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이디 루드베키아.”
“아, 대주교님.”
성 아그네스의 순교를 기리며 기도와 봉헌을 치르는 행사 뒤엔 병자와 빈민들을 돌보는 각지의 수도원들 등에 기금을 대기 위한 경매 모금이 진행되었다.
경매품은 주로 로마냐를 비롯한 남부 국가들로부터 수입한 그림과 조각품 등의 예술작들이었다.
여기선 진행 방식이 또 어떻게 다를지 몰라 일단 천천히 구경만 하고 있는데 대주교가 나타나 나를 슬쩍 불렀다.
“참석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잠시 저와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마침 남편 놈은 동료 놈들이랑 잎담배 피운다고 사라진 터였다.
나는 선선히 웃으며 대주교를 따라 경매 행사가 진행 중인 포도원 뜰 근처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한 신전이랑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찰하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그러다 보면 체시아레의 첩보망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중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체시아레는 이스케 못지않게 예상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만약 일이 내 뜻대로 풀린다 해도, 내가 이스케와 초야를 치름으로써 혼약 취소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엘레니아의 암살이 미루어진다 해도, 이스케가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날이 오게 된다 해도…….
상대가 체시아레인 이상 방심할 순 없었다.
내가 자기 뒤통수를 쳤다고 여기고 눈이 홱 돌아서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올 검투 경기 축제에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방문하실 예정이라지요.”
가능한 한 잊고 지내고 싶은 화제를 자꾸 꺼내시는군요. 휴, 제발 무슨 사고라도 나서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실은 에렌딜에 오시자마자 신전에 들르시리라 기대했었습니다.”
“아…….”
“물론 여건이 녹록지 않으셨다는 것 이해합니다. 몸도 좋지 않으셨던 데다…… 이런저런 변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덧붙인 대주교가 온화하게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영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마음이 좋지가 않더군요. 이곳에서 그리 소홀히 대접받으실 분이 아닌데 말입니다. 소공작은 저 또한 귀중히 여기는 인재이긴 하지만, 노여움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가볍게 농담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왜 떠보는 것 같은 느낌일까?
나는 그의 인자한 미소에 대고 방긋 해맑게 웃었다.
“소홀히 대접받은 적 없는걸요. 다들 제게 아주 친절하세요. 특히 이스케 경은 제게 언제나 과분할 정도로 다정하시거든요.”
대주교는 한쪽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으나 금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과연 시스티나의 천사이십니다. 견줄 수 없는 관대한 마음씨에 겸허한 기분이 이는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염려해 주셨다니 감사한걸요.”
“제아무리 차디찬 심성의 살육귀라 해도 고귀함의 현신인 시스티나의 종달새에게 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두 분 사이에 벌써부터 특별한 유대감이 움트는 모습을 보는 건 기쁜 일입니다. 다만…….”
시스티나의 천사니 종달새니 하는 개 같은 별명은 아버지의 정부들한테나 주라고 그래.
나는 미소를 유지하려 애쓰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망설이듯 말끝을 흐린 대주교가 이윽고 낮고 진지한 톤으로 속삭였다.
“고해소의 신성한 원칙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행여나 견디시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신전을 찾아주십시오. 에렌딜의 대신전은 성하의 은총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뭘 잘 몰랐더라면, 이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더라면 단지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교황에 대한 충심으로, 명색이 로마냐의 공주인 내가 온통 고깝게 보는 이들 천지인 이곳에서 버티는 게 안타까워 손을 내미는 것뿐이라고.
혹은 모르지, 북부를 떠나 시스티나 성벽 안으로 들어갈 야욕으로 나를 이용하려는 것뿐일지도.
어느 쪽이든 내가 신전의 고해성사실로 발걸음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정말 친절한 말씀이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북부는 무자비하고 쌀쌀맞은 곳이라 신앙인이라 해도 친절을 찾아보기 쉽지가 않지요.”
“쭉 북부에만 머무르셨나요?”
“에렌딜이 제 고향입니다만, 소싯적 순례를 돌다 로마냐에 체류하기도 했었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은덕을 입었지요. 성하께서 아직 추기경이시던 시절 짧게나마 담화하는 영광을 누린 적도 있답니다.”
그렇군. 프레이야의 백부라고 했던가.
만약 이 대주교가 단순히 야심만만한 성직자를 넘어 우리 가문의 내통자라면 그것대로 골치 아픈데. 제발 아니길 빌어야 하나?
“……피는 못 속인다지요. 성하께서 다 뜻이 있으시니 하신 일이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몸과 마음을 다해 보필해 드리는 것뿐일 듯합니다.”
응? 갑자기 웬 뜬구름 잡는 소리지?
나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렸다.
속 모를 대주교가 뜬금없이 혀를 차며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윽고 거기에 나의 시댁 식구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있는 낯설디낯선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머 아버님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설마 아들놈 쫓아 오셨나?
고질병이 된 어깨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브리타냐 최고의 기사였던 오메르타 공작과, 부친의 전성기를 뛰어넘는다는 명성의 소유자인 이스케의 조합은 꽤 흉악스러웠다.
