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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신전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이라 신관들의 빠른 조치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날 우리에게 와인을 가져다준 인물은 사건 직후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여러 면으로 심상치가 않은 사건이었다.
나도 엘레니아도 앞에 놓인 잔을 마셨으니 처음부터 대놓고 프레이야를 노린 셈이다.
우리 세 명 중 아무나 무작위로 노렸다기엔 잔을 배치한 자리가 너무도 정확했다.
“마곡석 용액이라 하였소.”
“네?”
“퓨리아나 후작의 여식이 마신 독의 정체 말이오. 뭐 짐작 가는 거 없소?”
넌지시 묻는 오메르타 공작의 음성은 차분 냉정 그 자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뻔했지만.
그냥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마곡석 용액이라니.
여기서 마곡석이란 갈판돌 따위가 아니라 죽은 마물의 결정체인 마정석을 성령석과 결합해 마물을 부르는 미끼로 쓰는 물건이었다.
갈라서 인간의 피를 묻히는 방식으로 쓴다고 했었나?
신전 봉쇄까지 간 뜻밖의 난리가 벌어졌던 것이 십분 이해가 갔다.
요점은 마곡석이 팔라딘조차 사용 허가를 받는 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성유물이라는 거였다.
각 신전이 소유한 마곡석의 수량에도 제한이 있었으며 제작 또한 교황청의 허가를 따로 받아야 했다. 그 말인즉슨…….
“신전에서 보관 중인 마곡석은 하나도 빠짐없이 제자리에 있다고 했소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오?”
……사건의 배후자가 다름 아닌 나라는 의혹에 매우 그럴싸한 심증을 더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보시오, 아버님!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는데 이해 안 가는 게 더 이상하겠소!
하, 울고 싶군. 내가 여기 인간이었어도 마땅히 나를 의심할 것 같은 망할 상황이잖아.
로렌초가 이성을 잃고 내게 덤벼들었을 때 퓨리아나 후작이 빠르게 나서서 일단락 지어버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정확히는 우리 가문을-의심 중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보르히아 가문의 암살 내력에 대한 악명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인 데다, 가족들과 함께 엮인 내 악명 또한 쉬이 상쇄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에렌딜 신전의 대주교가 바로 프레이야의 백부인 고로 신전 내부 인물보다는 나를 의심하는 편이 훨씬 지당했다.
이유야 뭐 갖다 붙이게 마련이고.
“아버님께선…….”
“물론 나는 내 며느리를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의혹에 엮는 짓은 용납지 않을 것이오. 부인은 엄연히 오메르타의 가족이니 말이오.”
자르는 톤으로 대답한 공작이 이내 자기가 말하고도 뭐했는지 낮게 헛기침을 했다.
하긴 내 귀로 듣기에도 영 그렇다. 내가 자기들이랑 가족이라니.
“부인이 그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이라 생각되지도 않소. 단지 우리가 알아야 할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오. 아들놈은 나더러 아무 소리 말라고 했지만…….”
우리 가문이랑 관련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참 뭐하게 돌려서 말한다.
나는 내 눈을 꿰뚫듯 응시하는 공작의 시선에 대고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저를 의심하시는 거라면, 전 정말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꼭 말아쥔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잘도 뚝뚝 떨어졌다.
고약한 아버님은 왠지 멍해 보이는 표정이 되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다, 다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저도 알아요. 저도 눈이 달렸고 귀가 있으니까요. 제가. 제가 영애님을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서 투기에 눈이 멀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그런……. 대체 누가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거요? 나는 단지…… 큼, 일단 울지 마시오. 정말로 그런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니.”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젠장, 분명 연기 중인데 왠지 진짜 울음이 나오는 기분이다.
이제 좀 운이 풀리나 싶었는데 이게 웬 뭐 같은 날벼락이야!
나는 공작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애처롭게 훌쩍거렸다.
“마, 만약 이스케 경도 그런 의심을 하고 계신 거라면 저는 차라리…….”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 않소. 우선 부인이 마곡석을 몰래 가지고 있었다면 그놈이 가장 먼저 눈치챘을 거요.”
그건 그랬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
교황 딸내미인 나라면 마곡석을 따로 구할 수가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막연히 단정 짓는 거겠지.
혹은 딴 사람한테 맡겼다거나…… 원통하구먼.
슬쩍 보니 공작은 어느덧 험악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난처한 기색으로 수염을 긁적이고 있었다.
아들내미랑은 딴판이네. 눈물 공세에 당황할 스타일로 보이진 않았는데.
하긴 내가 이 자리에서 그런 부당한 의혹은 못 견디겠다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와버리면 공작 입장에선 뭐 되는 셈이겠지.
