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36)

* * *

체시아레는 이스케가 절대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었다.

다른 북부 기수 가문 중 하필 오메르타를 고른 것엔 그 이유가 가장 크겠지.

내가 남편 놈과 초야를 치름으로써 아버지와 체시아레의 뒤통수를 친다면 그때부턴 완전히 한길만 파야 했다.

난 뒤통수 맞고 눈 뒤집힌 체시아레한테 붙들려 집에 끌려가고 싶지 않거든.

어차피 내겐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이스케는 아까 내게 이번이 집으로 돌아갈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었다.

무슨 뜻밖의 심보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도, 순순히 초야에 동의한 것도 그렇고 나를 순순히 놔줄 심보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오, 희망이여, 희망이여! 갈수록 가닥이 보이는구나!

비록 날 싫어하는 인간들투성이인 데다 앞으로 맞서야 할 적이 많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처음처럼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살길을 만들 수 있는 거다. 놈을 어떻게든 잘 구워삶아 나를 믿게 만들고 나면…….

“머리를 말려드리겠습니다, 마님.”

심보 모를 남편 놈이 아무래도 집에 통보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 도도한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녀들이 어울리지 않는 깍듯한 모습으로 분주히 오가며 내 치장을 돕는 꼴이란 봐주기 좀 그랬다.

개중 얼마 전 내게 다이아몬드 머리핀까지 받아낸 루실은 특히나 앞장서서 이것저것 거들었다.

당분간 내게서 뽑아낼 것이 상당히 많다고 결론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요주 인물 목록에 오른 하녀장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언제 내게 그러한 대담한 거짓을 고했느냐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초야를 치른다고 하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 생일 연회 이후 엘레니아가 하녀장을 나무랐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그럼에도 저토록 무서우리만치 뻔뻔한 태도라니 어지간히 믿는 구석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나 따위가 어찌 나오든 자신은 조금도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프레이야와도 비슷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모두가 변함없이 자신을 신뢰할 거라는, 절대 버려질 일 없는 그런 자들 특유의 자신감…….

쳇.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네, 그 자신감.

애초에 그런 식으로 날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생각 하지도 않았을 텐데.

“차를 내어오겠습니다. 레몬밤 괜찮으신가요?”

“응. 고마워.”

향유를 푼 물에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어 말리고 가벼운 화장과 장신구로 치장하는 등 꽃단장을 다 마친 뒤 혼자 앉아 차를 들고 있자니 그제야 현실감이 확 밀려왔다.

아, 나 진짜로 일 치르게 생겼구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손을 갖다 대고 꾹꾹 눌러보아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역시 무서워!

……아니야, 그것보다 놈이 안 오면 어떡하지?

그 심보 배배 꼬인 놈이 갑자기 덜컥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 안 되는데.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촛대까지 꺼버렸지만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어 많이 어둡지 않았다. 더 어두웠으면 좋았을 텐데.

다리를 양팔로 껴안고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밑에 크라켄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리고 있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휴, 포포는 잘 지내려나. 언제 또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그 점은 프레이야에게 고마워해야겠군.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마물이랑 대화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해봤을 테니까.

신이시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디 오늘 밤이 제 뜻대로 잘 지나가게 해주세요. 야박한 남편 놈이 조금은 덜 야박해지게 해주세요. 부디 연민이든 흥미이든 뭐든 저를 믿을 만큼의 감정의 크기를 키울 수 있도록 앞으로 길을 터주십사…….

“그 야단을 떨어놓곤 먼저 잠든 건가?”

……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들어오는 소리도 안 난 것 같은데, 아마 내가 기도에 너무 깊이 빠져든 모양이었다.

황급히 늘어뜨린 머리를 정돈하며 몸을 일으키자 어느덧 침대 바로 곁에까지 다가와 있는 이스케가 보였다.

벽난로의 초록색 불빛이 놈의 거대한 체격을 으스스하게 비추었다.

여태껏 갑옷이나 제복 입은 모습밖에 못 봤는데,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채로 하얀 가운만 걸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혀왔다.

말 그대로 얼이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오, 맙소사. 오, 세상에 맙소사…….

팔짱을 낀 거만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손을 움직여 물기를 머금은 은발을 쓸어넘겼다.

홍옥 같은 눈동자가 어둑한 방 안에서 형형하게 번득인다.

