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며칠이 흐른 뒤, 성 아그네스 축일 당일이 되어서야 나는 대주교의 마지막 말뜻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 교구에서 주최하는 자선 행사란 내 이전 삶의 자선 파티 등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나 종교가 권력의 큰 중추를 차지하는 세계라면 어지간한 세도가라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추는 법이었다.
그렇다 해도 교황령인 로마냐보다는 거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치레투성이 종교적 행사보다는 생존이 걸린 전투가 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니까.
“아앗, 부인, 오셨습니까!”
“부인만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저 지랄 맞은 새끼는 왜 달고 오신 겁니까?”
“아하하, 저도 반가워요.”
물론 내 예상은 이번에도 틀렸다. 여기가 자선 행사장인지 야외 연회장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곧바로 내게 반갑게 아는 체를 해주는 앤디미온과 아이반 경의 등장은 고맙고 좋았다.
내게 호의적인 몇 안 되는 녀석들이었으니까.
아이반 경이 에스코트 중인 엘레니아의 모습 또한 좋았다. 엘레니아는 약간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까.
하지만 왜, 어째서, 에렌딜의 귀족들이란 귀족들은 다 참석한 거 같은 건데?
게다가 팔라딘 놈들은 왜 이렇게 많아? 아무리 축일이라지만 마물 사냥 안 하나? 그렇게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주제에?
“오오, 이게 누구야? 이스케 경 아니신가?”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웬일이냐? 그것도…….”
“내가 여기 온다고 누가 알려줬냐.”
“성 아그네스께서 일러주고 가셨다, 새끼야.”
일전에 참석한 승마 모임보다 더 북적거리는 것 같다. 도도한 남편 놈이랑 둘이 조용히 와서 내가 얼마나 캐내 봤자 나오는 거 없는 하찮은 인간인지 어필하려 했던 나의 계획은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에휴, 내 남편 놈 유명인사이긴 하구나. 고작 자선 행사에 참석한 것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쫓아오다니.
하긴 국왕의 조카에 오메르타 소공작에 내로라하는 실력의 팔라딘에 입만 다물고 있으면 외모도…….
다 가졌네. 주인공은 주인공이시군.
나는 재수 없는 주인공을 돌아보며 마냥 신난다는 기세로 방긋 웃었다.
“와아, 분위기가 엄청 활기차네요. 이렇게 많은 분이 참석하시다니 다들 굉장히 신실하신 것 같아요.”
“떼먹는 거 없나 감시하러 온 것뿐이다. 워낙 쪼잔한 군상뿐이라.”
그렇군. 북부는 쪼잔한 군상뿐이군. 왜 놀랍지가 않지?
“전 다릅니다. 경께선 제가 얼마나 신실한지 아시면서…….”
“앤디미온.”
“예?”
“난 네게 휴가를 준 기억이 없는데. 왜 여기 와서야 네 면상을 보게 된 걸까.”
“그, 그건…….”
불쌍한 앤디미온. 어쩌다 이런 놈을 상관으로 둬서.
쪼잔하기론 전국구를 달릴 이스케는 자기가 같이 오자고 한 주제에 시종일관 까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난번부터 느꼈던 건데 북적이는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루비.”
“네?”
“왠지 더 야위신 것 같습니다.”
불쑥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엘레니아가 제 오빠 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스케는 지극히 삭막한 표정이었다.
“아직 며칠밖에 안 됐다.”
“그런가. 집에는 아예 안 들어올 심산이야?”
“들어가는데.”
“새벽에 잠깐 말고. 아버지 계실 때.”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무슨 대화가 이 지경이람.
게다가 고작 며칠 만에 내가 살이 붙길 바라다니, 안 그래도 매일 점심시간마다 신종 고문을 겪는 기분인데 강도가 더해질까 두렵다.
“저어, 이스케 경.”
“왜.”
“혹시 목마르십니까? 음료수 좀 가져다드릴까요?”
불쌍한 우리의 앤디미온은 행사가 끝난 뒤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에 대한 번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이반 경이 큭큭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이스케는 한결같이 만인에게 야박했다.
“나도 발이 달렸다.”
“하, 하지만…….”
“저도 마침 목말랐는데, 같이 가서 가져올게요.”
콧구멍에서 음료수가 뿜어져 나오는 석상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냉큼 끼어들며 제안하자 앤디미온은 좀 희망찬 표정이, 남편 놈은 한결같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넌 내 종자가 아닌데.”
“하지만 석상이 신기해서 가까이서 보고 싶은걸요.”
“별 게 다 신기하군.”
“그럼 다녀올게요!”
걱정 말렴, 네 잔에 침을 뱉지는 않을 테니까. 쳇.
저 살벌한 기운에서 잠깐이라도 해방된 기분으로 앤디미온과 함께 신나게 석상 쪽으로 뛰어가려는 찰나였다.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던 남편 놈이 또 뭐가 문제인지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잠깐만.”
“네?”
“하여간 칠칠치 못해서…….”
갑자기 또 뭐가 못마땅한 거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데 놈이 불쑥 몸을 숙였다.
정확히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는 것이었다. 어어?
“신발에 뭘 붙이고 다니는 거야. 남부식 패션인가?”
잠깐이나마 이 재수 없는 놈이 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겨를도 없었다.
내 구두 뒤꿈치 쪽에 웬 씹다 버린 껌 같은 시커먼 것이 붙어 있던 것이었다! 아니, 저런 건 또 언제 붙었대?
