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6)

* * *

외출 준비를 다 마치고 시간이 좀 남아 정원에서 혼자 꽃다발을 만들다 출발했다.

초야를 치른 다음 날 신전 방문이라.

물론 초야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했고 약언식을 치르러 온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든다.

쳇, 내 조만간 반드시 제대로 진도를 빼고 말겠어.

그런 흑심을 품은 채 복사를 따라 신성한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그간 연무장 쪽만 들락거려서 내부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사방이 온통 검은 대리석 일색이었다.

안 그래도 종일 칙칙한 날씨인데 신전 실내장식까지 이 모양이라니 다들 우울증에 안 걸리시는 것도 대단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에렌딜의 성직자들은 마물들이 득실대는 땅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사탄도 치를 떨고 갈 로마냐의 성직자들에 비해 훨씬 신실한 편이었다.

단, 자애와 용서를 표방하는 신실함이 아니라 이단 심문관의 그것 같은 신실함이었다.

자존심 강한 귀족들이 대다수인 팔라딘들과의 관계 또한 미묘해서 한쪽이 일방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다기보다는 수평적인 동료 형태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다른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부 팔라딘의 미묘한 위치도 한몫했다.

이스케가 속한 롱기누스 성기사단은 신전의 수호자인 동시에 국왕의 밀명을 받드는 특수부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입장인데, 만에 하나 브리타냐 왕실과 신전이 충돌할 일이 생긴다면 어느 편에 붙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부인?”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그만 흠칫해 버렸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내 눈에 이윽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덮인 무슨 휴게실 같은 장소로 보이는 홀과, 거기 모인 사람 중 좀처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쟤는 왜 여기 있어?

“오늘 신전에 방문하실 거라 들었는데, 마침 이리 반갑게 딱 마주쳤군요.”

시원스레 웃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프레이야는, 이 칙칙하고 음침한 신전 내부에서 홀로 빛나는 생명의 여신처럼 보였다.

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누구라도 마음이 녹을 것 같은 미모이긴 하구나.

이게 바로 주인공 소꿉친구의 위엄이겠지.

그나저나 나랑 신전 들른다는 얘기를 이스케가 했나 보네. 그새 언제 만났대…….

“아하하, 정말 반갑네요. 영애께서는 어쩐 볼일이세요?”

“제 백부께서 이곳 대주교시잖아요. 오랜만에 동생이랑 같이 백부님도 뵐 겸 점심도 같이 들 겸 해서 들렀죠.”

백부님께서? 그건 미처 몰랐군요.

열심히 방긋거리는 나를 프레이야의 뒤쪽 창가에 걸터앉은 놈들이 멀뚱히 힐긋거렸다.

당연히 우호적인 시선들은 아니었다. 로렌초를 비롯한 종자로 보이는 소년들이었으니까.

단 앤디미온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쳇, 종자들이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아이반 경이 그냥 두나?

하긴 명색이 다들 귀족 도련님들이니까, 위급 상황만 아니면 식사 시간 정도는 자유롭게 놔두는 모양이다.

“로렌초, 너 인사 안 드리고 뭐 하니? 다들 부인 미모에 넋을 놓으셨나 봐요?”

프레이야의 저 차마 들어주기 힘든 일침에, 놀랍게도 시건방지게 멀뚱히 앉아 있던 소년들이 일제히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어어?

“늦었군.”

……아하, 그럼 그렇지. 저 자식이 나타나서 다들 군기가 돌아온 것뿐이구나.

나는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결같은 이스케는 오늘 아침에 본 그대로…… 보다 약간은 덜 살벌해 보이는 모습으로 수통 마개를 닫으며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도한 자식. 뭘 했길래 그리 또 땀투성이니?

“미안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방금 도착했다.”

조금 전엔 나더러 늦었다며 이 배배 꼬인 자식아. 또 빈정대는 거냐?

“그건 또 뭐야?”

응? 나는 눈을 깜박이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아까 정원에서 엘렌이랑 당신 주려고 만들었어요.”

사실 엘레니아는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기만 한 거지만, 뭐 이 정도 과장은 괜찮겠지?

“엘렌이 뭐?”

“마음에 드세요? 정성껏 만든 거예요.”

딴소리 못 하게 얼른 꽃다발을 들이대며 생글거렸다. 이에 도도한 남편 놈은 당연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타박을 주었다.

“손이 엉망이 됐군.”

“에헤헤, 마음에 드는 꽃이 가시엉겅퀴 근처에 있는 바람에…….”

그냥 좀 받아주면 어디가 덧나니? 응? 이 나쁜 자식아!

내 원수와 싸가지 없는 애새끼들 앞에서 나의 귀부인으로서의 체면은…… 내가 자진해서 버린 것도 어느 정도 있긴 하다만은. 제기랄.

