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6)

* * *

비명이 들려온다.

고통과 공포에 젖은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무저갱의 울부짖음처럼 생생하게 들려왔지만, 여자는 조금도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둠에 젖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발코니에 기대서서 아비규환으로 약탈당하는 도시를 바라보는 여자는 마치 어느 평온한 여름밤 정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화사하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서는 남자는 꽃다발 대신 피에 젖은 검을 들고 있었다.

발코니의 모습도 그렇고 주위 풍경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게 느껴졌다.

꿈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왔구나.’

‘…….’

‘이렇게 와줄 줄 알고 있었어. 한껏 치장한 보람이 있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돌아보며 미소 짓는 여자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울린 목소리는 상처 입은 야수의 그것처럼 야만적이고 또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대답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진작 버렸지만.’

‘…….’

‘이유가 뭐야.’

‘그걸 말해야 알아?’

여자가 바보 같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는데 우는 것처럼 보이는, 기괴한 미소였다.

남자가 이를 꽉 악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집어치워. 넌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어.’

‘그래. 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 네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고, 내 가족들을 배신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이것이 내 선택이야.’

‘나로 하여금 성도룰 도륙하도록 만드는 것이 네 선택인가? 내 칼날이 너만은 피해 갈 거라고 자신했고?’

‘아직도 그렇게 몰라? 난 그런 착각에 빠져드는 부류가 아닌걸.’

‘무슨…….’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너라면 진작 눈치챘으리라 생각했는데.’

‘…….’

그의 눈이 피가 괸 웅덩이처럼 너울거렸다.

무언가 경고하듯, 혹은 거부하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기괴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잔머리 팽팽 굴러가는 우리 오라버니께서 고작 혼담 때문에 오메르타의 공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니, 이상하지 않아?’

‘…….’

‘응? 단지 혼담을 파토 내려고 수를 쓴다면 모를까, 그런 방식은 너무 무모하고 멍청하잖아?’

‘그만…….’

‘그냥 조금 아프게 만들라고만 했어. 혼담을 더 진행하기 조금 곤란해질 정도로만. 그런데 난 그렇게 하지 않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네 누이를 죽인 건 나야. 내 가족들이 아니라, 순전히 나 혼자 쑤민 짓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끔찍한 대화란 말인가?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남자가 그대로 검을 그녀의 몸에 관통해 버리는 거 아닐까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

‘대체 왜 그런 짓을…….’

예상과는 달리 낮게 흘러나오는 음성은 분노와 증오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처참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참담한 목소리였다.

그에 답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명랑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딱히 네 동생이 미운 것도 아니었는데.’

‘너…….’

‘으음, 생각해 보니까 네가 이렇게 눈 뒤집혀서 쫓아와 주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해.’

‘……성배도 네가 빼돌린 건가.’

‘어머, 들켜버렸네. 하긴 그걸 빼돌려서 너희 손에 들어가도록 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또 누가 있겠어? 안 그래?’

생긋 웃으며 덧붙인 그녀가 보디스 안쪽에서 두루마리처럼 둘둘 만 종이 묶음을 꺼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혼약 취소안 말이야. 나는 아직 서명하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은 부부야.’

‘…….’

‘마지막만큼은 네 아내로서 가게 해줘. 좀 늦었지만 신혼 선물로.’

‘부부라.’

그가 웃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뒤틀린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를 괴롭히고 오해하고 갉아먹는 짓밖에 하지 않았어. 결국 너는 내 가족을 죽였고 나는 네 가족을 죽이는 지경까지 왔는데, 그런데도 부부 소리가 나와?’

‘바보야, 그게 바로 우리가 진정한 부부라는 증거라고.’

놀리는 투로 받아친 그녀가 발코니 너머를 가리키듯 팔을 펼쳤다. 불타오르는 도시를 향해서.

‘이 화려한 부부싸움을 좀 봐, 와, 난 이 엿같은 곳이 언제 피바다로 변할지 날마다 꿈꿔왔는데, 넌 정말 눈 깜짝할 새 내 소망을 이뤄줬네? 그 보답으로 나는 네게 이 신성한 도시를 선물할게. 다음 교황이든 뭐든 대륙의 패권은 전부 네 손에 달렸어.’

침묵이 흘렀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뗀 그녀가 살며시 손을 뻗어 피에 젖은 검날을 움켜쥐고 제 가슴 가까이 겨누었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밀어내지도 검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참…… 마지막까지 잘도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

‘너한테 그 정도 믿음도 주지 못한 내 잘못인가? 말해봐,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미안해.’

‘…….’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나 절대 용서하지 마.’

‘나는…….’

그가 말을 멈추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고통스럽다는 듯이.

‘나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어. 네가 그 모든 짓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절절한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따스하고 환하게.

‘어차피 내겐 다른 길이 없어. 네가 나를 보호하려 해도 내 가족들의 원수들이 내게 보복하려 안간힘을 쓸 테니까. 그리고 나는, 나는 매번 너를 이런 식으로 시험에 들게 할 거야. 네가 아무리 기를 써도 나는 계속해서 널 믿지 못하고 일을 치겠지. 봐, 결국엔 네 동생까지 죽여버렸잖아.’

‘그만…….’

‘내가 앞으로 또 무슨 짓을 할지 신만이 아실 일이지. 너의 마음을 확인하고 너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너는 변함없을 거란 걸, 지옥 끝까지 내 편이라는 걸 확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미친 짓을 저지를 거라고. 내가 얼마나 망가진 인간인지 네 눈으로 확인했잖아. 이렇게 끝내버리는 게 최선이야…….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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