신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단장을 마치고 이스케랑 마차를 타고 와서 방금 막 내렸으니 그새 붙었을 리는 없고, 집에서 붙었나?
설마 시중들던 사람 중 누가 일부러 붙여놓은 건 아니겠지? 설마?
“아하하, 제가 워낙 조심성이 없어서…….”
“알긴 알아서 다행이네.”
한심하다는 톤으로 툭 던진 녀석이 껌 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덩어리를 떼어내고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씨이, 창피해.
“뛰지 마. 넘어진다.”
“네. 사뿐사뿐 우아하게 걸을게요.”
빈정기를 숨기려 애쓰며 방긋거리자 놈이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위험하다.
잽싸게 꽁무니를 빼려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들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뭐지? 왜 다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람?
마치 일전에 남편 놈이 날 승마 모임에 데려다준답시고 같이 기를레요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단 이번에는 엘레니아까지 두 눈을 커다랗게 치뜬 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주춤거리며 남편 놈 쪽을 돌아보았다. 이스케는 그저 한결같이 멀뚱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아니에요.”
하긴, 그래. 저 도도한 양반이 친히 몸까지 숙여가면서 남의 신발에 붙은 더러운 걸 떼주다니, 다들 약 빤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눈빛이 될 만도 하다.
단지 희망적인 발전의 신호로 여기기엔 우리의 관계가 너무 배배 꼬였구나…… 저놈 심보도.
“이건 석류 주스인 모양입니다.”
“꼭 코피를 흘리는 것 같네요. 마치 저처럼요.”
“아…….”
“그냥 웃으셔도 돼요. 웃자고 한 말인걸요.”
어차피 길이 남을 흑역사인 거 차라리 자학개그로 승화하자.
나는 한숨을 폭 내쉬는 시늉을 하며 붉은 음료를 뿜어내는 석상의 콧구멍 아래 잔을 가져다 대었다. 앤디미온이 미소를 지었다.
“실은, 저 또한 이 석상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에렌딜의 견습 팔라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만히 있다가 코피가 펑 터지는 신고식을 치르거든요.”
“네? 정말로요?”
“예. 특정 경지에 이르기까지 몸이 죽어나는 과정입니다. 나름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라, 자랑이랍시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 처맞아서 다시 터지는 놈들도 더러 나옵니다. 진정한 팔라딘의 길에 자만은 금물이거든요.”
으음. 그다지 신뢰가 가는 신조는 아니로군. 이 동네 팔라딘 대표 격인 놈부터가 자만 도도 그 자체인데.
“그 경지라는 건 수련 과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잘 아시겠지만 팔라딘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인 적정 체력과 검기가 신성과 융화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마기에 노출되다 보면…….”
“토마토입니까?”
걸걸한 음성과 함께 머리 위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에, 나는 하마터면 가득 채운 음료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흩날리는 검붉은 머리칼, 번쩍이는 호박색 안광, 구릿빛 피부와 거대한 불곰 같은 덩치…… 어어?
“서, 석류 맛인데요. 드릴까요?”
험악한 불곰의 현신 같은 팔라딘은 냉큼 내 잔을 받아들고는 다시 쿵쿵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앤디미온이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 형이 지능이 좀…….”
“아하하, 언제 봐도 듬직해 보이시네요.”
“실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만……. 아이반 경과 얼추 비슷하거든요. 일전에 둘이 제대로 우열을 가리겠다고 붙다가 연무장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은 적이 있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붙었길래 연무장을 통째로 날려 먹을 수가 있담.
아무튼 그 여리고 꽃 같은 아이반 경이 저 불곰 전사 같은 분과 막상막하라니 좀 놀랍구나. 하긴 외모랑은 딴판으로 더러운 검술의 소유자라는 묘사가 있기도 했었지…….
“구경이 오래도 걸렸군. 뭘 그렇게 시시콜콜 떠드셨나.”
앤디미온이랑 사이좋게 음료수 잔을 들고 돌아오니 야박한 남편 놈이 곧바로 면박을 주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놈.
“재미있는 얘기를 좀 했거든요.”
“그게 뭔데?”
“고독하고 낭만적인 팔라딘의 길에 대해서요. 그런 김에 저도 팔라딘이 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왠지 비슷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팔라딘 영웅들과 엘레니아가 천천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만 일제히 앤디미온 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앤디미온이 펄쩍 뛰었다.
“저, 저 아닙니다! 전 맹세코 감히 부인께 어떠한 허튼 바람도 넣은 적이…….”
뭐지, 이 반응은. 철없는 헛소리라는 거 알고 한 말이긴 한데, 그냥 웃자고 한 소리에 그렇게 심각하게 하찮다는 표정들은 뭐야?
내가 이래 봬도 마물들이랑 교감이 가능한 최초의 인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어려울까요? 저 힘 세요. 알통도 있어요.”
한쪽 주먹을 불끈 쥐며 팔을 들어 보이자 더더욱 기묘한 침묵이 내렸다.
잠시 후, 아이반 경과 버금가는 기이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엘레니아가 불쑥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린 것을 신호로, 다들 하나둘씩 헛기침을 하며 나를 외면해 버렸다.
심지어 면박이라도 줄 줄 알았던 이스케 놈까지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저기요. 이봐요, 남편 놈아!
내 귀부인 체면이여. 꾸준히 하찮게 보이는 것도 고된 노동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