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비. 루비?”
“흣!”
어깨를 살며시 흔드는 손길에 나는 흠칫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손으로 눈을 세차게 부비적거리자 왠지 모르게 당혹스러워 보이는 기색의 엘레니아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그런데 여기가…….”
“루비의 침소입니다만.”
응? 아…… 맞다.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밤새 내내 잠을 설쳐서 그런지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눕는다는 것이 그만 깜박 잠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휴, 잠깐 사이에 깊게도 잤다. 뭔가 복잡한 꿈까지 꾼 것 같은데…….
“간밤에 제대로 못 주무셨던 모양입니다.”
“아하하…….”
그 괴수 옆에 누워서 제대로 잘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나요.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한데 지금이…….”
“점심때 외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슬슬 준비하셔야 할 듯한데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요. 그냥 약간 피곤해서 잠깐 누웠던 것뿐이에요.”
모처럼 온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 순 없지.
한결같이 야박한 남편 놈이 무슨 심보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몰라도 한결같은 모습만 보여주고 말겠어. 날 시험하려 해보았자 아무 소용 없을 것이야.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앉아서 넌지시 나를 살피던 엘레니아가 이윽고 화제를 돌렸다.
“로마냐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아…….”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보내셨더군요. 손수 전해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엘렌.”
사려 깊은 행위였다. 누가 몰래 훔쳐보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걸까?
비단 가신들뿐만 아니라, 일가 전체가 내 우편물을 감시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체시아레가 보낸 것이라면.
휴, 체시아레의 편지라니 뜯어보기도 전에 우울한 기분이 드는군.
답장할 일도 고민이구나.
별 내용은 없겠지만 별 내용이 아닌 게 더 어려웠다.
워낙 비위 맞추기 까다로운 놈이라 모자라도 과해도 문제였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니요, 그런 게…….”
“속이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독심술이라도 쓰시는 건 아닐 테고. 내가 토했다는 걸 누가 눈치채고 알린 걸까?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다음부턴 더 조심해야겠다.
“그게, 실은 아침부터 너무 기름진 걸 많이 먹어서…….”
“오빠랑 같이 식사하셨다니 그럴 법도 합니다만, 루비는 확실히 양을 좀 늘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들레차를 내오라 했으니 드시고 가십시오.”
넵.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둘 다 아주 무서워 죽겠다.
하긴 내가 비실거리면서 골골대면 자기들이 고생이니, 원.
“당분간 매일 점심 식사는 오빠와 함께하시게 되었으니 그리 아시고요.”
아, 아니, 잠깐만요 아리따운 시누이님,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신가요? 오늘 아침 한 번만으로도 신종 고문이 따로 없었는데!
“하 하지만, 경께선 바쁘시…….”
“시종일관 바쁜 척하는 팔라딘이라도 식사를 거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꼴에 식성은 까다로운지라 오빠가 루비를 싸구려 여관에 데려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안심해야 하나요? 그냥 엘렌이랑 먹으면 안 되냐고 조르고 싶었으나 열성 팬 컨셉에 심히 모순되는 행위인지라 참았다.
물론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굳이 스토커처럼 쫓아다니지 않아도 매일 놈을 구워삶을 자연스러운 기회가 많아진 셈이니까.
그럼에도 어째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병아리가 된 기분일까?
“참, 듣자 하니 근래 아리엔 저하와 교류가 잦으신 듯합니다만.”
“아, 그건…….”
“조만간 왕궁으로 찾아뵈시는 것도 괜찮으실 듯합니다. 비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엘레니아가 붉은 눈을 크게 깜박거렸다.
“그야 루비 뜻대로 하실 일이지요. 제게 허락을 구하실 일이 아닙니다. 뭣하시면 날을 잡아 저와 함께 가셔도 괜찮습니다.”
“엘렌이랑요? 진짜로요?”
“……예.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이 남매들이 오늘따라 웬일이람. 엘레니아랑 같이 가면 그 왕비님이 조금은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