똑같이 팔짱을 끼고 서서 똑같은 시뻘건 눈알로 서로를 오만하게 쏘아보며 유유자적 웃고 있는데 웃고 있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남들 노는 장소에 와서 훈훈한 분위기 망치는 건 부계 쪽 유전인 것 같다.
가까이 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망설이는 찰나 대주교가 먼저 움직였다.
장대처럼 키가 큰 대주교가 자주색 수단 자락을 기품 있게 흩날리면서 마물들도 기겁하여 도망갈 분위기의 부자에게 다가가는 광경은 쓸데없이 경건하게 느껴졌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공작님. 영지 쪽 문제는 잘 해결되셨습니까?”
보아하니 경건한 대주교는 주변의 속세에 찌든 이들 못지않게 오메르타 부자의 민폐스러운 모습에 익숙한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 의외로 선선한 태도로 대주교에게 화답하는 동안 이스케는 내 쪽을 한번 힐긋 노려보고는 곧바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왠지 접근하지 말라는 듯한 살벌한 기색이었다.
한결같이 도도한 새끼. 지가 같이 오자고 한 주제에 말이야, 또 뭐가 잘못된 거야?
내가 그새 대주교랑 알콩달콩 네 뒷담이라도 실컷 쏟아냈을까 겁나니? 아니면 그새 뭐 음모라도 꾸몄을까 봐?
“루비, 이쪽으로…….”
어느 틈엔가 가까이 다가온 엘레니아가 나를 붙잡아 아까 합석했던 테이블로 데려갔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기색이라 약간 걱정이 들었다.
저 부자가 저러고 있는 게 단순히 일상적인 모습이 아닌 건가?
“엘렌, 저어…….”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원래 둘이 만나면 항상 저 지경입니다.”
냉랭한 엘레니아의 조언 아닌 조언에 맞은편에서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프레이야였다. 하긴 얘가 여기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휴, 얜 이게 마냥 일상이라는 듯 즐거운 모습이구나……. 왠지 좀 부러워지는군.
“공작님도 참, 그냥 그림이나 보시지 또 이스를 괴롭히시네. 좋아하실 거 많이 나왔는데, 내가 대신 입찰해서 선물해 드릴까?”
“관둬. 이미 쌓아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해.”
“그래도 하멜른 다녀오셨다고 선물까지 보내셨는데 그냥 넘어가긴 좀 그런걸. 부인, 그림 좋아하세요?”
그림이야 다 그림이지 뭐.
그나저나 아버님 영지 다녀오셨다고 자식들 소꿉친구한테 줄 선물을 다 챙겨오신 건가요? 좀 과한 정보로군요. 쳇.
“좋아하긴 하지만 잘 볼 줄은 몰라요.”
“공작님께서 그림을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부인께서도 하나 입찰하셔서 선물해 드리는 거 어떤가요?”
글쎄. 나쁜 조언은 아니긴 한데, 오랜 가족 친구인 프레이야라면 몰라도 내가 그런다면 틀림없이 남편 놈한테 미운털이 박힐 거 같은데.
게다가 난 돈이 없다. 이곳에 올 때 가져온 지참금은 원칙대로라면 내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그건 그것대로 눈치가…….
에구, 내 팔자야.
“저보다는 영애께서 안목이 더 뛰어나실 것 같아서…… 전 그냥 구경만 할게요.”
“아유, 저도 그냥 어머니 어깨너머로 약간 배운 것뿐인걸요. 로마냐야말로 예술의 전당 아닌가요?”
그러는 사이 하얀 제복 차림의 시종이 다가와 빈 잔들을 치우고 새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아까와 같은 석류 주스가 아닌 포도주였다.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들을 못 본 체하며 와인 잔에 손을 뻗는 순간, 엘레니아가 불쑥 경고도 없이 나를 바로 돌아보았다.
“그림 얘기는 그만두고. 루비, 저희끼리 아까 의논하던 것이 있습니다만.”
“네……?”
“루비의 전담 하녀를 새로 고용할까 싶습니다. 저희 집안 가신들은 워낙 오래된 이들이라…… 아예 왕도에 연고가 없는 아이로 뽑을까 합니다.”
나는 약간 놀랐다.
내 전담 하녀를 새로 뽑는다고? 그것도 아예 신선한 뉴페이스로?
“글쎄요, 저는…….”
“실은 일전에 오빠가 먼저 얘기하긴 한 겁니다만, 저도 좋은 생각이라 봅니다. 퓨리아나 후작 부인께서 그쪽으로 믿을 만한 사람을 잘 아시는지라 프리에게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게 정말로 이스케가 먼저 꺼낸 얘기라고?
대개 같은 지역 내의 사용인들은 돌고 도는 법이었다.
그러나 왕도에 아예 연고가 없는 타지 출신의 어린 하녀라면, 좀 미숙할지언정 내겐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모르는 거야 가르쳐 주면 되고, 갓 들어왔으니 편견을 품을 일도 적고 또 비슷한 외부인 처지니 내 편으로 만들기 더 쉬울지도…….
루실한테 뇌물 줘가면서 손 빌릴 일도 없어지겠네.
단지 프레이야 쪽에서 알선해준다는 게 좀 걸린다.