“나도 이쪽으론 문외한이긴 마찬가지지만,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표정이 아니란 건 명백하군.”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야, 멍청아! 일을 망칠 셈이냐!

“앗, 멍해 보였다면 죄송해요. 잠시 제 눈을 믿기가 힘들어서 그랬어요.”

“믿기가 힘들어?”

“네. 진짜 와주시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열심히 방긋거리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들자 놈이 눈을 게슴츠레 치떴다.

진정성이 안 느껴지나 보다. 젠장.

“저어, 그럼 일단 차라도…….”

“여기서 다시 한번.”

“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마음이 변할 것 같으면 지금 당장 말해. 네가 나와 제대로 의무를 치르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널 괴롭힐 일은 없게끔 할 테니까.”

왜 자꾸 저런 식으로 연거푸 확인하려 드는 걸까? 내게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이건 애초에 누가 날 괴롭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작이 날 들볶은 건 오히려 내게 좋은 수단을 일러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먹을 다시 불끈 쥐고 두 눈을 맹렬히 반짝였다.

“걱정 마세요, 제 마음이 변할 일은 절대 없어요. 전 오히려 잠깐이라도 당신의 진짜 아내로 산다면 매우 행복할 거예요.”

이스케는 잠시 머리를 약간 갸웃대며 내 말의 진정성을 가늠해 보나 싶더니, 이윽고 한마디 경고도 없이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나는 그만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보게 되니 압도적일 지경이었다.

냉랭하고 금욕적인 얼굴 아래 드러난 몸은 지나칠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거대하고 세밀하게 짜인 조각상 같은 육체, 말 그대로 한 점의 부드러움도 없는 거칠고 투박한 근육투성이였다.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닌, 익숙한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날짐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운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온 그가 천천히 내 어깨를 쥐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행위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성은 찾아볼 수 없는 야수의 발치에 던져진 병아리가 된 듯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겁이 나는 모양인데.”

“그, 그런 거 아니…….”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떨고 있잖아, 지금.”

짜증을 내는 건 줄 알았는데, 퉁명스럽다기보다는 그저 무덤덤한 투였다.

평소보다 약간 덜 야박한 톤 같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내게로 수그린 육체의 예술적인 모습에 집중하려 애썼다.

넓은 어깨와 흉갑을 두른 듯한 가슴, 날렵한 허리, 강하고 조각 같은 허벅지…….

참으로 관능적인 풍경이긴 했다.

이렇게 양껏 보는 게 죄스러운 기분이 일 정도로.

떨리는 숨을 고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스케는 그 육중한 팔로 나를 들어다 제 한쪽 허벅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내 여민 네글리제 가운 끈을 풀었다. 얇은 재질의 가운이 흘러내리면서 어깨가 서늘해졌다.

“긴장 풀어. 서투르긴 나도 마찬가지니까.”

“기, 긴장하는 게 아니라…….”

“네 입술 그만 깨물고.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것 봐라? 남편아, 너 진짜 금욕주의자 맞아? 성격 파탄 순결주의자 맞니?

왜 이렇게 능숙하게 느껴지는 거야?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가?

스멀스멀 의혹이 피어올랐으나 그래도 긴장이 약간은 풀리는 것 같았다.

내 가운을 다 벗긴 녀석이 이제 내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내 몸을 감싸 안다시피 하고 있던 근육들이 순간 뻣뻣하게 굳은 것은 그때였다.

머리카락을 넘기던 손길이 그대로 멈칫하면서 숨소리 또한 딱 멈췄다. 설마?

“……뭐야, 이건?”

투박한 손가락이 날개뼈 부근을 쓸었다. 팔라딘의 시력은 야간 투시경급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이만하면 안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보이다니. 뭐 어쩔 수가 없게 됐군.

“어렸을 때 놀다가 다친 거예요.”

“흉터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뭘 어떻게 놀았길래 이런 흉터가 남지?”

그야 내 몸에 뭐가 있든 말든 이 집 고용인들이 너한테 말을 했겠니. 게다가 난 그간 혼자 씻는 일이 더 많았다.