그런 식으로 결혼이 취소되는 건 결코 바라지 않는 인물이니까.
희한하군. 알 만큼 아는 분이 왜 굳이 날 찔러본 거지?
날 정말로 의심했다면 차라리 아무 내색하지 않고 몰래 감시하는 편이 훨씬 마땅한데.
물렁하고 하찮아 보이는 내가 누군가의 지령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라도 한 건가?
“괜한 소리를 했군. 내가 한 말은 전부 잊으시오. 워낙 막막한 상황이라 엄한 이를 붙들고 엉뚱한 말을 다 했구려.”
“히끅…… 아, 아버님까지 절 의심하신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아니, 왜 또 그런…… 의심하는 거 절대 아니라고 했잖소. 누구든 그런 허튼소리를 나불대는 놈이 있다면 내 직접 혀를 잘라버릴 거요.”
“히끅, 정말요?”
“물론이오. 내 며느리를 함부로 음해하는 건 오메르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그만 우시오.”
이곳에서 대관절 누가 나를 오메르타와 같은 몸으로 보고 있단 말인가.
나는 여전히 이방인에 불과했다.
꺼림칙하고 불편한, 그렇다고 대놓고 배척하기도 어려워 더 처치 곤란한 이방인.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지내면서 가끔 필요할 때나 거들어주는 게 가장 좋은 존재.
내가 죽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 또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다 해도 그것만큼은 똑같을 것 같다.
혼자 궁리하면서 프레이야의 독살 기도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보았다.
1. 나나 우리 가족과는 아무 관련 없는 어느 미친놈이 저지른 짓이다.
퓨리아나 가문과 신전에 불만을 품은 놈이라든가.
단 마곡석을 어떻게 얻었나? 아마 암시장에서? 불법 성직 매매와 더불어 성물 매매도 판을 치는 세상이니 암시장 루트를 통해서라면 가능하다.
2. 우리 가족이 배후다.
문제는 왜? 게다가 다른 독 놔두고 굳이 의혹이 일 게 뻔한 마곡석을 사용한 이유는?
3. 프레이야가 당한 일에 자연스럽게 내게 의혹이 쏟아졌다.
즉, 그걸 노린 누군가의 만행이다. 아마 날 치워버리고 싶은 누군가가?
4. 우리 가족이 내가 의심받길 유도하고 일부러 마곡석을 이용해 저지른 짓이다.
아마 체시아레가? 내가 이곳에 정을 붙이는 걸 바라지 않아서, 혹은…….
이스케와 가능한 사이가 나빠지길 바라서?
마곡석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있고 또 내가 남편이랑 사이 나쁘길 누구보다도 바랄 양반이 바로 체시아레였다.
문제는 어째서 원작에선 하지 않은 짓을 벌였냐는 건데…….
에렌딜 신전의 내통자를 통해 내 행적을 전해 듣고 뭔가가 거슬려서?
내가 원작의 루드베키아처럼 신전을 들락거리며 뻔하게 행동하지 않아서?
내가 얼마 전 이스케랑 같이 신전을 찾아간 일까지 뭐로든 전해 듣고 심기가 거슬려서?
그래, 그날 난 대주교와 다른 사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스케한테 안긴 채 볼에 뽀뽀까지 해버렸지.
그것까지 전부 전해 듣고 거슬린 걸지도 몰랐다.
약언 얘기도 그렇고 우리가 의외로 사이가 좋아 보인다며 전해 듣고는 거슬려서 홱…….
으아아, 진짜라면 넌 진짜 사이코 중의 최강 사이코야, 체시아레 새끼야!
아직 추측에 불과했으나 꽤 그럴싸했다.
내가 사이코 남편 놈을 상대하느라 사이코 오빠 놈의 또라이력과 집착증을 무의식적으로 간과한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철두철미한 놈이 이런 미친 짓을 저질러?
그것도 마곡석까지 써서 그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질 않나, 내가 남편 놈한테 맞아 죽기라도 바라는 거냐!
만약 프레이야가 잘못됐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섬뜩하다.
엘레니아의 독살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고!
난 내가 계획대로 이스케랑 진도를 빼고 약언까지 치르고 나면, 그게 체시아레의 귀에 들어가고 나면 그가 방문할 검술 경기 시즌에 나 하나만 좀 고생하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런 복병이라니…….
아니면 이 모든 게 프레이야의 자작극일 수도…… 아냐, 이건 너무 갔다.
단지 내가 좀 거슬린다고 제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벌이는 건 말이 안 돼.
휴, 모르겠다. 죽겠다는 것만 알겠구나.