께름칙한 티를 감추며 슬쩍 쳐다보자 프레이야가 와인 잔 너머로 시원스레 생긋 웃었다.
“일단 소개장부터 보내라고 할 테니 그때 보시고 결정하시면 돼요. 제가 봤을 땐 어느 정도 원숙한 사람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야. 좀 어린 애들로 알아봐 줘.”
“그렇지만 엘렌, 부인 생각은 다르실지도 모…….”
프레이야는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나는 순간 그녀가 와인을 급하게 삼키다 사레가 들린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엘레니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프리?”
말을 하다 말고 잠시 화면을 일시 정지한 것처럼 굳어 있던 프레이야가 곧 와인 잔을 거칠게 던지듯 내려놓았다.
와장창, 하는 신경질적인 파열음이 등골에 싸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프…….”
“흐, 흐우엑!”
하얀 테이블보에 검붉은 액체가 튀었다.
모든 일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너무도 예상 밖으로 충격적인 광경이라 우리 모두 잠깐 사고회로가 멈춘 듯했다.
“여, 영애!”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황급히 다가가 어깨를 붙들자 프레이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에 엄청난 공포와 충격이 서려 있었다.
다음으로 그녀가 다시 피를 토해냈을 때, 다급하게 다가온 누군가가 나를 거칠게 밀치고 그녀를 안아 드는 것을 보며 나는 무언가 싸한,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어떤 예감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손대지 말고 물러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일갈에 나는 주춤거리며 반쯤 뻗은 팔을 오므렸다.
연신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프레이야를 안아 드는 이스케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건…….
이스케가 나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동요도 충격도 내비치지 않는 침착한 얼굴이 뜻밖이었으나 차게 얼어붙은 눈빛이 낯설었다.
“여기서 나가.”
“네?”
“아이반! 나 대신 좀!”
그것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신전 안쪽으로 뛰어가는 이스케의 뒤로 다른 이들이 따라붙었다.
엘레니아 역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곧장 뒤쫓아 달려갔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말 그대로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멍하게 팔을 들어 긴 소매에 튄 프레이야의 피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마른 손목에 말라붙어 있던 피가…….
“당신……!”
불쑥 덮쳐온 거친 손길이 내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아니, 이 애새끼가? 네놈들한테 기사도 따위 기대한 적은 애초에 없다만 이게 갑자기 웬 행패더냐!
“당신 짓이지!”
“무…….”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이 순진한 체하는 마녀가!”
뭐?
퍽, 하는 요란한 파찰음과 함께 목덜미를 틀어쥔 힘이 풀렸다.
퍽, 퍽, 퍽!
나는 캑캑 터져 나오는 기침을 삼키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웬 아저씨 하나가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로렌초의 머리통을 양철북처럼 무자비하게 내려치고 있었다.
그 강맹한 습격에 로렌초는 반격할 엄두도 못 내고 머지않아 바닥에 허물어졌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매한 아들놈이 잠시 정신이 나간 듯합니다.”
정중히 내게 머리를 숙여 보이는 아저씨의 눈은 싸늘한 보라색이었다.
즉, 퓨리아나 후작이 직접 제 아들을 족쳤다는 거다.
퍽 기민한 대처였다.
이곳은 엄연한 브리타냐의 땅인 동시에 대신전 앞마당이었고, 나는 신전이 충성을 맹세한 교황의 여식이니까.
이 자리에서 다짜고짜 나를 고발하며 덤벼드는 건 신전과 교황청을 함께 고발하는 것과 같은 멍청한 짓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사실이 되레 반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거다.
우르릉, 꽝!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요란한 천둥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비명들이 울렸다. 빠르게 다가온 누군가가 내 어깨에 팔을 감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부인, 이쪽으로…… 어, 젠장,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내 피에 젖은 옷소매가 아이반 경의 손아귀에 뜯겨 나갔다.
그의 손 역시 푸른 연기 같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례를 넘어서 의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자자, 다들 속히 신전 안으로 대피하십시오! 이건 비상 훈련이 아닙니다!”
“B구역 즉시 봉쇄, 비상 훈련이 아니다! 반복한다, B구역 즉시 봉쇄, 비상 훈련이 아니다!”
“신부님들부터 모셔!”
다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위로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일단 무작정 끌려가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중에 멀리서부터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와 트럼펫 소리를 합쳐서 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초록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횃대를 든 수사들이 뛰어가 담벼락 틈의 성유 도랑에 성화를 붙였다.
담 너머의 일대로부터 무언가 까만 연기 같은 것이 꾸물꾸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물들이 제 발로 신전 근처까지 와 침입을 시도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들에게 있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부분의 사람 역시 몹시 놀라고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아이반 경!”
“앤디미온, 네가 나 대신 좀…….”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인.”
곧바로 앤디미온에게 나를 넘긴 아이반 경이 ‘씨발 축일에 이게 대체 뭔 X같은’ 어쩌고 하며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렇게 앤디미온에게 넘겨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전 안쪽으로 끌려갔다.머
지않아 쿵, 쿵, 하고 문들이 연달아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봉쇄가 다시 풀린 건 반나절 가까이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