“하여간 이스 넌…… 이렇게 귀여우신 부인을 두고도 어쩜 그렇게 무뚝뚝하니?”

“넌 여기서 뭐 하냐.”

“나야 백부님도 뵐 겸 해서 들렀지. 내가 부른 거니까 내 동생 농땡이 피운다고 혼내지 마?”

“농땡이 피운다는 건 아는 모양이네.”

“하여간. 마침 목탔는데 나 네 물 좀 마셔도 돼?”

“넌 꼭 내 거 뺏어 마시려 들더라.”

“고작 물 가지고 비싸게 굴기는.”

참 화기애애한 대화로군요. 나만 빠지면 아주 완벽하겠어. 하하하.

괜찮아, 이런 기분은 익숙하니까. 게다가 프레이야는…… 나한테 뭐 어떻게 했든 에필로그를 장식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니.

휴. 내가 쟤를 이길 방법이 있기나 하려나. 날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고민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앞으로라도 날 그냥 내버려 둔다면…….

“참, 이스. 내 동생이 네 부인께 말씀드릴 게 있다고 했어.”

“뭐?”

“부인, 일전에 제 동생이 부인께 큰 무례를 저질렀다 들었답니다. 덕분에 다들 한바탕 야단이었다고요. 이 자리를 빌려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큰 실례요? 아아, 제가 어쩌다 본의 아니게 남편 놈과 동료 놈들 앞에서 고발해 버린 그 망할 노래 말인가요?

“무례라니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눈치라곤 개나 준 백치처럼 방긋 해맑게 웃으며 묻자 로렌초 놈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눈을 부라리고 싶은 모양이다. 프레이야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금방 다시 시원하게 웃었다.

“부인께서 워낙 너그러우셔서……. 속상하신 걸 굳이 감추실 필요 없답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오죽 마음이 상하셨으면 그리 털어놓으셨을까 싶어서 제가 다 속상했답니다.”

굳이 그걸 강조해야 하니? 쪼잔하게 일부러 남 앞에서 떠든 나랑은 다르시다 이거지.

그래, 나 쪼잔하다 어쩔래. 사과를 하려면 진작 할 수도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승마 모임 때 일을 뒤늦게라도 솔직하게 해명해 줬다면 이런 꼬인 생각 들지도 않았을 텐데.

뭐, 난 원래 이 모양이니 어쩔 수가 없다. 내 안전 길을 방해하지만 마, 이것들아.

“동생분께서 제 마음 상하게 하신 거 하나도 없는걸요? 아, 처음 뵀을 때 뭐라고 좀 놀리긴 하셨는데 그런 장난은 누구나 다 치는 거니까요.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는걸요.”

“부인께서…….”

프레이야의 입매가 미세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알아, 이해해. 하지만 남편 놈이 지켜보고 있다고. 난 최대한 무해하게 보여야 해.

네가 의도하는 대로 애들 장난 따위에 앙심을 품는 부류처럼 보이면 안 된단 말이지.

그딴 건 금방금방 잊어버리고 사는 해맑은 백치 바보로 보여야…….

“부인.”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인지 로렌초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 누나 치마폭 뒤에 숨어 있긴 창피하나 보구나. 근데 좀 뒤로 몇 발자국 떨어져 주면 안 될까?

네가 풍겨대는 적의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란다.

“일전에 제가…….”

“로렌초.”

표표하게 울린 음성에 우리 모두 사이좋게 움찔해 버렸다.

멍하게 이스케 쪽을 돌아본 로렌초가 곧바로 후다닥 물러섰다. 하여간 이 야비한 애새끼가.

왜 또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 내가 지나치게 해맑게 굴었나?

혹시 저 야박한 놈이 내가 애들이 기껏 사과하는데 받아주기 싫어서 일부러 튕기는 거라고 오해하는 건가? 으앙, 서러워라.

“아하하하, 어떤 것이든 저는 전부 잊었으니까 마음 쓰실 거 하나도…….”

“안색이 나쁜데.”

황급히 뒷수습에 들어가는 내 말을 남편 놈이 뚝 잘랐다.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아닌데, 나 계속 열심히 방긋거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거하게 토한 여파인지 좀 어지럽긴 하지만, 그것보다 네 친구 남매가 쌍으로 풍겨대는 암흑의 기운이 더 치명적이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뭐가 그런 게 아니야.”

건틀렛 낀 거대한 손바닥이 내 이마를 찰싹 때렸다.

……때린 건 아니고 그냥 눌렀다. 그런다고 온도가 느껴지니? 하긴 지난번에도 느꼈구나.

“이상하군. 열도 없는데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대지?”

“아까 정원에서 노셨다고…… 찬바람을 너무 쐬신 것 아닐까? 안 그래도 병약하신 듯한데.”