“오빠들이랑 사촌들이랑 다 같이 서커스 놀이를 했는데 하필이면 단장이 제일 말썽꾸러기 녀석이라서, 신나서 아무렇게나 채찍을 휘두르다 사고를 좀 냈거든요. 전 그나마 안 보이는 곳이라 다행이었지만, 제 사촌 언니는 목덜미에 흉터가 생겨버렸지 뭐예요.”

한숨까지 폭 내쉬어가며 쾌활하게 말했는데도, 왠지 모를 어색한 여운이 감돌면서 그만 정적이 내렸다.

이스케는 말없이 입을 다문 채 내 등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반쯤 등진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 불안했다.

마침내 내가 무어라 더 덧붙이려는 찰나였다.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내 등짝을 노려보기만 하던 녀석이 대뜸 손을 움직여 내 흘러내린 가운을 다시 끌어 올렸다. 어어?

“왜 그러세요?”

“…….”

들려오는 대꾸는 없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스케는 내 가운을 원상태로 다시 돌려놓고는 끈을 도로 여미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흉터 때문인가? 그게 그렇게 보기 싫었나?

좀 까탈스러운 놈이긴 해도 막상 시작하고 나면 크게 신경 안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던 모양이다.

망할 흉터는 날갯죽지 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허벅지 뒤쪽에도 몇 개 더 있었다. 아물어 사라진다 해도 영영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있으니까.

신성으로 치유는 가능해도 흉터는 남는 법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진하게 남은 건 아니라서 이만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게 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아니면 흉터가 문제가 아닌가?

내가 너무 겁에 질린 것처럼 굴었나?

먼저 졸라댄 주제에 바짝 얼어서 칭얼거리는 바람에 짜증이 난 건가?

아냐, 어쩌면 내가 약을 팔았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어.

애들 장난으로 이렇게 다칠 리가 없다고, 분명 뭔가 잘못해서 벌을 받은 걸 거라고…… 교황의 사랑받는 여식이 어느 정도로 골칫덩어리길래 이런 벌을 다 받았느냐고 말이야.

그래서 갑자기 엮이기 귀찮아진 걸 수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야박한 남편 놈아!

이대로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다.

그렇게 각오를 불태우며 나는 녀석의 허벅다리에 올라탄 자세로 몸을 홱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양손을 놈의 야만적으로 근육뿐인 가슴팍에 얹었다.

짧은 침묵이 스쳐 갔다. 철옹성처럼 꿈쩍도 하지 않으며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이스케가 마침내 툭 내뱉었다.

“뭐 해?”

“당신을 눕혀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

“호, 혹시 제가 또 뭔가 잘못했나요? 기분 나쁘게 해드린 게 있다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한없이 진지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대관절 갑자기 왜! 오늘은 안식일도 아닌데!

곧바로 나를 밀치고 나가버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스케는 한참이 지나도록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만 있었다.

난롯불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새빨간 불꽃 같은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너울거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 생각에 빠져든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또 있어?”

“네?”

“너한테 내가 모르는 흉터가 또 있냐고.”

나는 그만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역시 그것 때문임이 틀림없어! 보기 싫어서든 내가 대단한 골칫거리라는 확신이 서서든 역시 그게 거슬린 거야! 까탈스러운 자식.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이미 이렇게 된 거 그냥 혼나서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방금 거짓말을 했다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며 꼼지락대고 있는데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됐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응?

그가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고 일어나 벗어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가운을 다시 걸치고 홱 나가버리…… 나 싶었는데, 무슨 심보인지 그냥 침대 한쪽에 털썩 드러누웠다.

무슨 말을 하지도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한 팔을 이마에 걸친 채 계속 말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퍽 심상치가 않은 분위기라 말을 걸기도 무서웠다.

짜증 난 기색이 명백한 놈의 윤곽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암담함이 밀려왔다.

아아, 어떡해. 나 또 완전히 망쳐 버렸어. 이 거사에 나의 생사의 기로가 달려 있거늘 이젠 어쩌면 좋지?

어쩐지 너무 순순히 풀려가는 것 같았어! 내가 자길 속였다고 확신하는 게 틀림없는 거야!

안 돼. 이 이상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힐 수는 없다.

나는 그만 무릎으로 엉금엉금 다가가 놈의 옆에 넙죽 웅크렸다.

“미안해요, 일부러 감추려던 거 아니었어요. 너무 창피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뭐?”

