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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렁주렁 차려진 조반상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갖은양념에 절인 순록고기와 생햄 멜론, 토끼고기 스튜와 구운 청어와 양고기 소시지 등이 매우…….
육식동물의 식단 그 자체다. 이른 아침부터 이런 식단을 소화할 수 있는 인간은 매우 건강한 인간일 터였다.
그리고 북부 최고의 팔라딘은 당연히 지나치게 건강한 놈이었다.
“입맛이 없나.”
“아니요. 그냥 이 시간을 음미하고 싶어서요.”
잘못 대답했다간 불쌍한 고기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 잽싸게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둘러댔다.
그러나 무자비한 남편 놈은 내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깨작거리고만 있는데.”
“아하하, 그건…….”
“그릇 비워. 넌 너무 말랐어.”
이젠 너마저…… 나는 고분고분히 스푼을 들고 내 몫의 스튜를 꾸역꾸역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야박한 남편 놈과 함께하는 첫 식사인 만큼 깨작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작디작은 위에 아침부터 기름진 고깃국물을 부어 넣자니 고역이었다.
아, 토하는 거 힘든데.
내가 간신히 스튜를 반쯤 비우는 동안 이스케는 그새 내 것보다 훨씬 큰 그릇에 담긴 스튜와 청어구이까지 해치우고선 통으로 썰린 순록고기를 도륙하고 있었다.
금욕주의자인 거랑 식욕이랑은 별 상관없는 모양이다. 대체 저 많은 게 어떻게 다 들어가지?
“밀주를 내올까요, 공자님?”
“아니. 됐다.”
우리가 단둘이 앉아 조반을 드는 동안 시종들이 부지런히 시중을 들었다.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바짝 긴장한 모양이 새삼 다른 인간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엘레니아와 식사할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엘레니아는 의외로 관대한 공녀님이었다.
초야를 치르지 않았음이 명백했으니 나는 또 한 번 소박맞은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방에서 같이 잠들고 일어나 같이 조반을 들기까지 하니 아주 면이 상한 건 아니었다.
난 솔직히 일어나보면 저놈이 진작 사라졌을 줄 알았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나는 꾸역꾸역 스튜를 비우면서 건너편에 앉은 남편 놈을 힐긋거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시커먼 갑옷을 차려입고 육질을 도륙 내며 언제든 도시의 치안을 책임질 준비가 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피곤하고 예민한 기색이었다.
괴수 옆에 낀 병아리 심정으로 잠 설친 건 나인데 왜 자기가 퀭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분위기는 왜 또 저리 살벌한 거야. 휴우, 하여간 어려운 놈. 도도한 놈. 한결같이 배배 꼬인…….
“양념이 비린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그럼 어서 먹어.”
넵. 나는 눈물을 머금고 꿋꿋하게 놈이 내미는 순록고기를 씹었다. 강행군이 따로 없다.
“저어, 그런데요.”
“왜.”
“이렇게 저랑만 같이 식사하셔도 돼요? 아버님께서 갓 돌아오셨는데…….”
“아침부터 체할 거다.”
“당신이요?”
“아니. 네가.”
그렇군요. 보는 사람이 체할 정도로 살벌하다는 뜻인가요?
하긴, 내 기억대로라면 이스케는 모친의 자결 이후 부친과의 관계도 완전히 틀어졌으니까.
게다가 언젠가 엘레니아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스케는 싫은 상대를 그냥 피하고 마는 평범한 성격이 못 되었다.
그 산적 수장 같은 아버님과 유아독존으론 체시아레와 막상막하인 남편 놈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게다가 이스케는 국왕이 총애하는 조카였다.
국왕이 그리워하는 누님의 아들.
오메르타 공비의 자결 이후 왕실과 미묘한 껄끄러움을 유지 중인 공작과, 국왕의 아픈 손가락인 이스케 부자지간의 알력 대립은 당연한 거였다.
“또 뭐가 궁금하시나.”
야간 투시경급 시력도 모자라서 이젠 독심술까지 쓰는 건가? 나는 최대한 순진하게 방긋거리며 머리를 저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바보 같은 질문이 떠올라서요.”
“그게 뭔데.”
“제가 남부에선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마물들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나요?”
순록고기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이제 양고기 소시지를 한입에 무자비하게 으깨 씹던 녀석이 나를 멀뚱히 마주 보았다.
너 눈을 왜 그렇게 뜨니? 한심해하는 건가?
“아니. 그리고 아니라서 다행이지.”
“아…….”
“그건 갑자기 왜.”
“그, 그냥, 그런 바보 같은 소설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이로써 좀 확실해졌다. 포포가 독특하거나 내가 독특하거나.
후자라면 아주 아주 신중해야 할 문제다. 만약 내가 포포 말고 다른 마물이랑도 소통이 가능한 거라면…….
이스케는 잠시 철부지처럼 배시시 웃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나 싶더니, 이윽고 다시 눈길을 돌리고 소시지에 집중했다.
“오늘도 바쁘세요?”
“글쎄. 넌 뭐 하는데.”
“저는…… 음, 친구한테 편지 답장을 쓸까 해요.”
“친구 누구. 아리엔?”
어,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보다 그 하찮다는 투는 뭐야?
씨이. 그래, 나 친구 없다!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라곤 여섯 살짜리 공주뿐……. 젠장할.
“실은 공주님께서 제게 엽서를…….”
“다른 할 일 없으면 점심때 신전으로 오지 그래.”
“네……?”
“독실한 양반들이 네 방문을 간절히 기대하는 듯하던데. 나도 마침 그때 시간이 비니까 들르면 되겠지.”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남편아?
“제가…… 그래도 괜찮나요?”
“넌 성하의 여식이야. 신성한 양반들이 연줄을 대고 싶어 안달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렇지만 그래서…….”
“너 혼자라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와 함께라면 상관없어.”
옳은 말이다. 나 혼자 이곳의 신전에 들락거리며 성직자들과 친분을 쌓는 행보를 보인다면, 안 그래도 교황의 스파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판에 꾸준히 내통 중이라는 눈총을 살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케와 같이 방문한다면 좀 다르다. 그건 오히려…….
무슨 생각일까.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에렌딜의 무수한 성직자들 중엔 분명히 내 아버지와 오빠의 첩보망이 있을 것이다. 그걸 이스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뭔가 본을 보이려는 의미일까?
자신이 지켜보고 있으니 날 통해 뭔가 그렇고 그런 음모를 꾸밀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북부를 얕보지 말라는 뭐 그런 거? 아니면 날 시험하기 위함인가?
“진짜예요?”
“그래. 진짜.”
“진짜 진짜?”
“……식사나 마저 들어.”
넵. 으으, 배 터져 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