남편 놈은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지금껏 내내 얼굴도 비치지 않고 있어서 더 불안했다.
당연히 점심 식사도 같이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언질도 남기지 않아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아버님처럼 대놓고 찔러보거나 무작정 몰아붙이기라도 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이런 살얼음판 같은 유예는 정말 싫다.
마지막으로 본 얼음장 같은 눈빛만 계속 생각나는구나.
변함없는 자식. 나를 그냥 팍 밀치고…… 물론 그 피가 튀면 위험했다는 거 이제 알지만…….
하긴, 그놈이 어떤 놈이고 프레이야가 어떤 존재인가.
그놈은 지금쯤 내게 조금이나마 친절하게 대해준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우윽…….”
머리도 복잡해 죽겠는데 설상가상으로 몸까지 이상했다.
온몸을 바늘로 쑤시는 듯한 후끈거림과 더불어 속이 타는 듯한 통증. 연례행사 증세가 또다시 덮쳐온 것이었다.
올해는 두 번 모두 지났으니 안심하고 있었거늘 뜻밖의 복병이 연달아 터진다.
일전에 열병이랑 겹쳐서 원래보다 일찍 끝나버려 미련이 남기라도 한 걸까?
“컥! 흐으엑!”
종일 침소에 혼자 틀어박혀 끙끙대다 밤중 타는 듯한 갈증에 일어나 탁자 위의 물을 마시는데 목에 뭔가가 걸려들면서 구역질이 치솟았다.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하니 쓴 위액과 피, 모래알 같은 것들이 섞여서 흘러나왔다.
누가 내 물병 안에 모래를 넣어둔 건가? 저거 먹고 죽으라고……? 프레이야가 느꼈을 고통을 나도 당해보라고?
망할 것들. 프레이야는 좋겠군, 이 집 아랫것들까지 전부 자기편이라서.
하아, 괜찮아, 적어도 나는 내 편이니까.
젠장. 내 가문이 어둠의 세력인 걸 어쩌겠어. 내일은 어떻게든 야박한 남편 놈과 독대할 기회를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비몽사몽한 상태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나서는 찰나였다.
“헉!”
아이고, 뭐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기척도 없이 등장해 화장실 입구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엘레니아였다.
며칠 만에 보는 엘레니아였다.
어디 나갔다 막 돌아왔는지 외출복 차림이었는데, 아마 내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왔다가 침소가 빈 걸 보고 화장실 쪽으로 온 듯했다.
그런데…….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엘레니아는 왠지 평소에 비해 훨씬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이 오금이 지릴 정도다.
나는 아린 목구멍을 무시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엘렌, 무슨 일…….”
쿵!
등이 닫힌 화장실 문에 세게 부딪혔다.
내 눈이 그야말로 튀어나올 듯 벌어졌다.
엘레니아는 거의 내 목덜미를 틀어쥐다시피 하고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평소의 기품은 완전히 사라진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아니, 이봐요, 이쁜 시누이님 당신마저!
순간 넋이 나가버린 내 귀로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으스스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네?”
“처음부터 손 보고 혹시나 했는데 당신 정말로!”
손? 내 손을 보고 뭘 혹시나 해? 암살자라는 걸?
넋이 빠져나가는 내 몸을 그녀가 거칠게 쥐고 흔들었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말해보십시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음식물이 몸을 더럽히는 기분이라서? 아니면 역시 이대로 말라 죽는 게 목적입니까?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짓을!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시위하지나 말고 조용히 죽든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멍하게 엘레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문득 그녀가 분노하고 있는 상대가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일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내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몸뿐이니까요.”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일순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어 침묵이 내렸다.
짧고도 긴 침묵이 스쳐 간 끝에 엘레니아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화들짝 거두는 것이었다.
“내가 도대체…….”
“…….”
“미안합니다.”
평소의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였으나 왠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고통을 억누르는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진 눈매가 생소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엘레니아는 멍하게 굳어 있는 나를 마지막으로 잠깐 쳐다보고는, 이윽고 황급히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오밤중에 이게 웬 뜻밖의 푸닥거리야.
나는 멀거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오른손 검지 아래 관절, 주먹을 쥐었을 때 튀어나오는 그 부분이었다.
나처럼 습관적으로 토하는 사람에게 흔히 생기는 것.
이젠 가능한 손을 쓰지 않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흉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희미한 반점 같은 것으로 여길 자국.
이걸 보고 눈치챘다는 말은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뜻이다.
그녀가 쏟아낸 말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 자신은 아닐 듯했다.
대관절 누구를 떠올린 것일까.
누구이길래 그 포커페이스 엘레니아가 그렇게까지…….
원망스러운 얼굴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