“제, 제가 멍청한 말썽쟁이였다는 사실 말씀드리기가 너무 창피해서…… 히끅,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전 진짜 구제 불능이에요.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히끅!”

딸꾹질이 자꾸 나와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혓바닥을 꾹 누르려는데 이스케가 불쑥 내 손을 잡아챘다.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만 말해.”

“히끅……?”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뱀 같은 눈매가 스산했다. 움찔거리며 입을 꾹 다물자 밭은 한숨 소리가 울렸다.

“이리 와.”

나는 순순히 녀석이 당기는 대로 끌려가 몸을 눕혔다.

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무쇠 같은 팔뚝에 갇힌 채 누워 있게 되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함이 불안했다.

대체 무슨 심보인 걸까?

고개를 슬쩍 들자, 녀석 또한 마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히익, 눈 마주쳤다.

“대체 왜 매번 숨까지 같이 멈추는지 모르겠군. 그런다고 딸꾹질이 멎나?”

“히끅! 저, 저는, 당신이 저를 거짓말쟁이로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거짓말을 아주 싫어해.”

“히끅.”

“네가 거짓말쟁이였다면 이렇게 같이 누워 있지도 않아.”

하긴 그렇군. 그럼 아직은 날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는 거군.

휴우, 십 년 감수했다. 근데 그럼 갑자기 왜 멈춘 거지?

“그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냥…… 다른 날이 나을 것 같다.”

나직한 목소리. 당연히 부드러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쌀쌀맞거나 냉소적인 느낌도 아니었다.

안심해도 될까? 정말 다른 날이 올까?

에휴, 그래. 저놈도 처음인데 내가 너무 급하게 몰아붙인 감도 없잖지.

이미 판이 엎어져 버린 상황인데 여기서 더 칭얼대봤자 짜증만 돋울 것 같고, 차라리 그냥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 오늘만 날인 게 아니잖아. 다시 제대로 공을 들여서 다음번엔 반드시 거사를 치르고 말겠어. 희망을 잃지 말자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놈의 가슴팍에 슬쩍 턱을 얹고 눈을 초롱초롱 떴다.

“그럼 저 미워하시는 거 아니죠? 제가 싫어지신 거 아니죠?”

“네게 있어 나는 그렇게 불안할 일인가.”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으나 낮게 울리는 음성이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만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주무실 거면 제가 나가드릴까요?”

“아니.”

“같이 자도 돼요?”

“마음대로 해.”

“진짜요?”

“……그래.”

이 도도한 것이 웬일이지? 웬일로 이렇게 순순히 나오는 거야? 함정인가?

놀랍기도 한 한편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괴수 옆구리에 껴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별수 없이 얌전히 몸을 말고 눈을 꼭 감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다시 슬쩍 뜨고 올려다보니, 남편 놈은 어느덧 눈꺼풀을 꾹 닫은 채 혼자 속 편히 잠든 것 같았다.

자는 얼굴도 도도하기 그지없군. 저 속눈썹 긴 것 좀 보게. 연장술이라도 받은 것 같구나.

왠지 평소보다 한결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마드리드에서였다면 지금쯤 대학 졸업에 취업 준비에 정신없을 나이겠지.

하도 어른스러운 척해서 가끔은 아직 어린놈이란 걸 깜빡하게 된다.

나는 조심스럽게 꿈틀거리며 내 몸에 얹힌 놈의 손을 슬쩍 잡고 들여다보았다.

내 손의 두 배는 될 법한 크기였다. 나중에 이 손으로 나를 찔러 죽인단 말이지.

아니야, 난 죽지 않아. 반드시 살 거야. 아직 희망이 있잖아…….

나는 놈의 손을 놓은 뒤 두꺼운 가슴팍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었다.

쿵쿵 하는 선명한 소리가, 강철 같은 육체에 담긴 생명력이 맹렬하게 고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아…….”

주인공 주제에. 내키는 대로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주인공 주제에.

뭘 자꾸 그렇게 망설이는 거야?

차라리 네가 체시아레 같았다면, 내 가족들 같았다면, 내가 겪어온 그 모든 사람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다면, 내게 요구하는 게 그토록 분명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더 쉬웠을 텐데.

이토록 낯설고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잘 자…….”

잘 자렴, 내 배배 꼬인 지푸라기.

이왕이면 나에 대한 좋은 꿈도 좀 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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