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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무진장 복잡해진 탓인지 그대로 밤을 꼴딱 지새워 버렸다.
모처럼 엘레니아랑 단둘이 조반을 들게 되었으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대충 음식을 깨작거리고 식사를 물렸다.
연례행사 때문에 평소보다 더 먹기 힘들었다.
내가 자리를 뜨기 직전에 엘레니아가 지나가는 듯한 투로 신전에서 방문을 요청했다고 일러주었다.
어차피 오늘은 좀 움직여볼까 생각 중이었던 고로 나는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연례행사와 수면 부족이 겹친 얼굴이 퍽 볼썽사나웠으나 화장으로 가리니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수상쩍은 대주교 양반이 무슨 심보로 날 보자는 건지 몰라도 아마 축일 사건이랑 관련된 거겠지.
만약 사건의 배후가 진짜 체시아레 놈이라면 이거 대주교가 스파이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하지만 귀한 질녀한테 그런 위해를 가하는 짓에 순순히 동의했을까?
모르겠다, 일단 보고 나면 알겠지.
비몽사몽한 정신을 추스르며 신전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뒤 드래곤의 아가리처럼 흉물스럽게 장식된 정문을 걸어 들어가는데 문득 슬그머니 유혹이 일었다.
갑자기 신전 연무장 쪽을 한번 슬쩍 보고 오고 싶어졌어.
남편 놈이 오늘 거기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암, 일단 놈을 보고 반응을 알던가 해야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것 아닌가.
쳇, 주말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치고 말이야, 도도한 새끼.
정신이 없다 해도 뭐라 언질이라도 남겨줄 수 있었잖아. 하다못해 난 네가 의심스럽다, 뭐 이런 협박이라도 하든가.
애꿎은 성상들을 노려보며 연무장 쪽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지나던 찰나였다.
화강암 분수가 보이는 계단 쪽으로 빙글 돌던 나는, 다음 순간 화들짝 기둥 뒤로 숨고 말았다.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한 짓이었다. 봤을까? 그새 나를 봤을까?
“……너희 누나 이제 괜찮은 거 아니었냐?”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
휴. 다행히 앤디미온도 로렌초도 나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다.
저 둘의 조합이라니 뜻밖이군. 원래 친한 사이였나?
종자란 것들이 툭하면 신전 근처에서 노닥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너희 일 안 하니?
앤디미온이 여기 있다면 이스케도 여기 있을 가능성이 조금 높아지는데…….
젠장, 로렌초 놈만 없었다면 냉큼 인사하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얌전히 누나 옆에 처박혀 있지 뭐하러 기어 나왔냐? 근신까지 당한 주제에.”
“닥쳐. 너라면 네 누나가 피 토하면서 죽어가는데 눈깔 안 뒤집어지냐?”
“난 누나 없는데. 있다 해도 병신처럼 엉뚱한 사람한테 눈깔 뒤집어지진 않아.”
……왠지 낯설다. 앤디미온의 말투가 원래 저렇게 거칠었나?
게다가 아무래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자니 이윽고 두 녀석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떠들어 대는 듯 거친 음성들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하, 엉뚱한 사람?”
“그때 네 아버지 아니었음 넌 평생 팔라딘 꿈도 못 꾸게 됐을 거란 거 인지는 하고 있냐?”
“내가 너처럼 담이 쥐 X만 한 줄 아냐? 애국심도 없는 새끼야. 씨발 교황 새끼고 뭐고 다 덤벼보라고 해. 그딴 썩어빠진 돼지 새끼들이 감히 북부를 뭐 어쩔 수 있다고.”
“신전 앞마당에서 교황 모독하는 신박한 놈은 처음이네. 주접 그만 떨고 가서 훈련이라도 하면서 망상이나 떨쳐. 그분은 오메르타 공자비야. 그거 잊지 마.”
“너나 착각하지 마, 새끼야. 순진한 체해 봤자 보르히아 족속이라고. 지 오라비랑 붙어먹은 게 무슨 오메르타 공자비야.”
