 면전에서조차.
그랬던 그였으니 누구 앞에서 스스로의 몸짓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짜증스럽고 피곤한 일인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곡석의 부름에 홀린 마물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했다.
성화와 신성의 위협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맛이 가버린다.
만약 운이 나빠서 그날 몰려온 만티코어들이 신전 담을 넘었다면, 프레이야의 피가 조금이라도 튀었다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면 이해할 거라고.
그런 거친 행동은, 그렇게 밀쳐버린 짓은 불가결한 상황이었다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런데 왜 자꾸만 그 어둑한 눈동자가 눈에 밟히는가.
“이건 삽질이다.”
“드디어 깨달은 거냐? 마침내 정신 좀 들었어? 와, 그럼 어서…….”
“지금쯤 어느 술 창고에 썩은 시체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까부터 짜증 나는 네 개소리의 요는 신전이 의심스럽다는 건데 뭐 그건 나도 동의한다. 마곡석 출처도 그렇고 시종 하나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수상쩍지. 한데 말이다, 이스케.”
“왜.”
“그 많은 독실한 양반 중에 교황 발바닥이라도 핥을 놈이 있다는 걸 누가 모르냐. 그런 의심을 하고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어차피 다들 네 처가댁이 배후라고 의심하고 있는데 차라리…….”
“신성하신 처가댁이 굳이 마곡석을 이용해서 브리타냐의 기수 가문 여식을 독살하려 한다고. 신박하네.”
“뭐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한데……. 그럼 넌 네 처가는 아예 용의 선상에서 배제 중인 거냐?”
“이상한 질문이군. 애초에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칼 같은 대꾸였다. 위화감이 일 정도로 칼 같았다.
다시금 피어오르는 출처 모를 기묘한 위화감에 아이반은 이스케의 무감한 옆태를 빤히 응시했다가, 곧 퍼뜩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 X발, 너 혹시…….”
“아무튼 조금 전 확인했다시피 마곡석이야 암거래 시장에서 얼마든지 판을 치니 신전만 의심하는 것도 불공평하다. 일부러 그쪽에 의혹을 돌리려고 마곡석을 사용한 걸 수도 있고, 퓨리아나 후작이나 프레이야 본인이 누구한테 원수진 게 있는지 알아보고 나면…….”
“야.”
“또 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이스케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가는 눈가에 온통 그늘이 졌다.
잠 못 잔 괴수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기에 아이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였냐?”
“뭐?”
“네가 79시간 내내 범인 새끼 찾아내려고 염병 떤 이유. 그거였어?”
침묵이 내렸다.
뜬금없이 따지고 든 아이반도 말이 끊긴 이스케도 한참 묵묵히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거가 뭔데.”
“내 생각의 반대.”
“네 생각은 뭔데.”
“네가 네 마누라한테 의심이 드는 바람에 반쯤 맛이 간 상태라는 생각.”
“…….”
“너, 만약 그 범인 새끼 찾아냈는데, 그 새끼가 네 아내나 처가랑 관련이 있다고 분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이스케는 대꾸 없이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침내 좁은 길목이 끝나고 모자이크 장식이 박힌 탁 트인 광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래, 그런 거였다. 아이반은 그제야 여태껏 내내 느껴온 기묘한 위화감의 근원을 깨달았다.
저 새끼는 애초에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지금껏 도시를 이 잡듯 뒤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놈이 이스케에게 잡힌다면, 그리고 사주한 인물이 에렌딜의 어느 귀족이라고 분다면 운 좋게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일 신전이나, 로마냐 쪽과 관련이 있다면…….
아마 흔적도 찾기 어려워지리라.
“너 혹시 네 아내가…….”
“상관없어.”
“뭐?”
“상관없다고.”
상관없단다. 제 아내를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상관이 없다는 거였다.
설령 그녀가 관여한 일이라 해도, 설령 친정의 지령에 따라 관여했다 해도, 혹은 정말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어느 쪽이든 똑같이 상관없다고.
차후 증거가 될 만한 인간을 미리 제거해 버리는 수를 써서라도 철저하게…….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아이반은 낯선 물결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는 루드베키아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가문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오랜 악우 놈이 요즘 들어 루드베키아 주변에선 생판 다른 놈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었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프레이야가 죽을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토록 싫어했던 여자를 보호하겠답시고…….
“왜 그렇게까지…….”
“젠장, 나도 몰라 인마. 그만 떠들어.”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이스케는 자꾸만 시야 한구석에 아른거리는 잔상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광장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들이 천천히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어, 이스케.”
“또 왜. 그만 떠들라니…….”
“내가 실은, 그러니까 우리가 실은 너한테 숨기고 있던 게 있다.”
“뭔데.”
“그때, 네가 프레이야 안고 뛰어들어간 다음 말이야. 그때, 씨발, 로렌초 새끼가…….”
로렌초가 뭐? 묘하게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에 이스케는 아이반을 정면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스케 경!”
종자 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새 무슨 사고라도 쳤는지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기색이라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스케 경, 아까, 헥, 엘레니아 공녀님의, 전언이 도착했는데 말입니다…….”
“엘렌이? 무슨 일로?”
앤디미온이 잠시 연거푸 거칠게 호흡을 고르는 동안 두 기사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급기야 도화선을 다 태운 아이반이 버럭 하려는 찰나 마침내 앤디미온이 커다랗게, 통탄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공자비께서 실종되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