잽싸게 거들어대는 프레이야가 얄밉긴 했지만 왠지 그럴싸했다.

이스케 놈은 곧바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목숨만 살려줘.

“내가 결혼을 한 건지 애를 떠맡은 건지, 원…….”

야, 이 야박한 자식아! 그래, 나 철부지다! 친구라곤 수준 비슷한 여섯 살배기 공주밖에 없는 뇌 청순 백치 철부지 남부 공주님이라고! 부디 앞으로 쭉 그렇게 여겨주렴.

“말썽 안 피울게요. 너무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또 뭐가 그렇게 신났는데.”

“당신이랑 같이 식사해서요?”

같이 자서라고 말하려다가 그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과하게 입에 발린 소리였기에 슬쩍 바꾸었다.

어린놈들 앞에서 낯부끄럽기도 하고. 큼큼.

“정말로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무시무시한 타박이 떨어짐과 동시에 발이 허공으로 쑥 들렸다.

아아앗, 안 돼, 이놈아! 병아리 신세는 불안하단 말이다!

“이스?”

“사과는 다음번에 하라고 해. 오늘은 내가 시간이 별로 없다.”

한결같이 모든 이에게 도도하신 남편 놈이었다. 그래, 너 잘났다.

자세가 영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놈의 목에 팔을 꾸물꾸물 감으니 지난번처럼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 알몸까지 보여줘 놓곤 왜 이래? 꽃다발을 머리에 찔러주고 싶지만 참겠다.

“저 무거우니 내려주셔도 돼요.”

“그러다 또 피 철철 흘리면서 쓰러지려고.”

할 말 없군. 아, 수치스러워. 그때 코피 터진 건 진짜 길이 남을 수치다.

그땐 아파서 그랬다고 따지려다 자칫했다간 던져버릴지도 모르니 참았다.

안 돼, 던져지는 거 제일 싫어. 맞는 것만큼 아프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트라우마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진도 빼는 작업이나 들어갈까나. 먼저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번엔 한 단계씩 차근차근…….

“이렇게 당신한테 안겨 있으니 너무 두근거려요.”

“…….”

“있죠, 저는 당신이…….”

“로렌초가 네게 무슨 노래를 불렀다는 거지?”

예? 가, 갑자기 그건 왜 묻죠?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기억이 잘…….”

“내게 말하기론 곱슬머리를 놀리는 노래였다던데. 그거 맞아?”

아하. 그렇게 알고 있던 거구나……. 어처구니가 없군. 게다가 난 곱슬머리도 아니야. 자연스러운 웨이브라고!

뭐 그래도 굳이 그 지저분한 노래 가사를 일러줄 필요는 없겠지.

괜히 그런 소문들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어떡해. 그건 정말 싫다. 이간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싫고.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기억이 안 난다는 것치곤 빠른 대답이군.”

“참, 앞으로 점심 식사는 저랑 하실 거라고 들었는데 진짜인가요?”

“그놈의 진짜는…… 그래. 왜. 싫은가?”

응. 싫어. 신종 고문이 따로 없다고!

오늘 아침 먹은 거 토하느라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이 육식 짐승아!

“설마요. 믿기지 않아서 그래요. 진짜예요?”

“진짜라고 이미 대답한 것 같은데.”

“저 진짜 기뻐요!”

그러니 우리 진도 좀 어서어서 빼자꾸나. 흑심을 불태우며 놈의 도도한 조각 같은 턱선에 입술을 잽싸게 눌렀다 떼었다.

휴, 내 빠른 시일 내에 네놈을 반드시…….

“경……?”

응?

나는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근엄하게 굽어보고 있는 웅장한 도서관 같은 장소. 그리고 왠지 모르게 당황한 낯빛의 사제들.

서, 설마 나…… 명색이 교황의 딸이 이 엄숙한 장소에서 이 엄숙한 분들 앞에서 괴수 같은 남편한테 안겨 온 것도 모자라 이 괴수 볼에 뽀뽀하는 꼴을 보인 것인가?

야, 이놈아! 날 여기까지 들고 오면 어떡하니!

“레이디 루드베키아, 어서 오십시오. 언제 방문해 주시려나 노심초사 기다렸습니다.”

창백한 금발의 대주교 차림의 사내가 언제 당황했냐는 듯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저분이 프레이야의 백부 되시는 분인가? 의외로 젊어 보이시는데.

나는 그만 내려달라는 의미로 이스케를 쳐다보았다.

도도한 남편 놈은 그대로 걸음을 딱 멈춘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중이었다.

새빨간 루비 같은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멍해 보인다. 얜 또 갑자기 왜 이래?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누이분을 잘 보필하도록 각별히 유념하라는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체시아레 얘기는 넣어두면 안 될까요? 안긴 팔이 영 불안하다. 이만 내려주면 좋을 텐데.