“하아, 이게 진짜…….”
“왜, 몰랐냐? 다음에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뻔뻔한 낯짝을 확…….”
나는 거기까지만 들었다.
더 엿듣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기도 했고 또 더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살벌하다 살벌해. 내 낯짝을 뭐 어쩐다고?
어린 놈의 새끼가 끔찍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내 우리 가문의 악명을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대체 무슨 증거가 있다고 저토록 굳게 나를 범인으로 믿는 거야.
하아, 진범이 누구인지 몰라도 프레이야 말고 저놈한테 콱 먹여버리지.
서럽다, 서러워. 누명 쓴 경험이야 다양하다만 이 세계는 인권 개념 자체가 없어서 그런지 사소한 재앙도 더 크게 느껴진다.
혼미한 정신을 붙들고 아무 방향으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내가 어느덧 신전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마차를 세워둔 곳으로 갈까 신전 안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힘들어. 몸도 힘들고 정신도 힘들다. 연례행사 증세가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
누가 나를 볼지도 몰라 비척비척 걸어가 근처에 보이는 아무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수풀 속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꼭 감자 식은땀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그러고는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면 돼……? 내가 갈 곳이 어디 있지?
아파. 이렇게까지 아픈 적은 없었는데. 몸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이왕 아픈 거 차라리 남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프다고 해봤자 다들 꾀병으로만 알잖아.
아파. 너무 아프다고. 아파 죽겠다고 남편 놈아……. 야박한 새끼야. 나 또 코피 터진 것 같단 말이야.
있잖아.
너 왜 나한테 잘해줬어?
왜 그때 그런 이상한 눈으로 날 봤어? 왜 내가 웃을 때마다 그렇게 힘들어 보였어?
왜 그때 내 흉터를 보고 그런 표정이 됐어?
왜 그렇게 망설였어?
왜 그냥 나를 두고 나가버리지 않았어?
왜 내가 너무 말랐다면서 잔소리하고, 그렇게 꼬박꼬박 같이 식사했어?
왜 내가 아픈 것 같으면 그렇게 당황했어?
그러지 말지 그랬어. 차라리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그렇게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런 멍청한 희망 따위 품지 않았을 거 아니야.
왜 기대하게 만든 거야.
왜 너만은 내가 거쳐온 그 모든 사람하고 다를지도 모른다고 멍청하게 기대하게 만든 거야…….
“포, 포, 포, 포…….”
서서히 귀를 찔러 오는 익숙한 소리에 나는 뒤죽박죽된 의식을 부여잡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 소리는…… 설마?
“포, 포, 포…….”
“……포포니?”
“포, 포…….”
“포포야!”
포포야! 내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이야! 보고 싶었어, 이것아!
그건 정말로 포포였다. 악어 같은 무시무시한 이빨들이 번득이는 거대한 입과 토끼 펭귄 같은 퉁퉁한 몸통이 반갑다는 듯 폴짝폴짝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거참, 생긴 거랑 따로 논다.
“포, 포?”
“포포야, 여기서 뭐 해? 여긴 신전 근처잖아. 너 여기 있으면 위험해.”
“포, 포, 포.”
“혹시 나 찾아서 온 거야?”
포포가 거대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기특한 짜식. 감동의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리고 코피도. 제기랄.
“포포야, 나 아파. 근데 아무도 몰라.”
“포?”
“그래도 너 보니까 좋다.”
맥없이 배시시 웃어 보이자 포포는 잠시 한 쌍의 번득이는 녹색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양팔을 뻗어왔다.
어라?
“포포, 나 데리고 가게?”
“포, 포.”
“하긴, 어차피 나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겠다…….”
“포?”
“있잖아, 나 그냥 차라리 너네랑 숨어서 살까 봐…….”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지면서 몸이 맥없이 축 늘어졌다.
날 꼭 끌어안은 포포의 팔은 온통 미끈거렸으나 그럼에도 포근하고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