“이 신전은 오래전 교황 성하로부터 특별히 신앙을 인정받은 장소입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부디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시고 언제든 마음 편히 방문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몇 발자국 앞장서 걷던 대주교가 포도원이 보이는 입구 앞에 멈춰 서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인자함 그 자체인 얼굴이었다.

“실은 두 분이 아직 약언을 하러 오시지 않아 내심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역시 괜한 염려였던 모양입니다.”

그 얘기도 넣어둬요, 좀!

원작에서 이 대주교란 분이 어떤 인물이었나 떠올려 보려 했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다지 큰 비중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루드베키아가 이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리긴 했지만 주로 누구랑 대화하고 무얼 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었다.

조연의 단점이 이거였다. 행적이 자세히 서술되지 않는다는 것…….

“묵은 전통에 얽매이는 타입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응?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남편 놈을 쳐다보았다.

이 뜬금없는 소리에 나뿐만 아니라 대주교 역시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허허…… 경께서 그리 말씀하시다니 더욱이 안심입니다만, 부인께선 성하의 여식이신 만큼 귀찮으시더라도 관례에 따르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혹여나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농담한 겁니다. 제 아내가 그간 몸이 좋지 않아 외출을 자제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조만간 그 문제로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정중한데, 왜 빈정대는 것처럼 들릴까?

대주교 또한 성호를 그어 보이며 자상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뭐야, 이 분위기 뭔데?

문득 깨달음이 일었다. 이스케 놈은 저 대주교를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확연했다.

대주교 또한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다.

보아하니 비단 대주교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성직자들도 하나같이 비슷한 분위기였다.

마치 평화로운 주님의 포도밭에 멋대로 침입한 야수를 보는 듯한…….

최고의 팔라딘이라 해도 다른 성직자들과 꼭 사이가 좋으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이놈 성격이 워낙 유아독존 개차반이어야지.

다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이 자식이 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나를 여기 데려왔느냐는 거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뭐 하자는 거지? 무얼 꾸미는 거냐, 남편 놈아!

헛기침하며 이스케를 슬쩍 흘겨본 대주교가 다시 나를 향해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 신앙 활동에 어떠한 지장도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마침 곧 다가오는 성 아그네스 축일에 신전에서 자선 행사를 주최할 예정입니다. 기꺼이 참석해 주시겠지요.”

“아…….”

나야 뭐 별별 것의 상징이지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남편 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한결같이 야박한 남편 놈은 시선을 대주교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부부 동반도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경께서 함께 오신다면 더욱이 환영이지요. 과연 신혼인지라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으신 모양입니다. 허허.”

그런 말씀도 넣어두소서 대주교님.

이 도도한 놈은 날 작정하고 함정에 던지고 감시할 계획인 게 틀림없다고요. 부부 동반은 무슨 얼어 죽을.

역시 내 추측이 맞았어, 이놈이 오늘 날 여기 데려온 이유는 바로 그런 거였어!

내 아버지의 정보망들한테 대놓고 보이려고 그런 거지!

자기가 날 병아리처럼 콱 붙들고 지켜보고 있으니 나랑 내통해서 오메르타의 뒤통수를 칠 계획은 꿈도 꾸지 말라는 그런…… 이 나쁜 놈아!

혹시라도 다른 속내가 있는 거 아닐까.

이를테면 교황의 딸이라는 점을 차라리 좋은 쪽으로 써먹어 보라고.

이곳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나로 하여금 북부의 성직자들과 적을 두고 교류함으로써 새 입지를 다져보라는 뭐 그런 깊은 뜻으로 같이 와준 거 아닐까 내심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어, 내가!

에휴, 그래. 어울리지 않게 기대를 다 한 내가 어리석었지. 원래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 품는 스타일 아니잖아 나.

왜 갑자기 그런 멍청한 짓을 했지? 좀 머쓱하군.

놈의 목을 감싼 팔을 힘껏 졸라주고픈 충동을 삼키며 나는 두 눈을 열렬히 반짝거렸다.

“진짜예요?”

“…….”

“진짜 참석해도 돼요? 당신이랑 같이?”

“한 번이라도 좀 평범하게 반응할 수는 없는 건가?”

“앗, 미안해요. 제 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의심이 많군.”

이건 또 뭔 말이야. 하여간 잠시라도 빈정대지 않으면 입안에 뭐가 돋나 보다.

“그럼 두 분이서 함께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이번 행사는 예상보다 규모가 커지겠군요.”

그것을 끝으로 우리는 조카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는 대주교와 헤어져 신전을 나섰다.

망할 남편 놈은 일이 제 꿍꿍이대로 돌아간 탓인지 평소보다 더 의기양양해 보였다. 재수 없는 것.

한데 예상보다 규모가 커진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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